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도 조선민력.
조선총독부는 1911년부터 매년 한국인용으로 양 · 음력 대조와 절기 등을 기록한 ‘조선민력’을 발간했는데,
‘민력(民曆)’이라는 이름에는 ‘관존민비(官尊民卑)’의 뜻도 담겨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 대다수는 양력을 ‘왜력(倭曆)’이라 부르며 기피했다.
[사진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사료]
고종은 동지사(冬至使)로 중국에서 돌아온 이정로 · 이주영 · 황장연을 불러 보고를 듣고 노고를 치하했다.
500년 가까이 매년 되풀이된 동지사 소견(召見)이 종언(終焉)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동지사의 기본 임무는 중국의 황제에게 책력(冊曆)을 얻어오는 일이었다.
시간은 사람이 인지하는 천체의 리듬이다.
옛 중국인들은 시간이란 하늘이 천체의 운행을 통해 자기 뜻을 밝히는 것으로서,
이것이 모든 생명체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었다.
하늘의 아들인 천자(天子)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 천하에 질서를 부여하는 자였다.
천자의 명으로 만들어진 책력은 하늘의 뜻을 담은 신성한 책이었고,
천자의 책력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만이 문명 세계로 취급됐다.
조선의 중국 연호 사용과 동지사 파견은 천자 중심의 세계 질서에 순응한다는 뜻을 밝히는 의례였다.
마지막 동지사가 복명(復命)한 지 한 달 뒤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 다음 달에는 갑오개혁이 시작됐으며,
그 해 말에는 국왕이 직접 독립서고문(獨立誓告文)을 낭독하여 중화체제에서 이탈한다는 뜻을 천명했다.
다음 수순은 당연히 역제(曆制) 개정이었다.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기해 조선은 역제를 양력으로 바꾸고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정했다.
그런데 연호는 천자만 제정할 수 있었으나 조선 왕의 공식 명칭은 ‘대군주’였다.
‘양력을 채용했다’는 뜻일 뿐인 연호도 군주의 포부를 담기에는 부족했다.
더구나 양력은 구미(歐美)의 역제이면서 일본의 역제이기도 했다.
백성들은 이를 일본력을 수용한 것으로 이해했다.
1896년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한 고종은
그 전해(1895)의 개혁조치를 모두 취소했지만 역제는 그대로 두었다.
다만 왕실과 국가의 의례는 다시 음력으로 치렀다.
이후 책력과 신문 등은 양력과 음력을 병기(倂記)했으며,
일반인들은 음력을 주로 쓰면서도 양력으로 일상을 재조직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중 역제는 대한제국의 강령 격이던 ‘동도서기(東道西器)’,
즉 도(道)와 의례는 우리 것을, 문물과 기예는 서양 것을 채용한다는 원칙에도 맞았다.
민간에서는 양력 1월 1일을 ‘왜설’이라 하여 외면했으니 이중 과세(過歲)가 일반화했다.
양력과 음력이 각각 지배하는 영역을 나눈 것이 우리 근대 역제의 특징이었지만
이제 세계적 보편이 한국적 특수를 압도함에 따라 음력이 지배하는 영역도 줄고 있다.
‘한국형’이니 ‘한국적’이니 하는 수식어도 비슷한 운명이 될지 모른다
.-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 중앙일보 2011.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