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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 15. 다산의 농업관

Gijuzzang Dream 2011. 9. 28. 12:53

 

 

 

 

 

[茶山 朝鮮의 새길을 열다]

 

 15. 다산의 농업관

 

 

농사 짓는 사람만이 땅 소유… 시대를 앞선 ‘토지개혁론’

 

 

 

   

다산의 농업관과 정조의 농업관이 결합된 화성의 둔전 대유평의 근원지인 만석거.

하태황기자 hath@ekgib.com

 

 

조선 사회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강조하는 사회였다.

형식적으로 모든 국가의 토지는 국왕의 것이었지만 실제 토지는 국가와 개인의 소유로 나뉘었다.

국가는 군대 운용에 필요한 둔전(屯田)을 조성하여

백성들에게 경작하여 일정량의 세금을 받아 운영하는 형태와

궁궐운영 경비를 위한 내수사 토지와 궁방전 등이 있었다.

그 외의 나머지 토지는 모두 개인 소유였고 실제 사고파는 일들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노비들이 개인 소유 토지를 갖는 것도 아무 문제없던 시절이었다.

이처럼 토지의 개인 소유가 아무런 제약이 없던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는 사회였기에

대토지 소유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에 반대로 토지를 잃어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양극화는 사회문제를 만들었고

이를 해결하여 안정된 사회체제를 만들기 위한 여러 학자들의 토제제도 운영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실학의 비조라는 유형원은 ‘균전제(均田制)’ 를 주장하여

백성들은 20세부터 토지를 분배 받고, 사대부는 15세부터 분배 받고, 여자는 대상에서 제외하여

신분제도를 인정하여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하는 토지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형원의 학통을 이은 성호 이익은 ‘한전제(限田制)’ 를 주장하여

생활유지를 위해 필요한 토지를 영업전으로 하여 매매를 금지하고

그 밖의 토지는 매매를 허용하여 점진적인 토지 소유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두 실학자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다산은 더욱 놀라운 토지제도를 제안하였다.

그것이 이른바 ‘여전제(閭田制)’ 이다.

다산은 역사와 중국 주례의 연구를 통해 농업은 구직(九職)의 하나이므로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농사에 종사하도록 할 수 없다는 것과

농민만이 토지를 분배받을 수 있다는 것을 엄격히 주장하였다.

장사하는 사람도 있고, 유통하는 사람도 있고, 대장장이도 있는 등

인간 생활에서 9가지의 직업이 존재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농업이라는 것과

모든 사람들이 모두 농사를 지을 수 없어 각자의 직업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르다 하였다.

다산은 실제 농사짓는 농민에게 토지를 주고

농사짓지 않는 부농민(不農民)에게는 각기 적합한 직업을 주어서 한 사람의 실업자도 없게 하여야 하며,

혹시 국가가 상공업을 하는 이들을 모두 농사짓게 하면

9개의 직업 중 8개 직업이 모두 망하게 되어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도탄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 하였다.

더불어 농업 자체도 퇴화될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다산의 견해는 매우 현실적인 논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농사를 짓는 농민만이 토지를 분배받을 수 있다는 것은

당대 사회에서 제기할 수 없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농사짓는 농민과 농사짓지 않는 이들을 불문하고 인구에 따라 토지를 나누어준다면

이는 농업을 중시하는 중농(重農)의 본뜻에도 어그러질 뿐 아니라

농사를 짓지 않고 놀고먹는 이들을 격려하는 나쁜 제도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다산의 기본 인식은 결국 농사는 매우 중요한 것이고

나라의 근본은 맞지만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토지를 분배받고

그들 중심으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을 조금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자!

 

동양 역사에서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인물 중의 하나가 왕망이다.

왕망의 제도는 여러 군주나 학자들에 의해 나쁜 사례로 인용되곤 하는데

다산 역시 그의 잘못된 정책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였다.

왕망의 정전법(井田法)과 후위 이래의 균전법(均田法)이 모두 소기의 실적으로 가두지 못한 것은

대개 농민과 농사짓지 아니하는 부농민을 구분하지 않고 토지를 나누어주는 제도를

남발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토지를 무조건 나누어주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다산은

더 파격적인 생각을 하였다.

농사를 짓지 아니하는 상공인이나 양반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것이 불합리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직접 녹봉을 받는 관료들에게 공신전, 과전, 직전과 같은 토지를 주는 것도 정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관료들의 입장에서 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실제 녹봉을 받으면서 토지까지 받는 것은 이중 수입이 되는 것이고

이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절대 옳은 일이 아닌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였다.

다산은 자신의 농업관을 설명하기 위해 전론(田論)에서 의미있는 사례를 들었다.



“토지를 무조건 나누어 주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것” 확고한 신념
유형원 균전제(均田制) · 이익 한전제(限田制) 두 실학자의 의견 수용하여
‘여전제(閭田制)’라는 파격적인 토지제도를 제안했다.
마을단위로 공동경작하게 하고 공동노동의 모순 인지…
‘일력부(日力簿)’ 만들어 이를 근거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고자 했다.
비록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200여 년 전의 전근대사회에서 다산의 혜안은 놀라운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논 10경(경은 토지의 단위)과 아들 18인을 두었는데

아들 1인은 3경, 2인은 각 2경, 3인은 각 1경을 얻고

그 나머지 4인은 1경도 얻지 못하여 길거리에서 굶어 죽는다면

그는 어찌 부모 노릇을 잘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부모인 군주와 수령이

백성들의 재산을 균등하고 평등하게 제도를 만들지 못하고

서로 빼앗고 자기 적으로 합쳐버리는 약육강식의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만든다면

이는 군주와 수령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의 이야기는 조금씩 더 과격해진다.

 

다산은 당대 사회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얼마나 문제가 있는지를 고발하였다.

다산이 살던 시대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를 추산하면

대략 80만결(결은 토지의 단위로 가장 큰 단위)이고 인구는 대략 800만명이었다.

당시 1호(戶, 가구)가 10명이라고 한다면 각 호당 분배해주는 땅이 1결이 되어야만 재산 균등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무관료 중의 고위 관료들과 민간의 부자들의 1호당 수확량은

수천석에 이르는 것이 심히 많아 이들이 각기 1백결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영남의 최씨와 호남의 왕씨들은 1호당 만석을 얻으니

이는 4백결의 토지를 가지고 독점하고 있어 나머지 백성들의 삶을 곤란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산은 파격적인 제안을 다시 하였다.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부자들의 것을 덜어내어 가난한 자들에게 보태어주어

백성들의 재산을 균등하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이것이 바로 군주와 수령이 해야 할 길이라고 하였다.

이는 요즘 이야기하는 부유세(富裕稅)보다도 훨씬 앞서나간 이론이다.

200여 년 전의 전근대사회에서 토지와 재산의 균등한 분배를 요구하며

부자들과 관료들의 모순을 지적한 것은 오늘날 시각에서 보아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에도 부유세를 주장하였음에도 오늘날 부자 감세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다산이 하늘에서 이 모습을 본다면 무엇이라 말할지 자못 궁금하기 이를 데 없다.


다산의 이러한 생각은 구체적인 토지운영 제도로서 나타난다.

다산은 고대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정전(井田)이 당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중국은 땅이 넓고 평지에 있어 바둑판식 모양의 정전이 가능하나

조선은 산이 많고 개간한 논이 많아 현실적으로 정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현실적 상황을 정확히 인지한 상태에서 이를 근거로 하는 현실적인 토지 운영을 제시하였다.

그것이 바로 ‘여전제(閭田制)’다.

여전(閭田)은 중국의 정전과 달리 산의 계곡을 이용한 자연 형세 그대로의 경계를 확정하여

그 경계안의 내부를 ‘여(閭)’라고 하고 그 안의 땅을 여전이라 하는 것이다.

쉽게 정리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중에 ‘고을’이라는 말이 있다.

리 고을은 어떻고 너네 고을은 어떻고 등 이런 저런 말속에 고을을 넣어 이야기한다.

이 고을은 ‘골’에서 나온 것인데

‘골’ 혹은 ‘골짜기’는 우리 산하에서 산줄기의 아래에 형성된 마을을 이야기한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리 산의 능선에서부터 내려오는 물줄기를 따라 작은 마을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바로 다산이 말한 ‘여’인 것이다.

다산의 여전제는 파격 그 자체이다.

요즘 사회주의 이론도 다산의 여전제를 따라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산은 여전제를 위한 기본 전제로 각각의 ‘여’는 약 30가구로 정하고

3려를 리(里)라 하고 5리를 방(坊)이라 하고 5방을 읍(邑)이라고 규정하였다.

당시 일반적으로 산과 계곡을 끼면서 너른 들판이 있는 지대에서

농사짓는 마을의 가구수가 대략 30가구 정도인 까닭에 이와 같은 규정을 만든 것이다.

다산은 여(閭)에는 여장(閭長)이 있고 1려의 토지는 1려의 주민으로 하여금 공동경작하게 하여

남과 나의 구분이 없고 오직 여장의 지휘를 따르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매일 한 마을에 사는 농민들은 반드시 일을 하러 나와야 하고

여장은 각가 농민들이 일한 분량을 ‘일력부(日力簿)’에 자세히 기록하여

수확기에 이르러 수확물의 전부를 마을의 공청인 도당(都堂)에 반입하여

먼저 일정량의 국가 세금을 제하고,

다음에 일정량의 여장의 봉급을 제하고 나머지 전부는 일력부에 의하여

마을안의 농토에서 일한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것으로 하였다.

공동 노동을 하더라도 무조건 똑같이 나누어가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기록에 의하여 더 많이 일한 사람은 더 가져가고

덜 일한 사람은 덜 가져가게 하는 것이니 매우 공평한 분배법이라 할 수 있다.

 

90년대 이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와 같은 공동소유 공동노동을 하였지만

망한 이유 중의 하나가 더 농장에서 많이 일한 사람에 대한 대우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고 노는 자들이 많아서였던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산은 이미 200여 년 전에 이러한 공동노동의 모순을 인지하고

거기에 일력부를 만들어 여장으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고

이를 근거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자고 하였으니 그 혜안이란 놀라운 것이다.

결국 다산은 당시 사회에서 여전제만이 백성들의 삶을 낫게 하는 길이라고 판단하였다.

그의 여전제는 비록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미래의 대안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었고

현재 우리 곳곳의 공동체 마을에서 실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미래를 예견한 다산의 혜안, 정말 무섭도록 놀라운 것이다. 

 

- 김준혁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 2011년 5월 16일, 경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