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한산대첩 승리의 숨겨진 비밀

Gijuzzang Dream 2011. 4. 28. 10:53

 

 

 

 

 

 

 한산대첩 승리의 숨겨진 비밀

 

 

조선 수군, 한산대첩서 완승한 비결은

 

1592년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 '학의 날개'가 펼쳐졌다. 이름하여 '학익진(鶴翼陣)'.

조선 수군이 펼친 이 작전에서 왜선 59척이 침몰했고 왜군 9,000여 명이 전사했다.

학익진으로 대표되는 한산대첩은 임진왜란 개전 초기, 수세에 몰렸던 전세를 단번에 뒤집어 버렸다.

4월28일 방송  KBS1 <역사스페셜> 은 '철저분석, 한산대첩'을 통해 한산대첩의 승리 요인을 분석한다.

 


 

이순신의 승리보고서인 '견내량파왜병장(見內梁破倭兵狀)'을 중심으로 한산대첩 전투 과정을 추적해본다.

견내량 수로는 진해군함과 마산항으로 연결되는 해상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이지만

대형선박과 군함이 통행하는 가덕수로에 비해 소형선박이 주로 통행해

이에 대한 경계체계 보완이 필요한 곳이었다.

역사적으로 견내량 수로에 대한 해상 안보적 중요성은 해군과 연관을 맺어온 곳,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이곳 수로를 통해 왜군을 유인해 한산도대첩을 승리로 거두었고,

한국전쟁 중 통영상륙작전에는 해병대가 통영 견유마을로 기습 상륙을 감행, 승리를 이끔으로써

낙동강 전선방어에 크게 기여한 곳이기도 하다.

 

거제와 통영 사이의 좁은 바다, 견내량에 70여 척의 왜선이 정박한다.

당시 최정예 일본 수군이 정박했던 견내량은 좁고 암초가 많아 전투에 적합한 바다가 아니었다.

그러나 전술에 능통했던 이순신은

'넓은 바다로 적을 이끌어낸 뒤 잡아버린다(인출전포지계 · 引出全捕之計)'는 목표를 세운다.

작전을 계획하고, 한산도 앞바다에 학의 날개를 펼쳤다. 이름하여 '학익진(鶴翼陣)'이다.



당시 우리의 전선은 왜군의 병선과 달리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으로 탁월한 선회 능력을 가진 판옥선이었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의 탁월한 선회 능력으로 화력 공백기인 재장전 시간 동안 공격력을 잃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이순신은 일본 함대를 유인하기 위해 6척의 유인함선을 출동시켰다.

왜군은 학의 날개처럼 포위해 오는 조선 수군의 포격에 의해 순식간에 격파됐다.

이순신은 이날 전투를 '화살과 포탄의 형세가 마치 폭풍과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학익진(鶴翼陣)은 완벽한 전술이었을까?

학익진은 적군의 배를 향해 이동하는 동안 측면의 포를 쏠 수 없기 때문에 화력 집중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 수군의 화포는 재장전하는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다.

제작진은 "바닥이 평평했던 우리 수군의 '판옥선'이 한산대첩 승리의 비결이었다"고 말한다.

판옥선의 탁월한 선회 능력으로 재장전 시간 동안 공격력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당시 최정예 일본 수군을 상대로 조선 수군이 완벽한 승리를 거둔 비결로 꼽히는

정확한 '연속 포사격'도 조명한다.

- 2011.04.28 조선. 경향

 

 

 

  

 

 

 

원균을 생각한다

 

인품이 청렴하고 부하에 신뢰 얻었던 猛將

  

“저에겐 1차 연평해전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1999년 6월 제1연평해전에 참전했던 친척 동생의 말이다.

제1 연평해전은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우리 영해를 침범한 북한 경비정을

해군의 고속정이 선체를 충돌시키는 방법으로 밀어내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태였다.

1999년 6월 15일 80t급 북한 경비정 2척이 꽃게잡이 어선 20척과 함께 NLL 남쪽 2㎞ 해역까지 내려왔으며,

이어서 420t급 2척이 어뢰정 3척의 호위를 받으며 남하했다.

이에 우리 해군은 고속정과 초계함 10여 척을 동원해 밀어내기식 공격을 감행했다.

 

 원균 사당과 영정 / 임진왜란 해전도

 

충돌공격을 받은 북한 경비정은 소총으로 선제 사격을 하다가 25㎜ 기관포를 발사했으며,

북한 어뢰정 3척도 공격에 가담했다. 해군은 즉각 초계함의 76㎜ 함포와 고속정의 40㎜ 기관포 등으로

응사해 북한 어뢰정과 경비정을 명중시켰다. 이 교전에서 북한의 어뢰정 1척이 침몰했고,

420t급 경비정 1척이 대파됐으며, 나머지 경비정 3척도 선체 등이 파손된 채 퇴각했다.

우리 해군은 선체가 가벼운 피해를 입고 장병 7명이 부상한 정도였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사용된 선체를 충돌해 공격하는 방법은

임진왜란 때 원균 장군이 해전에서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군을 동원해 조선을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조선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진격하자 곳곳의 조선장군과 지방관리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이 당시 조선군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준 장군이 원균 장군이다.

그는 당시 경상우수사로 영남지역의 해역 반을 책임지는 제독이었다.

경상좌수사였던 박홍과 장병들이 왜군과 싸우지도 않고 다 도망치면서 경상좌수영은 궤멸했다.

이제 경상우수영의 원균만 남았다. 700여 척의 전함으로 침략한 일본과 맞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척후를 통해 대응책을 모색했다.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 주요 지역에 대한 방어를 철저히 하는 한편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5월7일 옥포해전에서 이순신과 합세해 적선 26척을 격침했다.
이후 합포해전 · 적진포해전 · 사천포해전 · 당포해전 · 당항포해전 · 율포해전 · 한산도대첩 ·

안골포해전 · 부산포해전 등에 참전해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무찔렀다.

해전에서 사용한 전술에서 이순신과 원균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순신은 선박의 빠른 이동과 막강한 화력을 동원한 포격 위주의 공격을 선호했다.
그러나 원균은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의 전투 스타일은 과감한 당파(撞破) 작전이었다.

왜군의 전함은 삼나무로, 조선군의 전함은 소나무로 돼 있어

우리 배가 더 견고하고 튼튼한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는 과감하게 적선에 부딪쳐 왜군의 배를 격침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전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근거리 전투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조총으로 무장돼 근거리 전투에 우월함을 보였던 왜군들과의 전투에서는

위험 부담이 매우 큰 전투 방식이었다.

그러나 원균과 그의 장수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적선으로 뛰어들어 예상하지 못한 전공을 세우곤 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군을 1개월간 전라도 해역에 진출하지 못하게 한 것은

수적 열세를 용맹으로 막아낸 원균 장군의 공이 컸다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원균이 이순신과 협력해 승전을 거듭할 무렵

육지에서는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패배하면서 한양이 왜군에게 함락됐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면서 그와의 불화 탓에 원균은 해군을 떠나

육군인 충청절도사로 자리를 옮겨 상당산성을 개축했고 이후에는 전라좌병사로 옮겼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이순신의 파직으로 수군통제사가 됐다.

원균 장군은 기문포해전에서 승리해 조선군의 사기를 드높였다.
그러나 안골포와 가덕도에 있는 왜군 본진을 공격하는 작전을 두고

도원수 권율에게 육·해군의 협공작전을 건의했다가 묵살당하고 오히려 곤장형까지 받았다.

결국,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하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 등과 함께 전사하게 된다.

원균은 경상도병마절도사 원준량의 장남으로 평택시 도일동에서 태어났는데,

원주 원씨 집안은 대대로 뛰어난 무인이 배출된 명문집안이다.

원균 장군의 형제들과 가까운 친척들이 임진왜란 때 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던

애국적인 집안이기도 하다. 원균은 무과에 급제한 뒤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에는

여진족을 토벌한 공로로 젊은 나이에 부령부사로 특진했다.
성격이 호탕하고 용맹해 전투에 앞장서는 용장이며, 청렴하고 부하들을 아껴 신뢰를 얻었고,

상당산성을 수축할 때는 공사장에 토굴을 파고 기거하며 공사를 독려했다는 실록의 기록도 있다.

해군 제독으로는 다소 부족했을지 몰라도 육군 장군으로는 참으로 용맹한 장군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3년,

선조는 이순신 ·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올려 그의 애국심과 공로를 기렸다.


신립과 원균의 다른 점은 - 독자적인 전투 권한 · 상부의 압력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군대가 패배한 대표적인 전투가

신립 장군이 이끈 탄금대 전투와 원균 장군이 이끈 칠천량전투다.

이 두 장수의 공통점으로는 북방 정벌전쟁에서 뛰어난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차이라면 신립은 자기의 전략전술대로 전투했고,

원균은 상부의 압력으로 독자적인 해군 제독으로서의 전쟁을 펼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탄금대전투는 신립이 이끄는 8000명의 조선군이

탄금대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만8700명의 왜군과 벌인 전투다.

조령에서 싸워야 한다는 종사관의 주장을 묵살하고, 넓은 들판에서 기병을 이용해 싸우면 이길 수 있다고

신립은 판단했다. 결과는 신립의 조선군이 크게 패배했다.

일본군의 본진이 있는 안골포를 공격하라는 도원수 권율의 말에

수군 단독 공격보다는 육군과 같이 협공해야 승산이 있다고 원균이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묵살되고 결국 칠천량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거의 전멸하고 만다.

후일 역사가들은 똑같은 치명적 패배를 당했음에도

신립에게는 후한 평가를, 원균에게는 혹독한 평가를 한다.

만일 원균에게 신립에게처럼 독자적인 전투권한을 주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 2011.04.27 국방일보

 

 

 

 

 

 


 

이순신 장군 탄신 466주년 특집

이 나라 왜적에서 구해내고 순국하신 민족의 성웅이여 신통 병법 신화처럼 빛나라

 

 

 

“신에게는 아직 전선 열두 척이 남았나이다.”

해군2함대사령부에서 충무공 탄신일을 맞아 기념비를 제막하고 있다.

충무공은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서처럼 명량해전에서 12척의 전선으로

열 배가 넘는 왜선 130여 척을 격파했다. -1990년 4월 28일 국방일보 DB

 

2011년 4월28일은 이순신 장군 탄신 466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순신 장군이 `손자병법'을 얼마나 능숙하게 잘 활용했는가.

실전에서 `손자병법' 등 병법서를 응용한 경우를 살펴보자.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아산 현충사.

 

사적 제232호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


혼인한 뒤 무과시험을 준비하기 전까지는 이순신도 다른 선비의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사서오경을 공부했다. 하지만 ‘난중일기’에는 그 흔한 공자와 맹자의 말씀을 인용한 대목은 단 한 군데도 없다. 그 대신 ‘병법에 이르기를…’ 하고 시작하는 대목은 흔하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순신이 병법에 통달한 명장이었음을 일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참으로 병법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실전에 알맞게 응용하고 원용해 해전마다 빛나는 승리를 기록한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각종 병법 훤하게 꿰뚫어

이순신은 젊은 시절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술을 연마하는 한편 무경칠서(武經七書)를 포함해 여러 가지 병법서를 읽고 또 읽어 훤하게 꿰뚫은 사람이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해전에서 ‘손자병법’을 비롯한 고금의 병법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살펴보자.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병법을 육전(陸戰)이 아닌 해전에 응용하기란 한결 더 어려운 법이다. 이를테면 진법(陣法)만 해도 그렇다. 육상이라면 원진(圓陣)이니 방진(方陣)이니 일자진(一字陣)이니 장사진(長蛇陣)이니 하는 진형을 펼치기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쉴 새 없이 파도가 치는 해상에서 전함을 움직여 진을 치는 것은 말과 같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진을 변화시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학익진 전법 한산대첩 쾌거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한산대첩을 이룩한 것은 저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을 성공적으로 펼쳤기 때문이다. 학익진은 이순신의 독창적인 진법이었다. 뿐만 아니라 학익진은 세계 해전의 역사를 바꾼 획기적 전법이기도 했다. 1592년 7월 8일 한산해전이 있기 전까지는 학익진이나 이와 비슷한 해전이 동양이건 서양이건 어디에서도 없었다. 학익진은 이름 그대로 학이 날개를 펼치듯이 함대를 늘어세운 뒤, 학의 머리에 해당하는 한가운데서 거북선이 적군 함대를 향해 돌격하는 전법이다.

이순신은 견내량에서 적 함대와 마주쳤으나 해협의 폭이 좁고 육지와 가깝기 때문에 왜선들을 보다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했다. 당시 적군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끈 왜 수군 70척. 우리 수군은 이순신과 이억기의 전라 좌·우수영 52척, 원균의 경상우수영 소속 7척 등 59척. 이 가운데 3척은 거북선이었다.

이순신은 먼저 선봉함 5, 6척을 보내 적과 싸우는 척하다가 퇴각토록 했고, 예상대로 왜적 함대는 유인책에 말려들어 좁은 견내량에서 빠져나와 넓은 한산도 해역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이순신은 모든 함대에 명령을 내려 학익진을 펼치도록 했다. 이에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일시에 선회해 학익진을 펼친 뒤 거북선을 선두로 해 그대로 왜적 함대를 향해 돌격했다.

이 싸움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는 미처 도주할 새도 없이 궤멸당해 59척이 격파, 침몰당하고 가까스로 달아난 것은 14척에 불과했다. 이 싸움에서 거둔 전과 가운데 왜적의 사상자 수는 전함 1척당 평균 50명으로 잡아도 3000여 명을 헤아릴 수 있다.

그때까지 해전이라면 전함과 전함끼리 뱃전을 붙이고 군사들이 상대방의 배로 건너가 단병접전, 즉 육박전을 벌여 승패를 가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와 같은 해전의 양상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함 대 함이든, 육박전이든 접근전에 능한 왜군과는 거리를 두고 싸우는 것이 유리했다.

이순신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적함의 조총 사정거리 밖에서 보다 우세한 화약무기로써 포격전 위주의 해전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처럼 탁월한 용병술 덕분에 임진왜란 7년 전 기간을 통해 이순신이 지휘한 함대는 단 한 척의 전함도 왜군에게 격파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 한 척의 전함도 파괴 안돼

저 유명한 거북선을 비롯해 판옥선만 해도 200여 척에 이르는 우리의 막강했던 수군이 치욕적인 궤멸을 당한 것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고앉았던 원균의 칠천량 패전뿐이었다. 하지만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은 전멸하다시피 패망하고 남은 12척의 전함과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13척 대 133척의 열세를 기적적인 승리로 바꾼 명량대첩의 신화를 이룩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1597년 9월 15일 명량해전을 하루 앞두고 휘하 장졸들에게 훈시한 말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병법에는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고, 또 한 사람이 길을 지키면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 우리를 두고 이름이라….”

이순신의 이 말은 ‘손자병법’이 아니라 오기의 ‘오자(吳子)’에 나온다.

‘오자’ 제3편 치병(治兵) 제4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원용한 말이다. 

오자가 말하기를, 모름지기 전쟁터는 시체를 두는 땅이라,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요행으로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장수는 마치 물이 새는 배 안에 앉은 듯, 불이 타는 집 안에 엎드린 듯해, 적의 지혜로운 자도 그 꾀가 미치지 못하게 하고, 적의 용맹스러운 자도 그 성냄이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이에 적과 맞서도 좋을 것이다….

 
임진왜란 해전에서 이순신의 전법은 유리한 위치의 왜적을 내가 원하는 장소로 끌어내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싸워 무찌르는 것이었다.

이는 ‘손자병법 시계편’에 나오는 “적이 강하면 피한다”, 또는 “작은 이익을 주어 유인하고, 낮게 해 교만하게 만든다”는 말을 그대로 원용한 것이다.

`손자병법' 적용 왜적 무찔러  

한편 이순신이 웅천과 부산포의 왜적을 무찌르지 못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손자병법’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손자병법 구변편’에는 “궁한 적을 쫓지 않는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그 당시 웅천과 부산포에 웅거하고 있던 왜군이 바로 궁지에 몰려 고양이라도 물 만큼 절박한 상태에 빠진 쥐와 같았던 것이다.

뒤에서는 국왕과 대신들이 적을 치라고 성화였지만 이순신은 앞뒤 가리지 않고 무모한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륙합동작전을 요구했던 것인데, 이마저 육군 장수들이 깔고 뭉개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원균이 뭐라고 했던가. 자신은 불과 수백 명의 군사로 배를 끌고 부산포 앞바다에 가서 무력시위를 하고 적을 물리치겠다고 큰소리를 쳤던 것이다. 결국 도원수 권율에게 곤장까지 맞고 할 수 없이 출전했다가 원균은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고 조선 수군을 전멸에 빠뜨렸던 것이다.

이는 전략과 전술에 무지무능한 장수가 군대를 이끌면 얼마나 위험한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역사의 교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사에는 수많은 명장이 등장하지만 이순신 장군처럼 성인 같은 분은 없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조가 망국의 위기를 당했을 때 이순신이 없었다면 나라는 바로 그때 거덜나고 말았을 것이다. 

- 황원갑, 소설가, 역사연구가

- 2011.04.28 국방일보

 

 

 

 

 

 


 

[충무공 이순신기념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혼이 담긴 유물 40여 점이 한 자리에 모였다.
왜적과의 결전을 앞두고 마음을 다잡으며 썼다는 난중일기.
그리고 거북선에서 호령하며 왜적을 겨뤘던 긴 칼.
거북선은 어떻게 만들었고 한산대첩의 '학익진'은 어떤 작전이었는지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하기 위해 내린 '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

새로 보물로 지정된 '기복수직교서'는
선조는 한 때 이순신 장군을 오해하고 통제사직을 박탈했던 걸 후회하면서
선조가 이순신 장군에게, 어머니 상중이지만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한다고 보낸 문서이다.

"그대의 직함을 갈고 백의종군하도록 한 것은 과인의 지혜가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다"고
말한다. 충무공을 옥에 가두고 백의종군하게 하여 우리 수군의 패전을 초래케 하였다하는 사과와 후회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런 가운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던 해 사돈에게 보낸 걸로 추정되는 편지가 고문서 수집가에게서 발견되었는데, 진품으로 밝혀질 경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생전에 쓴 마지막 편지로 기록되게 된다.


백의종군하던 충무공 이순신은 다시 통제사가 돼 전쟁터로 달려간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이끈다.

 

기복수직교서를 비롯해 충무공 이순신과 관련된 고문서 13점이 보물 1564호에 추가됐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13점 가운데 9점은 이 충무공 종가에서 보관하던 중 2009년 문화재청에 새로 기탁한 유물이다. 
새로 보물로 지정된 고문서는 '기복수직교서' 외에도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고 받은 무과홍패(武科紅牌), 아내 방씨에게 '정경부인(貞敬夫人)'을 내리는 교지,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리는 교지를 비롯해 교서(敎書)ㆍ유서(諭書)ㆍ유지(有旨)ㆍ별급문기(別給文記) 등이다.


충남 아산의 현충사에 지난 4년 동안 총사업비 135억 원을 들여 만든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은

2011년 4월28일 충무공탄신일 466주년에 맞춰 기념관을 개관한다.

 

 

 

 


 

 

'기복수직교서(起復受職敎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종가에서 소장했던 유물 9점과 현충사 내 소장하던 유물 4점 등

이 충무공의 고문서 13점이 27일 국가 보물로 지정됐다. 

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 (보물 제 1564호)

선조가 1597년 7월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우리 수군이 궤멸했다는 패보를 접한 조정에서

이순신을 그해 7월23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영하는 교서 원본.

선조가 임진왜란 중 어머님 상중인 그를 다시 통제사에 임명하며 내린 교서를 통해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물러나게 해 결국 수군패전을 초래한 것을 후회한다는

'상하언재(尙何言哉·무슨할말이 있으리오)' 구절이 2번씩 표현되는 등 내용을 담고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6년째 되던 1597년, 충무공 이순신은 옥에 갇혔다가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풀려났지만, 곧 어머니를 여의는 슬픔을 겪게 된다. 그 해 7월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대패하자, 선조 임금은 상중인 이충무공에게 수군통제사를 맡아줄 것을 요청하는 교서를 내린다.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송대성과장은 "이는 유교를 받드는 당시 조선에서 부모상을 당하면 2년간 관직을 맡지 못하게 하는 관례를 깬 것으로 당시 상황의 얼마나 위급했는가를 말해준다."고 설명했다. 


 

이 교서에는 이순신을 통제사직에서 물러나게 해 수군패전을 초래케 한데 대한 선조임금의 후회와 사과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을 하도록 하였던 것은 역시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그리하여 오늘 이같이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라 무슨 할말이 있으리요. 무슨 할말이 있으리요."(기복수직교서 중)

 

충무공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뒤로 한채 침몰 직전의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냈다. 이충무공의 공적은 1604년 선조임금이 이순신사후 그를 선무1등공신에 봉하면서 내린 선무공신교소에 잘 드러나 있다.

 

"적의 무리들이 달아난 것은 진실로 장군의 전함에 떨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큰 배가 물길을 잃은 것은, 참으로 조정의 계책이 잘못된 탓이라. 나는 곧은 충신을 저버린 것이 부끄러워 급히 장수의 권한을 돌려주고, 경(충무공)은 충성으로 분발하기에 더욱 힘써서 곧장 회령포로 가서 불에 타고 남은 배를 수습하고 피혜한 병졸들을 거두어 모아서 13개의 다락배로 비로소 앞바다에 진을 쳤는데, 백만 장졸들의 떠도는 넋이 물결 위에 피로 물들였다."(선무공신교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