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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은 신라 지배층 머리형 편두에 맞는 관(冠)

Gijuzzang Dream 2010. 12. 10. 02:42

 

 

 

 

 

 

 

 

 금관의 비밀 풀어 낸 편두 습속  

 

 

금관은 신라 지배층 머리형 편두에 맞는 관(冠)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국립박물관 유물을 관람하고 난 후

전시물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을 물으면 대부분 정교한 금세공품을 꼽는다.

 

삼국시대의 현란한 금관을 보고는 한국인의 재주에 기가 질렸다고까지 말하는 외국인도 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 중에는 고려자기를 비롯하여 국보급 유물이 많은데

귀고리와 팔찌 등 금세공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반응은

세계 각지의 박물관을 방문해보면 의문점은 쉽게 풀린다.

 

이집트 등 몇몇 고대 국가를 제외하고는

신라나 백제, 고구려 시대의 금세공품에 버금가는 유물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는 고대 그리스의 금세공품과 비교해보더라도

삼국시대의 금세공품이 얼마나 정교하고 우수한 솜씨로 만들어진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엘도라도(황금의 땅 또는 황금 인간)라는 전설을 만들어낼 정도로 황금이 많았다는

잉카 제국이나 마야 문명의 금세공품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금세공에 관한 한 고대 한국인의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고 볼 수 있다.

 

금은 전기 전도율이 높고 부식성이 없기 때문에 활용도가 매우 높다.

몇천 년이 지나도 부식되지 않고 원래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는 성질 때문에

고대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귀금속이었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금제품은 고조선 말기, 즉 기원전 2세기 것이 가장 오래되었고

본격적으로 생산된 것은 삼국시대로 알려져 왔다.

러나 이러한 금에 대한 역사도 다시 씌어져야 한다는 연구 발표가 나왔다.

 

북한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평양시 강동군 순창리 글바위 5호 무덤에서 25세기경의 금동 귀고리가 발견되었고,

평양시 강동군 송석리 문선당 2호, 3호, 8호 무덤에서 발견된 금동 가락지와 귀고리는

기원전 2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순창리와 송석리에서 발굴된 금제품들은 모두 사람 뼈와 함께 발견되었는데

사람 뼈에 대한 절대연대 측정치는 글바위 2호 무덤의 것은 4376±239년이고

글바위 5호 무덤의 것은 4425±158년, 문선당 2호 무덤의 것은 4384±565년이었다.

특히 금동 귀고리나 금동 가락지의 제작 수준이 비교적 높은 것으로 보아

절대연대 측정치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금제품이 생산되었다고 추측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많은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집트의 나일 강 유역과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유역 원주민들은 신석기 시대 말부터

금을 가공하여 장신구를 만들었다. 인도에서는 5천 년 전의 유적에서 금목걸이를 비롯한 금제품이 나왔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의 금제품 제조가 이들 국가보다는 다소 늦었을지 모르지만

기원전 25세기에 이미 금제품을 생산했다는 것이 얼마나 빠른 것인지 알 수 있다.

 

 

〈장신구의 꽃 금관〉

 

 

삼국시대의 유물에만 국한하더라도 금세공품의 경우 그 수가 놀랄 만큼 많이 남아 있으며 종류도 다양하다.

장신구류는 관(冠), 관모(冠帽), 과대, 요패, 귀고리, 목걸이, 팔찌, 반지 등이 있으며

불상, 압출불(壓出佛), 사리구, 경판 등의 불구류도 발견된다.

생활용구로는 침통이나 자물쇠 등이 있고 장식금구로는 의복이나 목관 장식, 무기류의 장식 등이 있다.

 

그 중 가장 놀라운 것이 금관이다.

금관은 금으로 만든 관모를 뜻하는데 일반적으로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모든 관모를 통칭하기도 한다.

관모는 착용자의 신분을 나타내거나 특별한 의식을 집행할 때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주로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지만 신라 고분의 출토품이 주류를 이룬다.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금관이 많이 발견되는 이유로

존 카터 코벨은 금관이 샤머니즘의 흔적, 즉 무속 예술품이라고 주장했다.

코벨이 금관을 무속신앙의 흔적으로 보는 이유는

금관에서 나는 경이로운 소리가 악을 물리치는 힘의 상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금관은 작은 움직임에도 떨리며 음을 내는데

그것이 음악적 기능을 지녀야 했던 무속인들의 무악을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금환과 곡옥이 달려 있는 경우 금관을 쓴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옥과 금판으로 된 수백 개의 장식이 미세한 움직임과 반짝이는 빛을 내면서 떨리는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코벨의 가설을 비롯한 금관에 대한 기존의 학설은 금관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데 문제점이 제기됐다. 국내에서 출토된 금관 중 천마총 금관이 직경 20, 금관총 금관이 19, 서봉총 금관 18.4,

황남대총 금관 17, 금령총 금관 16.4, 호암미술관 소장 금동관 16.1, 복천동 금관 15.9

중간 값은 황남대총 금관의 17로 둘레는 53.4이다.

이 크기는 12살짜리 남자 어린아이의 머리둘레에 해당한다.

 

우선 왕이 어린 나이에 사망했을 경우를 추측할 수 있는데

5~6세기의 신라왕 가운데 10세 전후의 어린 나이로 사망한 왕은 없다.

그러므로 이들 작은 관은 요절한 왕족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신라에서 금관은 왕과 왕비뿐만 아니라 왕의 일족이면 어린아이도 착용했다는 뜻)

 

금관이 너무 작기 때문에 실제 머리에 쓰고 활동하기에는 부적합한데다가

구조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어른이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므로

금관은 생존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니라

사망자의 무덤에 넣기 위한 부장품으로 특별히 제작한 것이라는 해석도 많았다.

물론 특수한 걸이나 끈을 사용할 경우 머리에 쓰고 활동하거나

무속의 한 형태로 춤을 출 수도 있다는 반론이 있지만

금관의 크기가 작다는 것은 고고학자들이 풀 수 없는 큰 숙제 중에 하나였다.

 

 

〈신라의 지배자는 편두>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4세기대의 목곽묘에서 모두 10례의 변형 두개골이 보고되었고

KBS-TV가 2001년에 기획한 '몽골리안 루트'에서는 예안리 85호와 99호 고분에서 발견된

전형적인 변형 두개골을 소개했다.

이들 두개골의 머리둘레는 50 정도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한국인의 정상적인 머리둘레인 57.5보다 매우 작다.

이렇게 인공변형된 두개골을 '편두(扁頭, cranial deformation)'라고 부르며

외압에 의해서 두개골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한다.

 

편두에 관한 기록은 《삼국지》<위지동이전>에도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긴 돌로 머리를 눌러두어 평평한 머리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진한(辰韓) 사람들의 머리는 모두 편두이다.'

 

편두 습속은 진한(辰韓) 사람만이 아니라 변한(弁韓) 사람에게도 해당된다고 추정한다.

편두 풍습에 대해 일본인 坪井九馬三은 고대 인도에서 행해진 구습으로 설명했지만

일반적으로 유목민(코카서스 북부, 터키 등)에게 많이 나타나는 풍습으로 인정한다.

 

고조선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편두 풍속이 있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제2권에는 만주지방에는 옛날부터 편두하는 관습이 있어

어린아이 때부터 와구(臥具)를 통하여 머리통 모양을 인위적으로 편두형으로 만들었다고 적었다.

일본인 도오랑(島五郞)도 우리나라에서 일찍부터 머리의 앞 뒤 최대 길이가 매우 짧은

단두개형(短頭蓋形)이라는 형질인류학상의 측정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 황하 하류의 산동 강소 북부 일대에서 이른바 동이계 신석기시대 문화로 알려진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유적의 인골을 분석한 결과 후두부를 인공적으로 변형시킨 편두형 모습도 발견됐다.

이것은 동이족들이 중국인과는 달리 편두 습속을 매우 오래 전부터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머리가 작은 편두인골은 우리나라에서 출토되는 금관의 크기에 대한 의문점도 해결해 주었다.

헌강왕 11년(885), 왕이 최치원에게 882년에 입적한 지증대사탑비(智證大師塔碑) 건립을 위해

비문을 짓게 했다. 지증대사는 824년에 출생하여 9세인 832년에 부석사로 출가했다.

17세 때 구족계를 받고 일찍이 신라사회에 수입된 북종선을 계승하였으며

신라 경문왕이 제자의 예를 갖추고 초청했으나 거절할 정도로 교화활동에만 힘쓴 분이다.

헌강왕 7년(881)에 국가에서 사역(寺域)을 정해주고 '봉암(鳳巖)'을 시호했다.

 

 

지증대사탑비는 진성여왕 7년(893) 무렵 찬술되었으며 경애왕 1년(924)에 건립되었는데

현재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으며 귀부와 이수 및 비좌의 조각이 뛰어나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었다. 비신은 청석으로 높이 273, 너비 164, 두께 23이며

글자 지름 2㎝로 왕희지체의 영향을 받은 행서체이다.

최치원의 비문은 주인공인 지증대사 이외에도 당시 활약한 상당수의 선종 승려 이름을 전해주고 있어

신라시대 선종사 이해에 가장 중요한 사료로 꼽힌다.

 

그런데 이 비문 서두에 '편두거매금지존(偏頭居寐錦至尊)'이라는 글로 신라왕의 두상에 관해 적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加以姓參釋種(가이성참석종)        : 게다가 성(姓)마다 석가의 종족에 참여하여

偏頭居寐錦至尊(편두거매금지존)  : 편두인 국왕 같은 분이 삭발하기도 했으며,

語襲梵音(어습범음)                     : 언어가 범어(梵語)를 답습하여

彈舌足多羅之字(탄설족다라지자)  : 혀를 굴리면 불경의 글자가 되었다.

 

 

이는 신라의 법흥왕이 만년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나온 말이다.

거매금, 거서간, 마립간, 이사금은 통칭으로 신라의 지배자를 의미하므로

최치원이 적은 편두란 존귀한 신라 임금이 편두였음을 뜻한다.

금관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편두라면,

즉 신라의 임금을 비롯한 지배자들이 편두였다면 금관이 작은 이유가 충분히 설명된다.

 

그러나 김해 예안리에서 발견된 편두 유골만 놓고 본다면 새로운 문제점이 제기된다.

김해 예안리에서 발견된 편두는 남자는 없으며 여성의 30%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진한(변한 포함)의 특징적인 습속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나

주민 전체가 편두를 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가야 지역에서 편두는 4세기 전엽의 일정한 시기에 한해서 시행되었다고 추정하는데

부산대학교 정징원 교수는 하층민에게서 편두가 보이는 것은

당시 미인의 기준이거나 특별한 습속일지 모른다고 추정했다.

언론인 안태용은 신분을 구별하기 위한 방편일지도 모른다고 추정했다.

반면에 신라 법흥왕이 편두였고 금관의 크기를 참조하면

편두는 신라 지배자 계급의 풍속으로 추정할 수도 있으나 진한, 변한에서 일정기간동안 적용된 습속이

신라의 지배자 계급에 어떤 과정을 거쳐서 도입되었는지는 앞으로 보다 연구할 과제이다.

 

한편 신라에서 머리가 뾰족한 토용들이 매우 많이 발견되는 것도 특이한 일이다.

토용을 기원전 7~8세기 전부터 현 터키 지역에 거주했던 프리기아인들이 초원을 따라 이동해왔으며

그들이 고깔모자를 쓴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발표되었으나

학자들은 이들 토용이 진한과 변한의 풍습이었던 편두들을 형상화하여 조각한 것으로 추정한다.

 

- 이종호, 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