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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군당굿 - 용산구 남이장군사당제

Gijuzzang Dream 2010. 12. 1. 17:07

 

 

 

부군당굿 - 용산구 남이장군사당제

 

 

 

마을신으로 부활한 남이장군

 

1999년 7월, 용산구 용문동 일대에서 전해오던 남이장군사당제가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남이장군사당제는 음력 10월 1일부터 일주일 동안 진행되는 큰 굿이다.

걸립, 꽃등행렬, 당제, 장군출진, 당굿, 사례제 및 대동잔치의 순으로 이어지며,

강릉단오제(중요무형문화재 13호)와 은산별신제(중요무형문화재 9호)와 비교해보아도 손색이 없다.

 

1970년대 남이장군사당제는 전승이 중단되던 어려움을 겪었다.

1983년 동민(洞民)들과 무당박사 고(故) 김태곤 교수의 노력으로 당굿이 재생되었고,

15년이 지난 이후 드디어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남이장군사당제는 서울지역의 마을굿인 부군당굿의 일종이다.

마을굿이란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며, 동민들이 힘을 합하여 지내는 공동체 의례(儀禮)이다.

 

서울의 마을굿으로는 크게 부군당굿과 도당굿이 있다.

도당굿이 경기 지역에까지 널리 퍼진것에 비하여 부군당굿은 서울의 한강변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부군당굿에서 모시는 신을 부군신, 부군할아버지, 부군할머니, 부군님이라 부르는데,

남이장군당굿에서는 다름아닌 남이장군(1441~1468)이 부군신에 해당된다.

남이장군 이외에도 부군신으로 좌정한 인물로는 고려조의 공민왕 · 최영장군, 조선조의 이성계 등이 있다.

남이장군은 28세의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까지 오르는 기개를 보였다.

그러나 유자광(柳子光)의 모함을 받아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350년이 지난 순조(純祖) 18년(1818)이 되어서야 남이장군은 충무공(忠武公)이란 시호를 받게 되었다.

 

마을굿에서 모셔진 인물신으로는 이처럼 억울하게 죽어간 영웅들이 많다.

한강변에서 죽어간 남이장군은 강민(江民)들의 부군신으로 다시 태어났다.

남이장군의 못다한 웅지를 간절히 희구하는 백성들의 현실적 염원인 셈이다.

 

 

 

형조(刑曹) 관아에 걸린 남근목(男根木)

50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부군당은 경각사(京各司, 서울의 관청)의 신당(神堂)이었다.

한성부(漢城府), 형조(刑曹), 사헌부(司憲府) 등 내노라하는 관청내에 부군당을 지어놓고 부군신을 모셨다.

그런데 형조의 부군당이 볼 만했다.

신당문을 열면 떨렁떨렁, 천장에 걸린 남근목(男根木)이 부딪치고 있었다.

형조에서 모신 부군신은 송씨부인으로 일명 손각씨, 손말명이라고도 한다.

혼기가 다 된 처녀가 결혼을 못하고 죽었으니 그 한을 위무해주는 방법은 남성의 음경을 깎아 바치는 것이다.

이것은 남아를 선호하고, 남근을 숭배하는 남근신앙의 일종이기도 하다.

 

지금도 이러한 풍습이 전해진다. 2001년 필자는 영등포구 신길 2동에 있는 ‘방아곳이 부군당’을 찾았다.

부군당굿이 시작되자 당건물 상단부의 보관시설에서 남근목 4개를 꺼냈다. 아! 잘생긴 남성의 그것이었다.

만신이 호구거리에 이르면 남근목을 치마에 감춘 후 제당을 한바퀴 돌기 시작한다.

나는 500년전 형조의 부군당굿을 보는 것같아 당주(堂主)에게 물어보았다.

역시…. 부잣집 딸이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되려 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아사(餓死)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예나지금이나 처녀귀신을 달래기 위해서는 남근목이 필요함을 새삼 깨달았다.

점잖은 유교를 이념으로 하는 조선조의 관청에서 남근을 모셨다니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유교국가라는 편견에 가로막혀 조선시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현종 8년(1667) 조정에서는 전교관(前敎官) 이상익(李商翼)의 행태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영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상기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이상익이 항상 의금부의 부군당에서 춤을 춘다고 하니 어찌 실성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제의에서 음주가무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시월제(十月祭)등 고대제사에서

우리 조상은 곡식을 하늘에게 바치며 춤을 추었다. 조선조라고 다를 수 있겠는가.

그저 이상익은 종래의 풍습대로 춤을 춘 것 뿐인데 다른 사건과 연루되어 시비거리가 된 것이다.

이상익의 가무사건이 334년이 지난후, 영등포구 당산동 부군당굿을 찾았다.

어김없이 제의장이 한판의 가무장으로 변하였다.

나도 고래(古來)의 천신제(天神祭)를 생각하면서 군무(群舞)에 휩쓸려 보았다. “얼쑤. 어얼쑤” 하면서…


 

인조 13년(1635) 서빙고 부군당 현판에 숨겨진 내력

 

70년대 벽두, 서빙고동 부군당에서 4개의 현판(懸板)이 줄줄이 발견되었다.

마을제당에서 이렇게 많은 현판이 발견되는 일은 흔치 않다.

하나는 인조 13년(1635)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현판에는 마을제당의 중건(重建)을 후원했던 인물과 부군당의례를 주관했던 계원의 명단이 적혀있었다.

역(役)을 맡았던 주체들은 오위장(五衛將, 종2품) 백남승(白南升)을 비롯하여 상당히 높은 관직에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서빙고 부군당은 1973년 서울시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서빙고동과 동빙고동 부군당은 지금의 한남대교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조선전기부터 이곳은 얼음을 저장해두는 빙고(氷庫)가 있었으며, 빙고의 운영을 위해 여러 직원들을 두었다.

 

이외에도 한강변은 물류를 위한 관청의 창고가 세워졌고, 군시설 및 훈련장들이 들어섰다.

한강변에 건립된 여러 관청들에도 도성내의 관청들과 마찬가지로 부군당이 있었다.

 

마포구 창전동에 위치한 공민왕 사당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광흥창의 고지기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공민왕이 나타났다.

과인이 잠시 쉬어갈 자리를 언덕위에 마련하거라. 꿈을 깬 이후 고지기는 당을 만들고 공민왕을 모셨다.”
광흥창(廣興倉)은 서강나루에 건립된 조선조의 대표적 세곡창고이다.

구전담에 의하면 이곳에는 99칸의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위 설화는 광흥창에서 신당을 건립한 유래를 설명해주고 있다.

제당의 건립에는 부연설화가 한 두 개씩 있기 마련이다.

당설화는 당의 건립에 신성(神聖)을 부여하려고 짓기도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도 적지 않다.

한강변이 점차 물류의 상업지로서 발달하고, 마을과 인구가 크게 늘면서

관청의 부군당은 마을로 걸어나왔다. 여기에는 조선조의 무속정책도 한 몫을 하였다.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조는 도성내 무당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정조대에 이르면 무당을 강밖으로 쫓아내는 초강경의 조치를 취하였다.

강밖으로 밀려난 무속집단은 상당수 용산강 등지에 정착하였다.

부군당의 중심지는 점차 도성내의 관청에서 한강변의 마을로 변모하였다.

 

 

제비(祭費)를 크게 대준 경강상인 이야기

2002년 음력 1월 1일, 필자는 차례를 지내자마자 바로 용산구 보광동 부군당으로 달려갔다.

신장거리가 끝나고 잠시 김진열씨(보광동부군당굿보존회장)와 함께 소주잔을 기울였다.

“아 예전에 굉장했지. 여기는 홍방울네라는 큰 주막집이 있었어.

또 안황옥이라는 거부가 있었는데 그가 굿비용을 많이 대주었어” 매우 중요한 제보였다.

 

1년이 지날쯤 한남동에 있는 큰한강부군당의 이천만씨(큰한강부군당위원회 총무)를 만났다.

그도 비슷한 말을 했다. “임씨네라고 하는 새우젓 장사가 살았어요. 그는 큰 돈을 모았지요.

그런 장사꾼들이 부군당굿에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조선후기 한강변은 상업지로서 크게 번창하였다.

용산구, 마포구의 한강변 일대에는 경강상인들과 하역작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 많았다.

부군당굿은 마을신에게 제사지내는 의례이기도 하지만

노동과 피로에 지친 일상을 풀어버리는 대동축제이기도 하였다.

당굿을 벌이려면 무당과 악사를 불러와야 하고, 통돼지를 비롯해서 제물값이 많이 들었다.

동민들이 추렴을 하지만 돈많은 상인들의 힘이 필요하였다.

한강변에는 돈이 풍부했으므로 경제적으로도 부군당굿이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경강상인들은 부군당굿의 비용을 대주면서 ‘돈 쓸줄 아는 큰손’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현재까지도 한강변에는 15개가 넘는 부군당이 존재하며 이곳에서는 해마다 당굿이 벌어진다.

 

사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것들도 적지않다. 밤섬 부군당이 대표적이다.

1968년 밤섬이 폭파되는 비운이 있기 전까지 밤섬부군당은 인근에서 가장 큰 당굿이 벌어졌다.

밤섬주민들은 밤섬이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일 먼저 ‘부군님 무신도’를 옮기는 일을 하였다.

밤섬 폭파 이후 와우산에 부군당을 새롭게 짓고 당굿을 벌이지만 예전과 같지 못하다.


어쨌든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0호 남이장군사당제의 속내에는 한강변 부군당굿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유구한 한강변의 역사와 문화가 남이장군사당제를 무형문화재로 만들었다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어떤 궁금증이 생긴다면 어느 해든지 음력 10월 1일 한강변을 찾아가시라.

각종 볼거리 외에도 구성진 음악과 흥얼진 술이 있으니, ‘굿도 보고 떡도 먹는다’는 말이 실감날 것이다.

- 유승훈 (서울시 문화재과 학예연구사)

- 서울특별시 하이서울뉴스 [재발견! 서울문화재]

 

 

 

한강변의 무속의식

 

- 국가에서 행했던 기우(祈雨)ㆍ기설(祈雪) 등 천재(天災)를 막기 위한 의식

: 국무(國巫)에 의해서 국가에서 시행

: 15세기까지는 무녀(巫女)를 시켜 비(祈雨)를 빌었다.

특히 태종과 세종 때에는 무당을 불러 한강에서 굿을 여러 차례 베풀었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다. 그러나 16세기부터 점차 유례풍(儒禮風)으로 바뀌어져

17세기 후기부터는 철저하게 유례의식(儒禮儀式)으로 진행되었다.

 

- 한강에서 비명(非命)으로 수사(水死)하는 경우

  개인에 의해 행해지는 수망(水亡) 지노귀굿(진오귀굿) 의식

: 사가(私家)에서 무당에 의해 사령(死靈)의 명복을 빌고 가정의 안전을 목적으로 하였다.

: 한강에서 익사할 경우 개인 가정에서는 지노귀굿 즉 넋건지기굿을 하였다.

넋건지기굿은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넋을 건지기 위한 굿으로

무당에게 물에 빠져 죽은 영혼이 씌워 그 죽은 영혼이 시키는대로 물에 들어가기도 한다.

잘못하면 무당 자신이 익사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대개 새로 신들린 신출내기 무당에게 시키고

물대 설대를 아는 무당은 직접 하기를 꺼려한다고 한다.

무당은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허리에 무명천을 묶어서

위험수위로 들어갈 때에는 잡아당기고 머리칼을 들고 나오기도 한다고 한다.

 

굿은 크게 안굿과 바깥굿으로 나뉜다.

안굿은 집안에서 행하는 굿으로 죽은 지 3년이 지난 탈상 후의 굿인데, 일명 경사굿이라고도 한다.

바깥굿은 바깥에서 하는 굿으로 죽은 지 3년 이내에 행하는 굿인데,

죽은 장소에서 행하는 것이 통례나 부득이한 경우에는 일정한 장소를 택해서 하기도 한다.

이 굿은 전 거리에 걸쳐 지노귀(진오귀)가 중심이 되며

총각이나 처녀가 횡사했을 경우 짝을 지어주기도 하는데 의식절차는 일반 구식결혼식과 같다.

그러나 이 굿은 비단 한강에서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지노귀굿(진오귀굿) -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고 극락으로 인도하는 굿.

**지노귀새남(진오귀새남) - 죽은 사람의 넋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굿.

                                         지노귀굿보다 규모가 큰 것으로 죽은 지 49일 안에 하는데,

                                         흔히 사십구일재와 같이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