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상을 둘러싼 고려 말의 한 풍경
도현철(중세1분과)
고려후기의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수용하고,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실현하려 하였지만, 그 목표와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다. 특히 위화도 회군이 단행되고, 이색, 정몽주, 이성계, 조준 등이 중앙 정계의 핵심 인물로 등장하면서 개혁의 목표와 방법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창왕 원년(1388) 10월에 정도전 계열의 간관들이 이숭인을 비판하자, 권근이 이숭인을 변호하고, 이에 간관들이 권근을 비판하며 다시 이숭인을 비판하는 과정은 개혁 정치에 입장을 달리하는 반대파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의 성격이 강하였는데, 한편으로는 성리학의 3년상제의 시행을 둘러싼 중요한 사상사적 함의를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위화도 회군 이후 정도전 등은 개혁 상소를 올리면서 정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지만, 명에 감국(監國)과 창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하는 이색과 이숭인 등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었다. 이에 정도전 계열의 간관들은 자신들의 정치 활동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비판하게 되었는데, 이숭인이 그 대상이었다. 이숭인이 명에서 돌아오자, 정도전 계열의 구성우, 오사충, 남재 등은 이숭인을 탄핵하였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모친상 중에도 과거 시험의 시관(試官)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숭인의 성품이 간사하고 탐욕스러우며, 언행이 간교하고 사려가 깊지 않아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닌데, 사소한 문필의 재간을 가지고 헛된 명성을 얻어 오랫동안 국가 요직에 있었다는 것, 이인임 정권 때는 그의 심복이 되어 권세를 부리고 불법을 자행하기도 했다는 것, 게다가 부모상을 당하고 3년이 차지 않으면 시관이 될 수 없는 것이 국가의 제도인데 모친상(우왕 7년 1월)을 당했는데도 시관이 되었고(우왕 8년 4월), 어머니가 죽은 지 겨우 100일이 지나자마자 고기를 먹고 태연자약하여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저버렸으니 이는 불효라는 것 등을 들어 비판하였다.
이에 대하여 권근은 이숭인을 구명하는 상소를 올려 5가지 근거를 제시하여 두둔하였다. 그는 특히 이숭인이 시관이 된 사실을 변호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숭인이 모친상 중에 시관이 된 것은 살아계신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늙고 병든 아버지가 자신의 생전에 아들이 시관이 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국가에서도 이숭인의 재능을 높이 사고 아버지의 심정을 받아들여 기복(起復:상중에 벼슬에 나아가는 일)을 통하여 시관의 일을 맡게 하였다. 이숭인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생각을 살피지 않고 허물이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논점이 되는 것은 이숭인이 모친상 중임에도 과거 시험의 시관이 된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이다. 이숭인은 간관직인 정 3품 산기상시로 재직하던 중 모친상을 당하고 1년 3개월 만에 정 3품 무반직인 상호군으로 바꾸어 시관이 되었다. 이때 이숭인은 고려의 제도인 기복의 절차를 밟았다.
『개원례』(당나라 현종玄宗 20년(732) 9월에 제정 · 시행한 관복제도冠服制度)나 『주자가례』에서 아버지든 어머니든 어느 한쪽이 돌아가시면 3년상을 지내도록 한 것과 달리, 『의례(儀禮)』 상복 편에는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면 1년상을 지내도록 하였는데, 『의례』에 근거하여 어머니가 돌아간 지 1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참작되었다.
이는 권근이 이숭인을 변호하는 글에서 확인된다.
고려시대에는 관리가 부모상을 당하면 3년상을 입도록 되어 있지만, 삼년약상(三年略喪)이 행해져 3년상을 지내되 100일만 집에서 복을 입도록 하였다. 또한 기복제도가 있어 국가가 위급한 상황이라면 부득이 하게 출사할 수 있게 하였는데, 관리의 기복은 점차 무분별하게 확대되고 있었다. 고려후기에 성리학이 수용되고 주자가례가 보급되면서 삼년상의 시행이 강조되었다.
공민왕 6년에 이색이 3년상제의 시행을 건의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3년상제는 국가의 제도로 지향하였지만, 3년상을 행한 사람은 만명에 한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듯이,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성리학적 상제인 3년상을 철저하게 준수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을 수는 있지만, 기복을 거쳐 시관이 된 이숭인의 행동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이숭인이 시관이 된 근본적인 동기이다. 부모를 모두 존중하지만 어머니상은 이미 1년을 마쳤고, 살아있는 아버지의 뜻을 존중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도전 계열이든, 이숭인이든 충(忠)을 효(孝) 관념의 연장으로 설명하고 사적인 부자의 인륜을 우선시하는 사고를 읽을 수 있다. 모친상을 당한 가운데 시관으로서 과거 시험을 집행한 이숭인에 대하여 ‘불효’라고 규정한 간관의 비판이나 아버지의 희망에 따른 것이었다는 권근의 변호 어느 쪽도, 기복에 관한 한 효 관념을 논거로 제시하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기복이 국가권력의 공적 명령으로 부자 사이의 혈연적 유대보다 우선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층적으로는 혈연적 유대감의 표현인 효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해석되고 있다.
논쟁은 효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먼저 생각할 것인지 살아있는 아버지의 뜻을 존중할 것인지,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우선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것으로, 어느 경우든 부모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이제 효는 특정한 개인이나 가족에 적용되는 사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효는 충의 관념과 함께 국가 구성원의 기본적 관계의식으로서 사회규범의 토대가 되는 공적 성격을 갖게 된다. 주자가례의 수용과 실행이 점차 확산되므로, 예의 원리에 부합하는 처신이 공적 정치과정으로서 의미를 획득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숭인에 대한 탄핵 상소는 당시의 정치적 역관계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우선 상소를 올린 시기는 창왕 원년으로, 이숭인이 시관이 된 우왕 8년보다 6년이 지나서였다. 또한 기복제는 국가의 위급한 시기에 급히 인재를 쓰기 위한 것인데, 이숭인이 기복의 대상이 될 만큼 국가에 필요한 인재가 아니라는 비판의 근거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었다.
이에 반해 권근은 상소에서 이숭인이 명과의 외교에서 표문과 전문을 모두 지었다는 점에서 공민왕의 시호를 얻거나 우왕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한 것, 금 · 은, 말, 포목 등 세공(歲貢)을 면제받은 것 등이 모두 이숭인의 문장에 힘입은 것이며, 명 황제가 이숭인을 높이 평가하고 고려에 인재가 있음을 인정한 것도 이숭인의 공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상소 중에 “지금 관직에 있는 자로 부모가 모두 죽고 난 후 3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왕의 명을 받았다고 하고, 과거에 합격하여 중요한 관직에 올라 사람에게 형벌을 주고 죽이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부모상 중에 기복한 대사헌 조준을 가리키는 것이라 한다. 이숭인의 경우 아버지를 위하여 어머니를 망각한 것이 불효라면, 자기를 위하여 부모를 망각한 것 역시 불효라고 역공하였던 것이다.
결국 간관이 이숭인을 비판한 것이나 권근이 이숭인을 옹호한 논의는 효 자체의 문제보다는 정국 상황에서 정치 주도권을 둘러싼 논쟁의 성격이 강했는데, 당시 권력의 역학 관계에 따라 이숭인은 경산부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이 논쟁은 당시 성리학이 국가의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불거진 논란의 하나이다. 유교 윤리의 핵심 명제인 효에 대한 성리학적 이해와, 그것의 실행을 뒷받침하는 『주자가례』와 3년상제의 적용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논의는 성리학적 예제를 실행하려는 권근, 허조의 예론으로 발전하였고, 뒷날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이루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 한국역사연구회, 2010-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