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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세기 동아시아 상황과 연행, 연행록

Gijuzzang Dream 2011. 5. 9. 20:09

 

 

 

 

 

 

 

 

17~19세기 동아시아 상황과 연행(燕行) · 연행록(燕行錄)

 

 

 

 

 

                                                                                                          - 임형택(한국실학학회 회장)

 

 

 

1. 조천(朝天)과 연행(燕行)

 

‘연행(燕行)’이란 말은

근대 이전에 중국 주변의 국가들이 중국의 수도(北京=燕京)를 교사절로 다녀오는 것을 지칭하는

일종의 역사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경위가 있다.

 

당초 조선왕조시대에 對明外交를 ‘朝天’ 이라고 일컬었던 데 대해서 對淸外交를 ‘燕行’ 이라고 일컬었다.

 

관습적인 말이었다. 그리고 조천과 연행의 상관기록물이 수다히 산출되었던바

그 서명 역시 먼저는 ‘조천록’, 뒤에는 ‘燕行錄’ 으로 붙여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지난 1960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연행의 기록류를 수집, 편찬하면서

<燕行錄選集> 으로 命名을 한 것이다. 연행 · 연행록이 보편적인 용어로 쓰이게 된 시초였다.

(<燕行錄選集>은 <朝天錄>까지도 燕行錄으로 포괄했음)

 

연행 · 연행록들은 조선과 중국의 관계로 한정이 된 것이었다.

朝中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관심이 닿지 않았던 때문이다.

근자에 조중관계와 유사한 외교형태가 월남(越南, 베트남)이나 유구(琉球, 오키나와)에서도 행해진 사실을 고려하게 되면서 '연행'이란 이 용어는 동아시아세계의 보편적인 역사용어로 떠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朝天’이란 上國의 황제(天子)에게 조근(朝覲)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임이 물론이다.

이에 중국측에서 오는 외교사절을 가리켜선 ‘天使’라고 일컬었다.

朝天이라고 부르던 말이 ‘燕行’으로 바뀌었다 해서 내포사실이 달라진 것은 아닐 터다.

明에서 淸으로 비록 중국의 주인이 바뀌긴 했지만

상국의 천자께 조근(朝覲)하는 행위 자체는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나.

그러나 동일한 형태의 행위를 지칭하는 말이 달라진데 따른 의식의 변화가 있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뿐만 아니고 의식의 변화가 발생한데 따른 객관적 상황의 변화가 있었다. 이런 점들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당시 연행은 그 자체가 외교행위이므로 정치적 의미가 일차적인 것임은 물론이다.

연행을 수용한 측의 입장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에 그치지 않고

연행의 의미는 다면적이고 종합적인 성격을 띠었던 것이다.

오늘날엔 경제교역이 국제관계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연행에 있어서도 의미가 적지 않았다. 조근이 곧 조공(朝貢)을 뜻하듯 상호간의 물적 교류였을 뿐 아니라, 연행의 대열에는 으레 상인들이 끼어들어서 대상(隊商)의 성격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화적 교류의 측면을 들어볼 수 있다.

특히 이 측면에 의해 연행의 의미는 다양하게 확장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의 수도는 동아시아세계에 있어서는 ‘문명의 중심’이었다.

그 당시 조선의 처지로서는 중국이 문명학습의 場이었던 셈이다.

또한 17세기 이래 부단히 진행되어온 ‘서세동점(西勢東漸)’이란 신조류를 인지하는 창구 역시

조선의 지리적 조건 때문에 오로지 중국이었다.

세계에 소식을 통하고 大局의 정세를 살피는데 연행은 그야말로 물실호기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아울러 유의할 점이 있다. 중국 중심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숭문주의(崇文主義)를 지향했던바

조선왕조 사회는 가장 숭문주의로 경도된 상태였다.

사절단 편성에서도 인문적 교양을 우선시해서 비공식요원으로까지 문인엘리트를 참여시킨 것이다.

연행의 과정에서 지식이 소통하고 문화의 교류가 폭넓게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양국지식인들 사이에 직접적 만남으로 대화가 열리게 된 것이다.

요컨대 연행은 정치적·경제적 측면까지 포괄하여 전체를 ‘문화행사’로 간주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한국실학학회는 연행을 기획발표로 잡으면서 ‘연행의 문화사’라고 표제한 것이다.

 

 

2. 동아시아의 17~19세기

 

중국과 그 주변의 국가들 사이를 책봉(冊封)―조공(朝貢)으로 연계하는 방식은

저 아득한 옛날 황하유역에서 발생했던 西周의 봉건제를 동심원적으로 확대한 형태이다.

기실은 유교적인 가부장제의 윤리질서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늘에 해는 하루라도 없을 수 없지만 둘이 있어도 안 되듯

집에는 어른이, 세계에는 천자가 없을 수 없고 둘이 있어서도 안 되는 법이다.

이에 대일통(大一統)과 정통론(正統論)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물론 책봉―조공으로 구성된 체제는 현실적인 힘의 논리에 의해 뒤바뀌는 사태가 역사상에 종종 일어났다.

주변의 이적(夷狄, 오랑캐)이 쳐들어와서 중국의 주인으로 올라선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천하에는 임금이 없을 수 없으므로,

새로 등장한 황제를 중심으로 한 체제로서 재편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책봉―조공의 관계로 구성된 대일통의 체제는 영속성을 지녔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봉―조공체제의 영속성은 19세기말까지였다.

서구주도의 지구적인 세계체제에 동아시아가 흡수당함으로 중국중심의 체제가 붕궤되기에 이른 때문이다.

수천 년을 존속해왔던 동아시아세계는 역사상에 영구히 막을 내린 것이다.

연행 또한 함께 종식되고 말았다.

조공체제가 막을 내리는 19세기 말엽으로 가는 도정에서 17세기를 하나의 전환점으로 잡아볼 수 있다.

19세기로 진행하는 코스로 들어선 것이다.

 

17세기 초 일본열도에서 에도 시대가 개시되었고 그 중반으로 접어들자 대륙에서 明淸의 교체가 일어났다.

앞서 16세기 말에는 일본이 한반도를 침공하고 明이 대규모의 원군을 파견해서 벌어진 7년전쟁은

이후 전개된 동아시아 상황의 서막이 되었던 셈이다.

아울러 유의할 점은 이 7년전쟁에 서구문명이 개발한 무기가 도입되어

전세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던 사실이다. 서세동점이란 전 지구적 움직임이 동아시아에 진출한 것은

16세기 중엽부터로 17세기로 내려오면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졌고 그 영향 또한 여러모로 나타났다.

 

17~19세기는 중국 중심 세계의 장구한 역사에서 끝자락에 해당하고 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이 단계를 어떻게 규정지을 것인가?

곧 조선의 연행이 어떤 역사 상황에서 행해졌던가에 관한 물음이다.

나는 이 시기 동아시아세계를 ‘흔들린 조공질서’로 설명해 왔다.

당시 상황을 규정한 주요변수는 두 측면이 있었다. 하나는 청황제 체제의 등장이며,

다른 하나는 파고를 높여서 지속적으로 밀려왔던 서세의 물결이다.

 

만족의 청이 한족의 명을 밀어내고 세계의 주인으로 들어선 사태는 참으로 경악할 일이었다.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명분론에 비추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일본인들까지도 ‘화이변태(華夷變態)’로 의식하고 그 귀추를 예의주시했다.

중국의 뜻있는 지식인들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天崩地解)’ 절망감에

문명적 위기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의 지식인들 역시 엄청난 충격이고 헤나기 어려운 고뇌였다.

더구나 조선은 남한산성의 국치를 당했으니 反淸의 감정이 끓어올랐던 것도 당연했다.

 

조선의 집권세력은 내부의 이런 정신상황을 고려해서

숭명반청(崇明反淸)을 체제 이데올로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청의 지배체제를 부정하고 보면 ‘북벌(北伐)’은 논리의 필연적 귀결처이다.

이미 상실한 ‘중화의 도’를 복원할 중심으로서 조선을 사고하고 보니

‘중화’는 다른 어디가 아니고 조선에 있었다. 소위 ‘조선 중화주의’이다.

이는 ‘탈중국적 중국중심주의’라고 하겠다.

 

그런데 ‘조선 중화주의’는 청황제 체제가 수립한 중화주의와도 역설적으로 통하는 것이었다.

청황제의 중국지배는 이내 안정을 기하고 종래의 조공체제 또한 복원이 되었다.

이것이 역사의 실제 방향이었다.

조선도 현실적으로는 청조에 대해 사대외교를 전과 다름없이 이행했음이 물론이다.

청의 옹정제(雍正帝)가 ‘천하일통’을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광역으로 이루었음을 자랑하면서

‘화이일가(華夷一家)’를 선언한 것이다. 여기서 중화는 인종에 귀속되지 않는 개념으로 탈바꿈이 되었다.

 

이 ‘만청 중화주의’는 말하자면 ‘탈한족적 중화주의’임에 대해서

‘조선 중화주의’는 ‘탈한족적 · 탈중국적 중화주의’인 셈이다.

우리가 분명히 해두어야 할 바 그 어느 쪽도 중화주의로부터 진정으로 탈피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중화주의에 몹시 집착한 형태라고 보아야 맞다.

 

동아시아세계가 명청교체로 인해서 크게 동요했음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그 충격파는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사상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으며,

위에서 주목한 조천에서 연행으로 용어가 바뀌는 계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명청교체가 조공체제 자체에 어떤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한 것은 아니었다.

청 중심의 조공체제로 복원되어 그 체제는 2백년 이상을 존속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동아시아세계에 바깥에서 들어와 운동을 시작한 서세는 이와는 문제의 차원이 달랐다.

서세의 출현 그 자체가 중국중심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무너뜨린 의미를 갖는다.

중국중심의 천하관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이론에 입각하고 있거니와,

둥근 지구를 돌아서 온 서세의 존재는 벌써 천원지방이 오류임을 확실히 입증한 셈이다.

마테오리치는 <만국곤여전도(萬國坤與全圖)>를 그려서 지리적으로 확인을 시켰으며,

로드리게스는 “지구로 논하면 나라마다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설파해서

중국 중심의 관념이 허구임을 일깨우기도 했다.

서세의 출현으로 중국 중심의 체제에는 치유될 수 없는 균열이 이미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관념은 한번 굳어지면 실제로 분명하고 논리적으로 입증이 된다 해서 곧장 바뀌는 것은 아니다.

 

청국은 새로 나타나서 문을 두드리고 교역을 요구하는 서양 제국들에 대해

조공외교의 틀을 적용시키기를 고집했던 것이다.

그런데 서양제국이 조공외교의 방식에 맞춰 들어오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둥근 자루를 모난 구멍에 박아 넣기’처럼 어긋날 밖에 없었다.

건륭제(乾隆帝) 때 영국여왕의 외교사절로 특파된 메카트니경(Lord G. Macartney)이

의전문제로 다투다가 국서도 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던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결국에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무릎을 꿇고 나서 영국과 치욕적으로 국교를 맺게 되었다.

이어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서양제국의 강압에 의해서 개항을 하거나 식민화되면서

중국 중심세계의 조공체제는 지구상에서 소멸된 것이다.

 

17~19세기 동아시아세계에 있어서 조공질서의 흔들림은 주요인이 외풍에 있었지만

현상이 동아시아 내부에서는 일본에서 가장 뚜렷하다.

앞서 언급한 7년전쟁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도전이었으니

이후로 중일간에 조공관계의 복원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일본은 중국 중심의 체제로부터 이탈한 모양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일본측의 견해지만 17세기 이후 동아시아를 중국과 일본의 대립구도로 보기도 한다.

이 설은 중국 중심적 조공체제가 해체 상태임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에도시대 일본은 다분히 ‘탈 중국 중심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조공질서의 흔들림’은 아직 한자문명권의 해체로 가지 않았으며,

에도시대의 일본은 당시 조선과 다르지 않게 한자문화의 세계에 소속했음이 분명하다.

다만 일본의 경우 본디 중국 중심의 체제에서 아주 느슨한 고리였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서세동점의 전지구적 변화의 물결을 타고 조공질서를 흔드는 역할을 앞장서 수행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계속 파견해서

‘사대교린’이라는 동아시아세계의 전통적인 외교관계를 지속시켰다.

 

 

3. ‘흔들린 조공질서’하의 연행

 

 

累洽重熙四海春, 皇淸職貢萬方均.

書文車軌誰能外, 方趾圓顱F莫不親.

 

<황청직공도(皇淸職貢圖)> 란 책에 첫머리를 장식한 건륭제의 자작시 전반부다.

번역이 되기 어려운 시구인데 대강 뜻을 풀이하자면 이런 말이다.

 

“우풍순조하니 사해가 봄이어늘, 위대한 청제국 만방이 고루 조공을 왔도다.

동문(同文) · 동괘(同軌)의 세계 바깥에 누가 있으랴! 모든 인류가 빠짐없이 친화하누나.”

 

청조가 천하일통을 이룩함에 역내는 물론 내외의 모든 인종과 국가들이 빠짐없이 내공하여

직공도의 굉장한 화폭이 그려지게 되었다는 취지이다.

청조의 위엄과 덕화를 과시하는 내용이지만 세계평화라는 인류적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위에서 ‘동문 · 동궤의 세계’란 한자를 공용하고 중국적인 제도를 수용한 문화적 공동체를 의미하고 있다.

 

런데 한자를 공유하고 중국적인 제도를 수용한 나라가

'직공도(職貢圖)'에 그려진 국가들에서 정작 몇이나 될까?

안남국(安南國) · 유구국(琉球國) · 조선국(朝鮮國) 정도 아닌가.

일본국은 앞서 말한 대로 문화적 공동체에 소속한다고 볼 수 있으나

직공의 대열에는 참여하기를 거부해 ‘반복무상(叛服無常)’으로 폄훼되고 있는 것이다.

하긴 일본국은 명초에 일시 조공을 오고는 길을 계속 끊었던 터이니

청조로 와서 비로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동문 · 동궤’를 문자 그래도 적용해 보면 중국 중심세계는 다분히 허상(虛像)이라고 해야 맞다.

청대로 와서 그런 것도 아니고 본디부터 허상에 가까웠다.

그렇다 해서 조공질서의 체제가 픽션이라거나 역사상에 실재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그대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는 조공질서의 체제가 자족적인 형태로서 항구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서동문(書同文)’의 한자세계로는 방금 거명한 안남국(베트남) · 유구국 · 조선국 및 일본이 손꼽힌다.

지금 말하는 동아시아와 일치하는 것이다.

17~19세기에 이들 국가들이 어떤 상황이었던가를 돌아보면,

유구국의 경우는 1609년에 일본의 살마번(薩摩藩)에 공략을 당해 복속상태에 놓여 있으면서

중국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양속관계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러다가 1879년 일본에 통합, 지금처럼 오키나와현이 된 것이다.

안남국의 경우 19세기로 와서 완조(阮朝)가 국력을 신장하여 메콩델타지역을 장악,

통일국가를 이루게 되지만 불란서의 침략으로 19세기 중반에 식민화의 길로 빠져들었다.

 

청국 또한 아편전쟁에 패전한 이후 서양이 주도하는 만국공법(萬國公法)의 질서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이렇듯 동아시아세계는 19세기가 진행되면서 급속히 분해과정에 들어선 모양이었다.

이런 상태에서도 중국과 주변국 사이의 전통적인 조공관계는

마지막 파단에 이르는 시점까지 존속되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다시 조선과 중국의 관계로 돌아가 보자.

조선국은 조공질서의 세계에서 대단히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청과 조선 사이에 오고 간 사행의 회수가 증언하는 사실이다.

 

<황청직공도(皇淸職貢圖)>에 오른 인종과 국가들이 수자도 많고 세기도 애매한데

5년에 1회, 2년에 1회 정도로 규정되어 있고 매년 1회 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런데 조선에서 청으로 파견한 사절단은 총 478회(겸행, 兼行을 셈하지 않은 수치)이고

청에서 조선으로 온 사절단은 168회로 헤아린다.

중국주변의 다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히 많은 수치이다.

조공의 행렬에서 조선은 언제고 선두에 위치했으니 <皇淸職貢圖>의 맨 앞에 그려진 것은 조선이었다.

한편으로 <명시종(明詩綜)> 같은 책을 보면 맨 끝에 역외(域外)의 시작품을 나라별로 수록하고 있는데

조선편은 물론 순서도 앞이고 수록작품의 편수도 월등히 많다.

청대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명대, 또 원대로 소급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중국 중심의 세계에서 조선은 가장 친밀하고 우수한 국가로 인정받았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조선을 ‘소중화(小中華)’ 혹은 ‘예의지방(禮義之邦)’이라고 일컬었던 것은 주로 이 때문이다.

이 현상을 두고 근대 이전에는 큰 자랑으로 삼았지만

근대 이후로는 별로 내세우고 싶어 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혐오스럽게 여겼던 일이다.

이 사실은 일단 객관적으로 인식하되,

그 의미 또한 여러 방면에서 깊고 열린 식견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17~19세기의 ‘흔들린 조공질서’하에서 지속된 연행에

조선 지식인들이 어떤 자세로 임했던가를 거론해 볼까 한다. 연행을 고찰하기 위한 서설이다.

 

조선의 연행에 있어서 획기적인 시점은 1636년의 청조 성립이다.

연행의 상대국이 명에서 청으로 바뀐 시점이다.

이 시점으로 넘어오기 직전 단계에서

조선은 심하(深河)전투 파병(1619년),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으로 이어진 전란을 겪었다.

이때에 명과의 전통적인 외교를 계속하기 위해 해로연행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연행의 역사에서 특기할 시간대로서 이때에도 연행록들은 씌어졌다.

 

어쨌건 1636년 이래 조중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실상 그 이후 200년은 조중관계가 다른 어느 시기보다도 안정적으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진 시대다.

조선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청을 부정하면서 현실적으로 청과 친밀히 교류했다.

안으로 숭명반청을 외치면서도 밖으로 청과의 사대 관계를 부지런히 수행하다니

그야말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 단계의 연행은 질곡 속에서 행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그 질곡의 실상은 어떠했고 그 질곡을 어떻게 극복해 갔던가.

 

 

“청인들이 중국 땅에 들어가 주인이 된 이후로

先王이 마련한 문물제도는 온통 변하여 야만으로 바뀌었으되,

압록강을 경계로 수 천리 동국의 땅만은 홀로 선왕의 제도를 지키고 있다.

이야말로 압록강 동쪽에 아직 명나라가 존재함을 밝힌 것이다.

비록 국력이 부족해서 오랑캐를 축출하고 중원을 숙청하여 선왕의 훌륭한 제도를 회복하지는 못하지만,

모두 숭정(崇禎)의 연호를 받들어 쓰는 것은 ‘중국’을 보존하려는 뜻이다.”( <열하일기> · 도강록 )

 

<열하일기>의 첫 들머리에 실린 말이다.

<열하일기>는 표제와 같이 일기의 형식이다.

연월일을 써야 하는 바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으로 기년(紀年)해서

“후삼경자(後三庚子)”라고 시작한 데 대해 해명하는 내용이다.

 

조선 사람의 마음에 청은 야만이지 ‘중국’이 아니다.

중국을 회복하자면 북벌이 필수인데 역부족이기 때문에 실시하지는 못하지만

그 대신 마음속의 중국을 보존하려는 취지로 숭정이란 연호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의 문면으로만 보면 대륙(중국)에는 중국이 없다.

서술 주체인 박지원의 사고가 바로 이렇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열하일기>의 서술 주체가 글쓰기의 고도의 전술로서

이 대목을 첫 머리에 올려 놓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

 

<열하일기>는 발표되었던 당시에 ‘오랑캐 연호를 쓴 글(노호지고, 虜號之稿)’이라는 비난을 받기까지 했다.

이 대목은 <열하일기>를 삐딱하게 여기는 시선을 의식한 변명거리로 볼 수 있다.

그런 한편에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이데올로기가 조출한 실상을 선명하게 드러내

이념적 질곡을 은연중에 느끼도록 한 것으로도 읽혀진다.

체제 논리에 대해 역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열하일기> 전체의 주지를 첫머리에다 던져놓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열하일기>를 쭉 읽어보면 청조 지배하의 중국을 야만시하는 우리의 관념과 태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지적하고 일깨우는 언표와 논리가 전면에 깔려 있음을 곧 알 수 있다.

 

“지금 청나라가 겨우 4대밖에 되지 않으나 문치무비(文治武備)가 썩 훌륭하니 …

이 또한 하늘이 보낸 명리(命吏)가 아닌가도 싶다.”<관내정사(關內程史) · 호질발(虎叱跋)>

 

청조의 치적을 대단히 평가하는 한편, 숭명반청의 논리를 두고서는

“공담존양(空談尊攘)”<구외이문(口外異聞) · 나약국서(羅約國書)>이라고 매도하기도 한 것이다.

 

<열하일기>는 요컨대 청황제 체제하의 중국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이념적 질곡을 제거하는데 주지가 있었다. 그리하여 북벌론을 북학론으로 대치한 것이다.

북학의 본뜻은 주변부의 처지에서 선진문화를 배우자는 의미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청의 선진문물을 배우고 받아들이는 것이 긴히 요망된다.

그렇다 해서 중화주의로 복귀하자는 뜻은 전혀 아니었다. 거기에는 중대한 사상사적 전환의 의미가 있다.

<열하일기>에서 제창한 북학론은 자아의 각성에 따른 주체의식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화이지분(華夷之分)이란 이념의 틀은 인간세상의 편견일 뿐,

하늘의 공평한 안목으로 보면 그런 차등이 있을 수 없다고 천명한다.

 

<열하일기>와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담헌연기(湛軒燕記)>의 저자 홍대용 또한

땅덩이는 둥글고 둥근 땅덩이가 하늘을 돈다는 과학적 우주관에 입각해서

화이론의 ‘내외지분(內外之分)’을 상대적인 것으로 주장하여 유명한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을 제기한다.

‘숭명반청’ ― ‘조선 중화주의’의 극복 과정은 사상의 자유를 지향한 이론투쟁의 과정이기도 하다.

 

홍대용 · 박지원의 18세기를 지나 정약용 · 김정희의 19세기로 내려오면

대청 관계가 이념적 질곡에 의한 고질적인 정신 장애로부터 탈피한 모습을 보여준다.

정약용의 경우 자신이 연행할 기회를 얻지 못했으나

'사대고례(事大考例)' 라는 대청 외교를 정상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저술을 하였으며,

김정희의 경우 청조의 일류 지식인들과 폭넓게 친교하고 중국 학계와 호흡을 같이 하여,

실사구시의 학을 선도한 것이다.

 

19세기로 와서 ‘연행의 문화사’는 정상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시점에서 조중의 지식인들 사이에 직접적인 만남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이를 통한 지식의 소통이 확대되었던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국경과 인종을 넘어선 우정이 싹트고 ‘이성적 대화’의 길이 열리고 있었다.

 

본 단원은 ‘흔들린 조공질서’하의 연행을 통관해 보기 위해 설정했다.

이상의 서술은 본래의 목적에 미달했기 때문에

17~19 세기 연행의 역사를 소시기로 구분지어 보는 견해를 여기에 제시해 둔다.

 

제1기 명청 교체기, 해로사행

제2기 반청 의식에 사로잡힌 시기

제3기 실학적 각성의 시기

제4기 조공체제의 해체기

 

 

4. 조선의 燕行錄

 

'연행록'이란

연행에 직접 참여한 인사가 연행과정에서의 견문 및 감회, 의론 등을 기록한 문건을 지칭하는 것이다.

공적인 보고의 형식으로 작성된 문서도 응당 있었겠으나

조선에서 연행록이라고 하면 대개 사적인 성격의 저술을 지칭하고 있다.

그런 만큼 기록자의 개성적 안목과 창작적 역량이 발휘될 가능성이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의 연행록류는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품종이 많고

분량 또한 한우충동(汗牛充棟)으로도 채우기 힘겨울 지경이다.

최초로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수집, 간행한 <연행록선집(燕行錄選集)>에는 총 20종이 수록되어 있다.

다음 임기중 교수에 의해 편찬된 <연행록전집(燕行錄全集)>은 380종의 자료를 100책에 망라한 거질이다.

(이 380종 속에는 <연행록선집>에 수록되었던 20종도 포함되어 있음)

 

그리고 최근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연행록선집보유(燕行錄選集補遺)>를 편찬한 바,

20종의 신 자료를 발굴, 소개한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 파악된 연행록류는 대략 400종이 된다.

아직도 어딘가에 파묻혀 있는 것이 없지 않을 터이니, 앞으로 더 발견될 여지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연행록>은 조공체제의 동아시아세계에서 국제적 교류의 소산이다.

이러한 그 자체의 성격이 곧 그것의 특별한 문헌적 가치이기도 하다.

연행록류에 국제적 관심이 근래 와서 상승하고 있다.

우리의 연행록류는 민족문화의 특이하고도 소중한 부분임이 물론이지만,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공유하고 연구해야 할 대상임을 아울러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제 연행록이란 문헌이 우리의 고전으로서 갖는 위상과 특성,

나아가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를 언급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할까 한다.

저 방대한 연행록류에 접근하는 시각을 잡기 위한 하나의 시론이다.

 

 

1) 조선조에서 '연행록'은 ‘해행록(海行錄)’에 대응되는 문헌이다.

조선이 취한 외교는 ‘사대’와 ‘교린’이 기본 구도였다.

바다 건너 강호(江戶)를 통신사로 다녀오는 것을 '해행'=(해사, 海槎),

그 상관 기록물을 ‘해행록'=(해사록, 海槎i錄)’이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해행은 연행에 비해 빈도가 훨씬 낮았던데 견주어 해행록류의 성과는 실로 놀라웠다.

하지만 연행록류의 방대한 축적에는 멀리 미치지 못한 것은 불가피한 형세였다.

 

2) 연행록을 연행의 상관 기록물이라고 하면 그 형식은 여러 가지가 존재했다.

기행시와 기행산문이 기본적인 글쓰기 형태이며 기행가사(紀行歌辭)로 표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고 조헌의 <중봉동환봉사(重峰東還封事)>나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와 같이 논설적인 저술도 있다.

 

기행가사로는 해행에서 김인겸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연행에서 홍순학의 <연행가(燕行歌)>가 대표적인 것이다.

남용익의 <장유가(壯遊歌)>가 있는데 해행을 하고 연행도 한 자신의 체험을 살려서

양자를 통합, 노래로 엮은 것이다. 이 기행가사는 여성독자들을 위해서 국문으로 쓴 것인데

부녀층의 요구에 응답해서 연행록들이 국문으로 번역된 사례도 더러 있었다.

 

홍대용의 <담헌연기(湛軒燕記)>은 국문본으로 <을병연행록>이 따로 전하는바

단순한 변역이 아니고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

한문연행록이 동아시아 세계의 보편적인 형식으로 씌어진 것임에 대해서

<국문연행록>은 자국 고유의 형식으로 씌어진 점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3) 동아시아 세계에서 행해진 조공 외교의 상관 기록물로는,

당연한 말인데 조선의 연행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월남의 연행록, 유구의 연행록도 존재했다.

최근 중국에서 <월남한문연행문헌집성(越南漢文燕行文獻集成)> (상해복단대학문사연구원, 上海復旦大學文史硏究院, 2009)이 간행된 바 53인의 79종의 자료가 25책에 수록되어 있다.

 

조공외교는 중심과 주변의 종적인 관계이긴 하지만 상호주의가 적용되고 있었다.

중국의 사절단이 책봉사(冊封使) 등 명목으로 조선국 · 안남국 · 유구국 등에 파견된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사절단으로 나왔던 인사들 중에서 기록을 남긴 사례가 없지 않았다.

그중에도 송대에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명대에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가 유명하다.

조선에서는 명의 칙사가 나오면 으레 접반사(接伴使)가 나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울려 수창한 시편을 <황화집(皇華集)>이란 이름으로 정리, 간행하기도 하였다.

 

중국이 유구국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명대에는 17회, 청대에는 8회에 불과했다.

조선에 비해보면 희소한 편인데,

흥미로운 사실은 유구국을 다녀온 중국 사신은 관련 저술이나 여행기록을 남기는 경향이 있었다.

대만에서 간행한 '사유구록류(使琉球錄類)'가 여러 종 확인되고 있으며,

중국에서도 '국가도서관유구자료(國家圖書館琉球資料)' (北京圖書館出版社)란 표제로

몇 차례 편찬, 간행된 바 있다.

 

4) 앞서 연행에 관련한 글쓰기는 기행시와 기행산문이 기본 형태였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중에도 시 형식이 더 기본적인 것이었다.

한시는 동문세계(同文世界)에서 가장 보편적인 문학형식이며, 일종의 국제적인 사교의 수단이기도 했다.

中朝외교의 부산물로 <황화집(皇華集)>이 편찬된 것도 이 때문이다.

<월남한문연행문헌집성(越南漢文燕行文獻集成)>에 수록된 자료가 79종이나 되지만

대부분 시편으로 채워져 있다. 월남측 여행 문헌에서 흥미로운 사실의 하나는

北京에서 조선 사신과 만나 한시를 수창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유구의 사신도 때로는 함께 끼어서 “천지간동문지국(天地間同文之國)”(월남이문(越南李文馥), 「견유구국사자병인(見琉球國使者幷引)」 임을 확인하기도 했다.

 

5) 조선의 연행록은 동아시아세계 조공외교의 문헌에서 가장 방대한 편인데 대부분 산문을 쓰고 있다.

이 점은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해야 할 사항이다.

물론 시 형식이 기본적인 표현수단이자 사교의 수단이었던 만큼

연행의 한시가 산문에 앞서 씌어졌고 뒤에까지도 한시를 빌어서 견문과 소회를 표현했다.

연행에 참여한 인사들의 문집에는 대개 연행의 한시가 다량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연행의 경험을 산문으로 기록하는 문학적 관행이 성립한 것이다.

 

16세기말 허봉의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에서부터

19세기말 김윤식의 <영선일기(領選日記)>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연행록의 걸작 · 명품들이 모두 산문으로 남겨졌다.

이 현상은 세계에 대한 구체적 인식과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실현하기 위해서

산문을 요구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 2010년 한국실학학회 ․ 실학박물관연합학술대회 - 연행의 문화사(燕行의 文化史)

- 2010년 10월 30일, 실학박물관

- 한국실학연구, 20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