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 승리의 숨겨진 비밀
조선 수군, 한산대첩서 완승한 비결은
1592년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 '학의 날개'가 펼쳐졌다. 이름하여 '학익진(鶴翼陣)'.
조선 수군이 펼친 이 작전에서 왜선 59척이 침몰했고 왜군 9,000여 명이 전사했다.
학익진으로 대표되는 한산대첩은 임진왜란 개전 초기, 수세에 몰렸던 전세를 단번에 뒤집어 버렸다.
4월28일 방송 KBS1 <역사스페셜> 은 '철저분석, 한산대첩'을 통해 한산대첩의 승리 요인을 분석한다.
이순신의 승리보고서인 '견내량파왜병장(見內梁破倭兵狀)'을 중심으로 한산대첩 전투 과정을 추적해본다.
견내량 수로는 진해군함과 마산항으로 연결되는 해상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이지만
대형선박과 군함이 통행하는 가덕수로에 비해 소형선박이 주로 통행해
이에 대한 경계체계 보완이 필요한 곳이었다.
역사적으로 견내량 수로에 대한 해상 안보적 중요성은 해군과 연관을 맺어온 곳,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이곳 수로를 통해 왜군을 유인해 한산도대첩을 승리로 거두었고,
한국전쟁 중 통영상륙작전에는 해병대가 통영 견유마을로 기습 상륙을 감행, 승리를 이끔으로써
낙동강 전선방어에 크게 기여한 곳이기도 하다.
거제와 통영 사이의 좁은 바다, 견내량에 70여 척의 왜선이 정박한다.
당시 최정예 일본 수군이 정박했던 견내량은 좁고 암초가 많아 전투에 적합한 바다가 아니었다.
그러나 전술에 능통했던 이순신은
'넓은 바다로 적을 이끌어낸 뒤 잡아버린다(인출전포지계 · 引出全捕之計)'는 목표를 세운다.
작전을 계획하고, 한산도 앞바다에 학의 날개를 펼쳤다. 이름하여 '학익진(鶴翼陣)'이다.
당시 우리의 전선은 왜군의 병선과 달리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으로 탁월한 선회 능력을 가진 판옥선이었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의 탁월한 선회 능력으로 화력 공백기인 재장전 시간 동안 공격력을 잃지 않았다.
왜군은 학의 날개처럼 포위해 오는 조선 수군의 포격에 의해 순식간에 격파됐다.
이순신은 이날 전투를 '화살과 포탄의 형세가 마치 폭풍과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학익진(鶴翼陣)은 완벽한 전술이었을까?
학익진은 적군의 배를 향해 이동하는 동안 측면의 포를 쏠 수 없기 때문에 화력 집중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 수군의 화포는 재장전하는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다.
제작진은 "바닥이 평평했던 우리 수군의 '판옥선'이 한산대첩 승리의 비결이었다"고 말한다.
판옥선의 탁월한 선회 능력으로 재장전 시간 동안 공격력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당시 최정예 일본 수군을 상대로 조선 수군이 완벽한 승리를 거둔 비결로 꼽히는
정확한 '연속 포사격'도 조명한다.
- 2011.04.28 조선.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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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탄신 466주년 특집 | ||
이 나라 왜적에서 구해내고 순국하신 민족의 성웅이여 신통 병법 신화처럼 빛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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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기념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혼이 담긴 유물 40여 점이 한 자리에 모였다.
왜적과의 결전을 앞두고 마음을 다잡으며 썼다는 난중일기.
그리고 거북선에서 호령하며 왜적을 겨뤘던 긴 칼.
거북선은 어떻게 만들었고 한산대첩의 '학익진'은 어떤 작전이었는지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하기 위해 내린 '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
새로 보물로 지정된 '기복수직교서'는
선조는 한 때 이순신 장군을 오해하고 통제사직을 박탈했던 걸 후회하면서
선조가 이순신 장군에게, 어머니 상중이지만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한다고 보낸 문서이다.
"그대의 직함을 갈고 백의종군하도록 한 것은 과인의 지혜가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다"고
말한다. 충무공을 옥에 가두고 백의종군하게 하여 우리 수군의 패전을 초래케 하였다하는 사과와 후회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런 가운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던 해 사돈에게 보낸 걸로 추정되는 편지가 고문서 수집가에게서 발견되었는데, 진품으로 밝혀질 경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생전에 쓴 마지막 편지로 기록되게 된다.
백의종군하던 충무공 이순신은 다시 통제사가 돼 전쟁터로 달려간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이끈다.
기복수직교서를 비롯해 충무공 이순신과 관련된 고문서 13점이 보물 1564호에 추가됐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13점 가운데 9점은 이 충무공 종가에서 보관하던 중 2009년 문화재청에 새로 기탁한 유물이다.
새로 보물로 지정된 고문서는 '기복수직교서' 외에도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고 받은 무과홍패(武科紅牌), 아내 방씨에게 '정경부인(貞敬夫人)'을 내리는 교지,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리는 교지를 비롯해 교서(敎書)ㆍ유서(諭書)ㆍ유지(有旨)ㆍ별급문기(別給文記) 등이다.
충남 아산의 현충사에 지난 4년 동안 총사업비 135억 원을 들여 만든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은
2011년 4월28일 충무공탄신일 466주년에 맞춰 기념관을 개관한다.
'기복수직교서(起復受職敎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종가에서 소장했던 유물 9점과 현충사 내 소장하던 유물 4점 등
이 충무공의 고문서 13점이 27일 국가 보물로 지정됐다.
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 (보물 제 1564호)
선조가 1597년 7월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우리 수군이 궤멸했다는 패보를 접한 조정에서
이순신을 그해 7월23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영하는 교서 원본.
선조가 임진왜란 중 어머님 상중인 그를 다시 통제사에 임명하며 내린 교서를 통해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물러나게 해 결국 수군패전을 초래한 것을 후회한다는
'상하언재(尙何言哉·무슨할말이 있으리오)' 구절이 2번씩 표현되는 등 내용을 담고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6년째 되던 1597년, 충무공 이순신은 옥에 갇혔다가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풀려났지만, 곧 어머니를 여의는 슬픔을 겪게 된다. 그 해 7월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대패하자, 선조 임금은 상중인 이충무공에게 수군통제사를 맡아줄 것을 요청하는 교서를 내린다.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송대성과장은 "이는 유교를 받드는 당시 조선에서 부모상을 당하면 2년간 관직을 맡지 못하게 하는 관례를 깬 것으로 당시 상황의 얼마나 위급했는가를 말해준다."고 설명했다.
이 교서에는 이순신을 통제사직에서 물러나게 해 수군패전을 초래케 한데 대한 선조임금의 후회와 사과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을 하도록 하였던 것은 역시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그리하여 오늘 이같이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라 무슨 할말이 있으리요. 무슨 할말이 있으리요."(기복수직교서 중)
충무공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뒤로 한채 침몰 직전의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냈다. 이충무공의 공적은 1604년 선조임금이 이순신사후 그를 선무1등공신에 봉하면서 내린 선무공신교소에 잘 드러나 있다.
"적의 무리들이 달아난 것은 진실로 장군의 전함에 떨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큰 배가 물길을 잃은 것은, 참으로 조정의 계책이 잘못된 탓이라. 나는 곧은 충신을 저버린 것이 부끄러워 급히 장수의 권한을 돌려주고, 경(충무공)은 충성으로 분발하기에 더욱 힘써서 곧장 회령포로 가서 불에 타고 남은 배를 수습하고 피혜한 병졸들을 거두어 모아서 13개의 다락배로 비로소 앞바다에 진을 쳤는데, 백만 장졸들의 떠도는 넋이 물결 위에 피로 물들였다."(선무공신교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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