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유언비어와 익명서
심재우(중세사2분과)
1. 조선시대 여론과 민심
최근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인해 우리는 가히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시간으로 각종 뉴스, 사건, 사고가 흐르고 누구든지 접속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인터넷은 거대한 정보의 바다가 되고 있다. 사이버공간은 여러 가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신문, 방송 등 기존 매체보다도 자유롭고 개방적이어서 다양한 사람들의 여론을 전달할 수 있는 대안매체로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림 1> 정보화와 인터넷
새로운 매체로서의 사이버공간은 종종 ‘인터넷 마녀사냥’과 같은 부작용도 낳고 있다.
그럼 신분적 차별이 당연시되던 전통사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조선시대에 여론을 형성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일들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일반 백성들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은 어느 정도 가능했을까?
잘 알려진 대로 조선왕조를 개창한 신진사대부들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표방하면서,
민본정치의 실천을 위해 민의(民意) 수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꼭 그렇지는 않았다. 양반, 관리들의 여론은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통해 수렴되고는 있었지만, 일반 백성들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이들의 경우 언어 사용이 제약되어 있었고, 정치 참여층이 아닌 단순한 통치대상에 불과한 존재라는 한계 때문에 자신들의 집단적 의사표현을 관철시키기엔 한계가 컸다.
더욱이 정치가들이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경우도 흔치 않았다.
이처럼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과 여건이 제약되어 있긴 하였지만, 그런 와중에도 백성들은 권리의식을 키워나가며 합법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곤 하였다.
이는 조선왕조에서 백성들이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수 있도록 마련한 소원제도(訴冤制度)를 통해서 가능하였다. 신문고(申聞鼓), 상언(上言), 격쟁(擊錚)이 대표적인 예이다.
신문고는 태종이 중국의 제도를 본떠서 백성들이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의금부 당직청에 설치한 것으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있는 사람들은 신문고를 쳐서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게 하였다.
그렇지만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일반백성이 아니라 관료, 양반이었으며, 지역적으로는 서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실효성이 크지 못한 신문고에 비해 상언, 격쟁은 백성들의 청원, 호소에 보다 용이한 장치였다.
상언은 국왕이 행차할 때 자신의 사정을 글로 써서 아뢰는 것이고,
격쟁은 대궐 근처나 국왕 행차시 어가 앞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18세기 후반 정조는 백성들의 억울함이 자신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자 상언과 격쟁의 제한을 완화시켜 상언, 격쟁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그림 2> 화성원행도병
1795년 정조의 화성 능행 행차의 일 부분. 정조의 능행길에는 백성들의 상언, 격쟁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풍속화』(국립중앙박물관) 23쪽 수록.
이처럼 조선시대 소원제도의 발달 등으로 백성들이 자신들의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점차 많아지긴 하였다. 그렇지만 지금과 달리 합법적으로 민심을 표출하는 데는 적지 않은 한계가 있었다.
2. 유언비어, 그리고 예언서의 성행
조선시대에 민심을 제대로 표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법, 비법적 방식으로 여론이 형성되기도 하였고
왜곡된 형태로 퍼져나가기도 하였다. 유언비어, 소문, 풍문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유언비어는 와언(訛言), 요언(妖言), 부언(浮言)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관리들이 그것이 민간에 퍼져나가 부정적 영향을 미칠까 우려하여 불온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언비어가 단순한 헛소문으로 그치지 않고, 당시 흉흉한 세태를 꼬집거나 정부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대변하고 심지어 변란과 연계된 경우도 있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유언비어가 일어나는 것은 근거없이 생기기도 하고 혹은 기미가 있어서 생기기도 하는 것이니,
수령은 이를 대응할 때 조용히 진압하기도 하고 묵묵히 관찰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정약용은 유언비어를 단순한 헛소문과 변란과 연계된 소문 등 둘로 나누어 고을 수령들이 각각에 대해 다르게 대처할 것을 조언하고 있다.
먼저 단순한 헛소문은 들어도 못들은 척 조용히 잠재울 것을 권유한다.
당시 부세가 무겁고 관리가 탐학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없어 모두가 난리나기를 바라고 있어서 유언비어가 난무하기 때문에 이들을 법률에 따라 죽인다면 살아남을 백성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림 3> 들통난 사기꾼 점쟁이
거짓말, 유언비어, 사기는 중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청나라 말기 호북(湖北) 한진(漢鎭)의 한 늙은 노파가 자신을 영험한 점쟁이로 소문내어 돈을 뜯었는데, 어떤 부인에게 남편이 바람났다면서 술법을 펼친 돈을 요구하다가 남편이 돌아와 가짜임이 밝혀졌다는 내용. 그림에 앉아있는 노파가 사기꾼 점쟁이이다. 『점석재화보』(양력 1895년 6월 17일) 수록.
다음으로 영조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 순조 때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날 때 유언비어가 크게 일어났음을 예로 들어 변란과 연계된 소문은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징조가 이상한 경우 그냥 내버려 두지 말고 친척, 막료들을 동원하여 소문의 뿌리를 찾고 그 소굴을 엿보아 잘 조사해야 한다고 하였다.
실제 조선시대에 여러 유언비어가 돌곤 했다.
예컨대, 태종 4년 3월 29일에는 길을 가다가 재상(宰相)의 행차에 범마(犯馬)하는 실수를 저지를 경우 바로 죽인다는 말이 충청도, 전라도의 백성들 사이에 돌았으며, 현종 12년 10월 17일에는 홍제동의 석미륵(石彌勒)이 저절로 움직였다는 소문이 서울 백성들 사이에 퍼지기도 하였다.
질병에 대한 공포도 때로 엉뚱한 소문을 만들어 냈다.
선조 10년 1월 1일에는 팔도에 역병이 크게 일어나자, 역신(疫神)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오곡의 잡곡밥을 먹이거나 소를 잡아서 소의 피를 문에 뿌려야 물리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하였다.
와언, 유언비어에 대해 정부에서는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임진왜란 중인 선조 27년 8월 22일에 해주성 안에서 유언비어가 성행하여 인심이 이반되자 책임자 문책 차원에서 목사(牧使)와 병사(兵使)를 교체한 일이 있었다.
또한 유언비어를 유포한 자는 엄한 처벌을 면치 못하였으니, 인조 2년 3월 19일에는 자신이 접신(接神)하였다고 주장하여 도성의 여염집을 돌아다니며 이상한 말을 떠들어대던 자에 대해 요사한 말로 여러 사람을 현혹한 자로 목을 베어 효시(梟示)한 것이 그 예이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지배층의 수탈과 생활고에 고통 받던 백성들 사이에 예언서(豫言書)도 크게 성행했는데, 그 중 『정감록(鄭鑑錄)』은 민간에 널리 유포된 대표적인 책이다.
사실 시대상황이 어려울수록, 그리고 말세에는 예언서가 떠돌기 마련이다.
신라 말기, 고려 말기에 도선(道詵)과 무학(無學)이 예언하였다는 비기(秘記)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것이 그 보기인데, 조선후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림 4> 정감록 조선시대 유행한 대표적 예언서. 규장각 소장.
『정감록』은 반왕조적이고 현실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금서(禁書)이기 때문에 민간에 은밀하게 전수되어 왔다. 이 책에는 이씨 왕조의 멸망, 정씨 왕조의 개창, 앞으로 닥쳐 올 병란(兵亂) 등을 에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민간에 유행하던 『정감록』등 예언서에는 조선왕조 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고, 이런 이야기들은 민심을 충동하고 때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숙종 14년 8월에는 승려 여환(呂還)이란 자가 양주 지방을 근거로 미륵신앙을 내세워 지사, 무당 등과 더불어 평민 20여 명을 포섭하여 서울 공략을 꿈꾸다 실패한 사건이 있었으며, 홍경래의 난 때에는 『정감록』의 ‘정진인(鄭眞人)’이 출현하였다는 말을 유포하여 백성들이 봉기에 참여할 것을 유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후기에 백성들의 삶이 팍팍해지면서 유언비어, 예언서가 민간에 퍼지곤 했다.
3. 벽서, 괘서, 익명서
앞서 언급하였듯이 민의상달(民意上達) 추구라는 유교정치의 이상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백성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의사를 개진하는 것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때론 은밀한 방법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익명서(匿名書)이다.
익명서는 글로써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보다는 선비, 지식인, 관리 등 지배신분층이 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백성들 중에 언문(諺文)으로 벽서를 붙이는 경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 작성된 이들 익명서에는 백성들의 현실에 대한 불만사항, 혹은 관리나 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을 기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 익명서는 무엇인가? 익명서는 글자 그대로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쓴 글을 말한다.
대개 누구를 비방하거나 정부 비판 등 드러내 놓고 할 수 없는 말을 적는 경우가 많은데, 익명으로 쓴 벽서(壁書), 괘서(掛書), 투서(投書) 등이 모두 익명서에 해당한다.
1980년대 우리나라 대학가에서는 민주화 투쟁을 호소하고 정권을 비판하는 대자보(大字報)가 많이 나붙었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붙인 대자보는 자신의 주장을 큰 글씨로 써서 알렸다는 점에서 모두 벽서, 익명서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런데 원래 대자보의 기원은 중국 문화대혁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6년 기존 질서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베이징대학 식당 벽에 나붙은 것을 시작으로 이후 대자보가 유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림 5> 김예슬의 대자보
2010년 3월 10일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학생 김예슬씨가 학교를 자퇴하며 쓴 대자보의 일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란 제목으로 쓴 이 대자보는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아무튼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우리나라 익명서의 전통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익명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이며, 『고려사』에도 익명서에 관한 내용이 여럿 보인다. 그런데 익명서 관련 기록은 조선시대에 더욱 풍부하게 전해진다.
익명서는 글을 작성한 사람이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거나 민심을 동원할 필요가 있을 때 사용한다. 그런데 익명이라는 매력 때문에 남을 비방하거나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아서 정부에서는 이를 법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기본 형법으로 사용했던 중국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 규정에 따르면,
이름을 숨기고 문서를 투서할 경우 교형(絞刑)에 처하며 이를 발견할 경우 불사르고 불문에 부치는 것이 원칙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도 『대명률』의 원칙이 재천명되었다.
즉, 국사(國事)에 관련된 중대한 익명서라 할지라도 부자(父子) 사이에 말을 전해서는 안 되며,
익명서의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거나 오랫동안 불사르지 않는 자는 모두 율문에 의거하여 처벌하도록 규정하였다.
이처럼 국가 안위와 관련한 익명서라 할지라도 불사르고 불문에 붙이는 것이 법전의 내용이었지만,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처리되지만은 않았다.
앞서 다산 정약용이 유언비어의 유형에 따라 다르게 대처할 것을 수령들에게 권고하였던 것처럼, 익명서의 경우도 사안에 따라 달리 처리할 것을 강조하였다.
즉, 다산은 개인적인 원한, 모함에 해당하는 익명서는 법전 규정대로 불사르고 불문에 부치되, 정부를 비난하거나 국가 안위, 역모 등에 관련된 익명서는 상급 관청에 보고하여 진상을 파악하라고 주문하였다.
이같은 다산의 지적은 법전의 규정과 배치되는 주장인데, 당시 조선 정부에서도 익명서 사건이 터질 경우 꼭 법규대로만 처리한 것이 아니었고 사안에 따라 각각 다르게 대처하고 처벌하였다.
<그림 6> 범죄자 지명수배 방문(榜文)
벽서가 익명의 정부를 비방하는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진은 정부에서 백성들에게 범죄자 체포를 협조하는 방문인데, 조선시대 당대의 것은 아니다.
한국민속촌(2010년 1월 24일 촬영)
<그림 7> 방문
문경새재 KBS 드라마세트장에 붙은 방문(榜文).
춘향전의 이몽룡 시(詩) 일부가 보이나 관청명 등이 잘못되어 있다. 2010년 8월 2일 촬영
조선에서 실제 발생한 익명서는 내용과 성격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개인들간의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무고하는 익명서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사건은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상당히 많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별달리 주목을 끌지 못해 기록으로 전하는 것이 많지는 않다. 태종 3년 11월 27일에 송개석(宋介石)이란 자가 자신이 사랑한 기생을 대호군(大護軍) 송거신(宋居信)에게 빼앗기자 그 분풀이를 하기 위해 다른 사람 집에 송거신을 모함하는 익명서를 던진 것이 확인된다.
둘째, 관청이나 관리에 대한 원한,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다.
특히 자신의 고을 수령에 대해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투서한 사례가 적지 않았는데, 문종 1년 5월 29일에 영산(靈山)의 유생 민효관(閔孝寬)이 수령의 과실을 조목조목 적어서 대사헌 정창손(鄭昌孫) 집에 투서한 사건, 성종 20년 3월 3일 밤에 누군가가 대궐문에 와서 신천(信川) 수령의 불법을 고소하는 익명서를 던진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그림 8> 의금부 관원들의 계를 하는 모습
양반 관료들을 심문, 조사하던 의금부. 사진의 상단이 지붕이 위에서 아래로 튀어나온 부분이 죄인을 심문하던 호두각(虎頭閣)이다. 연안이씨 식산종택에 소장된 『금오시첩(金吾詩帖)』에 수록된 그림이다.
『고문서에 담긴 옛사람들의 생활과 문서』(장서각, 2003) 50쪽.
셋째, 지배층 내부의 정쟁과 관련하여 반대세력을 비난하는 익명서가 있다.
이 유형에 속하는 익명서는 사화와 당쟁의 와중에 종종 발생하였으며, 특히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온 경우가 많았다. 명종 때의 양재역 벽서(壁書) 사건과 영조 때의 나주 괘서(掛書)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넷째, 왕조체제와 집권세력에 불만을 품고 많은 사람들에게 변란을 선동하려는 목적에서 일으킨 사건이다. 순조 1년(1801) 경상도 하동, 의령, 창원 등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한 이 사건은 지식인부터 무지렁이까지 모두를 포용하면서 민란을 선동하는 내용의 괘서(掛書)가 나붙은 사건이었다.
그럼 익명서는 주로 어디에 부착하였을까?
대개 익명서는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는 장소, 즉 인적이 많은 장시나 마을 입구의 장승, 정부 관리들의 집이나 관아의 대문 등에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심지어 대궐문에 부착하거나 궁궐 안에서 발견되는 경우도 있었다.
중종 14년 2월 11일에는 경복궁 건춘문(建春門)에 누군가가 익명서가 적힌 화살을 쏜 일이 있었으며,
이보다 앞선 성종 25년 1월 5일에는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의 어좌(御座)에서 강화(江華) 고을 수령의 범법 사실을 익명으로 기재한 괘서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림 9> 도적이 남에게 화를 전가시키다
청말 소주(蘇州)에서 하씨(夏氏) 성을 가진 사람의 보석을 도둑질한 도둑이 대담하게도 이튿날 다시 나타나 담벼락에 종이 한 장을 남겼다. 내용은 훔친 물건은 200원(元) 정도로 밥값 정도에 불과하니, 노잣돈을 빨리 마련해 지정된 곳으로 보내라는 재미있는 내용이다. 그림 좌측 상단에 도적이 보이며, 도둑이 쓴 글은 일종의 대자보인 셈이다.
『점석재화보』(양력 1897년 7월 24일) 수록.
한편, 시(詩)의 형식으로 조정 관리들을 풍자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영조 28년 4월 23일 익명시(匿名詩) 유포가 그 예이다.
또한 익명서는 대개 한문으로 작성하지만 더러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을 염두에 두고 언문으로 작성하여 쓴 경우도 있었다.
세종 31년 10월 5일에 누군가 정승 하연(河演)을 비난하는 언문 글을 벽에 붙인 일이 있었고, 연산군 10년(1504)에 발생한 연산군의 학정을 비난하는 언문 투서 사건은 한동안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었다.
4. 조선을 뒤흔든 정치적 사건과 익명서
조선시대 익명서는 작성 주체가 누구이며, 어떤 목적을 위해 작성했는가에 따라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중에서 정치적 파급력이 컸던 것은 권력의 부침,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작성된 익명서였다.
익명서에서 비롯되어 조선을 뒤흔든 중대한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된 예로서는 앞서 언급한 양재역 벽서 사건과 나주 괘서사건을 들 수 있다. 아래에서는 이 두 사건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양재역 벽서 사건은 1547년(명종 2)에 발생하였는데,
사건의 발단은 문정왕후의 섭정을 비난하는 대자보가 양재역 벽에 붙은 것을 부제학 정언각(鄭彦慤)이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벽서에는 ‘여왕(女王)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권세를 농락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이 글은 국왕에게 보고되었고, 을사사화(1545) 때 다행히 화를 모면했던 많은 사류들이 이 사건에 연류되어 거의 다 죽거나 귀양가는 화를 입었다. 이 사건은 ‘벽서(壁書)의 옥(獄)’이라고도 불리는데, 권력을 쥐고 있던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정적을 숙청하기 위해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었다.
사실 양재역에 붙은 벽서는 윤원형의 소윤(小尹) 세력이 대윤(大尹)의 잔존세력을 청소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었다는 설이 우세하다.
<그림 10> 태릉 전경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의 무덤.
문정왕후는 중종의 계비(繼妃)이자 명종의 어머니이다. 명종 즉위 후 수렴청정을 했으며, 남동생은 윤원형이다.
다음으로 나주 괘서 사건은 1755년(영조 31)에 발생하였는데, 조선시대 일어난 단일 괘서 사건 가운데 가장 많은 인명이 살상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 해 2월에 전라도 나주의 객사 망화루(望華樓)에서 익명으로 된 글이 걸렸는데, 그 괘서에는 ‘조정에 간신이 가득 차서 민이 도탄에 빠졌다’는 등의 말을 비롯하여 정부를 비방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이 영조 즉위 이후 정권에서 밀려난 소론 세력이 저지른 것으로 파악하여 주모자를 색출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나주에 유배와 있던 전지평(前持平) 윤지(尹志)가 체포되었다. 사건이 조정에 보고된 지 7일 만에 체포된 윤지는 영조의 친국(親鞫) 등 조사 과정에서 그가 이번 괘서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즉, 괘서 자체는 윤지가 작성하였고, 괘서를 객사에 내거는데 행동으로 옮긴 인물은 그의 노비와 처남이 연루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괘서 사건이 단순한 정부 비방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모종의 거병 전 단계의 행동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관련자들에 대한 심문 과정에서 윤지가 일찍부터 정변을 위해 주변 인물들을 포섭하고 거사를 계획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건은 보통의 정부 비방 괘서 사건에 그치지 않고 대규모 역모 사건으로 비화되기에 이르렀다.
주모자 윤지는 친국과정에서 자백을 하지 않고 몇 일 만에 고문을 받다 죽게 되었지만, 사건은 이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 윤지와 친분관계에 있던 나주지역의 관리와 아전들, 같은 처지에 있던 유배인들, 윤지에게 학문을 배웠던 자들, 편지를 주고받던 서울의 소론 정치인들이 하나둘씩 체포되어 줄줄이 문초를 겪고 상당수가 고문을 못 이기고 죽거나 처형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러 가지 정치적 변고에도 불구하고 영조의 탕평 정치 하에서 그동안 살아남았던 소론계 정치인들 대부분이 숙청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그림 11>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조선시대 정치범, 중죄인을 국왕이 직접 심문한 내용을 기록한 책.
해당 부분은 1728년(영조 4) 무신난에 연루된 죄인을 심문하는 내용이다.
이상 두 사건에서 보았듯이 정쟁이 심했던 시기에 정치세력 사이에 빚어졌던 익명서 사건은 매우 심각한 정치적 파장과 후유증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처럼 반정부, 반체제적 내용의 익명서는 언론과 정보를 독점하던 조선 집권세력에게는 불온한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와 같이 일반 사람들의 정보 및 의사 교환 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사회에서 익명서의 긍정적 기능도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익명서의 내용을 통해 여러 가지 정보가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도 하였고, 때론 일반 백성들의 여론 형성에 익명서가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한국역사연구회, 201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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