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사형 - 한말 외국인의 눈에 비친 처형 현장
이를 다시 상기시키면 오형은 『대명률(大明律)』에 명시된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을 의미한다. 굳이 비유하자면 태 · 장형은 신체형, 도 · 유형은 자유형, 사형은 생명형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당연히 태형이 가장 가볍고 사형이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가운데 조선의 사형에 관한 것이며 이를 한말 외국인들이 남긴 생생한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 우리의 관념으로는 어떻게 죽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죄의 경중에 따라 같은 사형이라도 교형, 참형, 능지처사형으로 나누어 집행하였다. 반면 참수, 즉 목을 베어버리는 참형은 이보다는 훨씬 무거운 것이었고, 능지처참으로 잘 알려진 능지처사형은 목, 팔, 다리 등 처형된 신체가 완전히 손상된다는 점에서 가장 무거운 사형으로 간주하였다. 중국 청나라의 광주(廣州) 순무(巡撫)가 형부(刑部)의 명을 받아서 사형수 몇 명의 사형을 집행하였는데, 그 중에 부녀자 두 명이 남편을 살해한 죄로 처형되게 되었다. 한 사람은 말라 구부정했고, 다른 한 사람은 뚱뚱하여 그녀를 들어올린 밧줄이 팽팽하였다. 사형을 집행할 때 두 여인은 장관에게 욕을 해대면서 주의 사람들을 노려보았다고 한다. 출전 : 『점석재화보』 1887년 8월 14일.
여기서 궁금한 사실 하나. 당시 조선에서 얼마나 많은 범죄자를 사형에 처했을까? 답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형률에 규정한 전체 범죄 행위 가운데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 행위의 비중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조선시대에 법률에 명시된 범죄 유형 가운데 사형에 처해지는 범죄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는 점은 전근대 엄벌주의적 형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점이 조선에서만 특수했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전근대 시기 동서양의 여타 나라에서도 사형에 처해지는 범죄의 비중이 대개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다. 『대명률』에 규정하고 있는 능지처사에 처할 범죄 행위 유형 15가지를 기록하고 있다.
즉 역모를 꾀한 모반 · 역죄인, 가족 3인 이상을 죽이거나 신체를 절단하는 등의 흉악한 살인범, 그리고 가족 · 주인 등을 폐륜 살해한 강상범 등이 능지처사형의 대상이 되었다. 출처 : 『금산현보갑장정(金山縣保甲章程)』
이전 글에서 대략 언급하였지만 능지처사형이 조선에서 어떤 방식으로 집행되었는가에 대해서도 다시 짚고 넘어가고 싶다. 신체의 여러 부위를 칼로 잘라 죽게 하는 능지처참이 중국에서도 항상 일정한 방식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칼질의 횟수에 따라 8도, 24도, 36도, 72도, 120도 등으로 일정하지 않았다. 한편 칼질의 횟수가 8도인 경우, 즉 8회에 걸쳐 살을 잘라내는 경우는 먼저 1·2도로 양 눈꺼풀, 3·4도로 양 어깨, 5·6도로 양 젖가슴, 7도로 심장을 관통하고, 8도로 목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의 경우는 능지처참의 방식이 중국과는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1395년(태조 3)에 간행된 대명률의 해설서에 해당하는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에는 대명률 원문의 ‘능지처사(凌遲處死)’는 모두 ‘거열처사(車裂處死)’로 번역해놓았다. ‘거열’은 ‘환형(轘刑)’, ‘환렬(轘裂)’이라고도 하는데, 수레에 죄인의 몸을 매달아 수레를 끌어서 찢어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일가족 3인 이상을 살해한 살인범 처벌에 대한 『대명률』의 조문과 해설문. 원문에서는 ‘능지처사(凌遲處死)’로 되어있는데, 해설문에서는 ‘거열처사(車裂處死)’로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머리는 3일간 저자에 효수(梟首)하였다. 당시 고문으로 이미 숨진 자들의 경우도 시신에게까지 능지형을 시행하였는데, 박팽년(朴彭年) · 유성원(柳誠源) 등이 바로 죽어서도 시신이 거열당하는 참화를 겪은 인물들이었다.
그렇다면 거열형은 어디에서 유래하였을까? 즉 공민왕 때에 반역 죄인인 홍륜(洪倫) 등에게 환형(轘刑)을 가했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사에서 보듯이 고려 말에 거열이 집행된 적이 있다. 또한 이것이 중국과 한국의 법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명확치 않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거열형의 역사가 고려시대까지 소급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림 5> 프랑스 국왕살해 미수범 다미엥 처형 장면 1757년 있었던 루이 15세를 살해하려다 실패한 다미엥이란 인물 처형 장면. 조선에서의 ‘거열’ 방식과 유사하다. 출처 : 『감시와 처벌』 흥미로운 사실은 거열형이 유럽에서도 시행되었던 처형 형태의 하나였다는 점이다. 다른 사례를 들 필요도 없이 저 유명한 푸코의 『감시와 처벌』 앞부분에 거열이 등장한다. 책에서는 1757년 프랑스 루이 15세를 살해하려다 실패한 다미엥이란 인물에게 네 마리의 말에 몸을 묶어 사지를 절단하여 처형하라는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거열형의 전통이 중국이나 조선에서만 있었던 처형 방식이 아니라, 과거 동서양 여러 나라에서 함께 공유한 잔혹한 사형 집행 방식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사형은 대부분 공개적으로 집행되었다. 그 중 교형이나 참형이 주로 도성 밖의 당고개[唐古介, 堂峴]에서 행해진 반면 능지처참, 즉 거열은 도성 안 군기시(軍器寺), 저자 거리, 무교(武橋) 등에서 행해졌다. 특히 능지처참이 가장 많이 행해진 장소는 군기시 앞길이었지만, 꼭 정해진 것은 아니어서 혜민국(惠民局) 거리나 도성 밖의 서소문(西小門), 동작진(銅雀津) 근처, 지방 감영 등에서도 행해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묵재일기(黙齋日記)』에서 보듯이 조선시대에 지방을 순회하며 처형된 시신을 전시하는 기간이 생각보다 길었던 것 같다. 16세기 묵재 이문건의 생활일기. 당시 양반 생활상과 관련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주요 내용을 보면 명종 즉위년(1545) 9월 11일 조카 이휘가 어두워질 무렵에 군기감 앞길에서 능지처참에 처해졌으며, 3일 후인 9월 14일 집안에서 머리와 팔다리를 뺀 나머지 이휘의 시신을 수습하여 9월 16일에 가매장을 하였다가, 이듬해 4월경 팔도에 전시되었던 나머지 시신을 수습하여 다시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또한 일기의 1545년 11월 26일자 기사에 따르면 당시 이문건은 성주 유배지에 있다가 여러 군현에 순회 전시되던 이휘의 시신이 성주에 도착하여 인동으로 옮겨진다는 소식을 듣고 식사를 하지 못할 정도로 안타가워 하였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가족들은 처형된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으니, 한 마디로 당시 처형된 죄수의 몸은 냉엄한 법의 현존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상징물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정확히는 1894년 12월 27일에 능지처참형은 참형과 함께 금지되었다. 대신 이후부터는 민간인에게는 교수형(絞首刑), 군사범죄에서는 총살형(銃殺刑)으로 사형 집행 방식이 통일되었다. 이는 이웃 중국이 1905년에 능지처사형을 폐지한 것과 비교할 때 10여 년 앞선 것이었다. 한말 천주교인들에 대한 집단 처형지로 유명한 양화대교 근처 절두산 순교박물관. 사진은 박물관 경내에 있는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먼저 프랑스의 선교사 샤를르 달레(Ch. Dallet) 신부가 1874년 집필한 『한국천주교회사』에 조선의 능지처사형에 대한 흥미로운 언급이 있다. 달레는 조선에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책은 19세기 프랑스 성직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직접 보고 들은 생생한 경험들을 달레가 모아서 편찬한 책이다. 달레는 이 책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 죄인 참수(斬首), 능지처참 등 조선의 공개 사형 집행법에 대해 소개하면서, 모반죄인과 대역죄인의 능지처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러면 머리와 몸뚱이와 합하여 여섯 토막이 된다. 옛날에는 팔다리를 잘라내는 데에 도끼나 칼을 쓰지 않고, 팔다리를 소 네 마리에 잡아매고 소들이 사방으로 달려 가도록 채찍질을 하여 목 잘린 사람의 사지를 찢었었다.
글의 내용을 종합하면 조선에서 능지처참은 참수를 먼저 한 뒤 사지를 절단하였다는 것, 사지 절단의 방법은 과거에는 수레를 이용했으나 최근에는 도끼나 칼로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달레의 언급의 사실이라면 조선에서 능지처참할 때 참수하여 죄수를 죽인 후에 팔다리를 절단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단 번에 목을 베어 죄수의 숨을 끊는다는 점에서 능지처참형이 우리의 예상과 달리 죄수를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죽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의 묘사에 따르면 사형수들은 웃통이 벗겨진 채 소달구지의 나무 십자가에 결박된 채 사형장으로 이송되었고, 이송 도중 주막에서 푸짐하게 술과 음식을 먹은 망나니가 술에 취해 칼을 잘못 휘둘러 사형수의 목이 아닌 어깨를 잘라 버리는 실수를 범했으며, 죄인의 시체가 개와 표범의 먹이로 방치되는 사이 망나니들은 일을 마친 후 주막에서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고 흥청거렸다고 한다.
1891년 목격한 처형 장면을 랜도어가 직접 그린 삽화. 그가 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실려 있다.
요컨대 랜도어는 잔혹한 죄수 처형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는 모습에 의아해하며 조선인에 대한 외국인으로서의 편견을 보여주었다. 5. 김옥균, ‘육시’에 처해지다
지금부터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이 해 있었던 동학교도에 대한 효시(梟示), 김옥균(金玉均)의 시신에 대한 능지처참 기록인데, 특히 김옥균의 시신에 대한 능지처참, 즉 ‘육시(戮屍)는 조선에서 공식적으로는 거의 마지막으로 집행된 것이다.
한말 우리나라를 방문하였다가 1897년 여행기를 남긴 영국의 지리학자. 출처 :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집문당, 1999) 3쪽.
그녀는 1894년 12월에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전라도에서 붙잡혀 처형된 동학군 지도자 김개남(金介男) 등의 목 잘린 머리를 목격하였다.
비숍에 따르면 그들의 머리는 세 발 장대에 묶여 허공에 매달려 있었는데, 장대가 쓰러져 먼지투성이의 길 위에 버려진 머리를 개들이 뜯어먹고 그 옆에서 어린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불과 며칠 후에 능지형, 참형의 폐지가 『관보(官報)』에 공표되었고, 그녀는 이와 같은 개혁이 조선인 스스로가 아닌 일본인 고문에 의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다음,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을 능지처참한 상황에 대해서는 외국인들의 더 생생한 기록이 확인된다. 주지하듯이 김옥균의 경우 갑신정변 실패 후에 중국 상해에서 1894년 3월에 홍종우의 손에 암살되었고 그 시신은 조선으로 운구되어 4월에 처참하게 능지처참 당했다. 김옥균 시신에 대한 능지처참, 즉 육시(戮屍)는 양화진 강변 백사장에서 행해졌다고 하는데, 일본인들이 묘사한 처형 현장은 다음과 같다.
그 밖에 손과 발 하나씩이 보이지 않았는데, 풍설(風說)과 같이 본보기를 삼기 위해 그것들을 전국 8도에 회람시킨 것으로 추측됩니다. 처형 당시에는 장위사(壯衛使) 이종건(李鍾健)과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 모(某)가 입회하고 처형이 끝나자 곧 서울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김옥균의 시신을 목 베어 한강변 양화진에 효수한 사진이다. 출처 :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조재곤 저, 푸른역사, 2005) 140쪽 1894년 4월 24일자 일본 『지지신보(時事新報)』에 실린 김옥균 처형 그림. 출처 :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조재곤 저, 푸른역사, 2005) 103쪽
이처럼 육시된 김옥균의 머리는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 적힌 흰 천과 함께 백사장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당시 김옥균 시신에 대한 효수를 중단할 것을 서울 주재 각국 외교관들이 조선 정부에 권유하였지만, 또 다른 외국인에 따르면 김옥균의 시신은 16일 동안이나 효수된 채 방치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를 ‘구역질나는 과정’이라고 극언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에서 시행된 사형 중 참수형, 능지처사형을 가학적이고 잔인한 육형(肉刑)으로만 단순하게 이해하기 보다는 당시 법률 및 형벌체계 내에서 정당하게 자리매김하는 노력도 반드시 필요하다. |
- 한국역사연구회, 2011-0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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