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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절마을 부부쌍상여 호상놀이(岩寺洞 雙喪輿 好喪)

Gijuzzang Dream 2010. 12. 1. 16:42

 

 

 

 

 

축제로 승화한 죽음의례

 바위절마을(岩寺洞) 부부쌍상여(雙喪輿) 호상(好喪)놀이 

 

 

 

 

장례식이 축제인가?

- 죽음의례에 던지는 물음 -

1996년, ‘서편제’ 이후 한국적 정서를 잘 보여주는 또하나의 임권택 영화가 발표되었다.

그것은 바로 영화 ‘축제’였다.

‘축제’와 ‘서편제’는 임권택 영화로 유명하지만, 사실상 원작을 써준 사람은 소설가 이청준이었다.

이청준은 한국인의 내면적 정서를 꾸준히 탐구해나가는 작가로 유명하다.

1996년 나는 시내의 한 서점에서 소설 ‘축제’를 뒤적거리면서 매우 의아해했다.

소설의 소재가 다름아닌 장례식이었던 것이다. 그때 하나의 의문점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장례식이 축제란 말야 ”


한국인에게 죽음이란 새로운 세계로의 전환이다.

이승에서의 죽음은 저승에서의 삶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육신은 죽음과 함께 소멸되지만 영혼은 저승의 또다른 세계를 맞이해야 한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산자에게 하나의 이별일뿐 영원히 망자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낙천적 죽음관이 생겨난다. 가장 슬퍼해야 할 장례(喪葬禮) 의식에

음악, 노래, 춤의 호상(好喪)놀이가 벌어지는 것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고래(古來)의 각종 자료는 낙천적 장례관습이 매우 깊은 연원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수서(隋書)』의 고구려전에서는 “고구려 풍속은 집안에 빈(殯)을 차리고 3년이 지난후

길일(吉日)을 택하여 장(葬)한 후 가무와 음악으로 죽은 자를 보낸다”라고 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고분인 무용총과 안악3호분 벽화 등에서는

악대(樂隊)의 행렬도, 무악도(舞樂圖), 각종 연희도(演戱圖)가 그려져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열전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文武王)이 군악(軍樂)의 고취수(鼓吹手) 100명을 주어 장사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고대인의 장례식에 가무와 노래는 빠질 수 없는 단골이었다.
가무와 노래는 망자를 위로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산자에게는 슬픔을 딛고 새날을 준비하기 위해

필요하다. 저명한 프랑스의 인류학자 반 게넵(Arnold Van Gennep)이 지적한 것처럼

장례 또한 분리기와 전이기, 재통합기의 과정을 거친다.

즉 통과의례의 일종인 상장례도 망자와 이별하는 분리기뿐만 아니라

다시 현실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전이기와 재통합기의 과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례의 가무와 노래는 망자보다는 산자를 위한 것일 수 있다.

어차히 현세를 지켜야 할 사람은 남아있는 산자가 아니던가!

 

 

출상전야에 빈 상여를 놀리다

 

고려말 주자가례가 도입되고

엄숙한 유교식 관혼상제(冠婚喪祭)가 보급된 이후에도 ‘노는 장례’ 풍속이 끊어지지 않았다.

특히 유교식 법제를 확립해야 했던 조선전기에는 ‘노는 장례’ 풍습에 대한 엄단지시가 내려졌다.

1489년 5월, 성종(成宗)은 “상례(喪禮)의 기강을 무너뜨림이 이렇게 심하니,

인간의 마음을 가진 자로서 차마 듣지 못할 일이다”라고 통탄하였다.

당시, 부모의 장례에서 남정네와 여인들이 뒤섞여 밤새도록 술을 마셨고,

배우들이 온갖 놀이를 하였던 것이다.

유교식 예제는 기본적으로 충(忠)과 효(孝)의 이념을 충실히 따를 것을 표방한다.

특히, 부모의 상례는 부모에 대한 지극한 공경을 마지막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혼상제 중에서 상례가 가장 까다롭고 복잡하며,

만 2년이란 긴 시간이 소요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종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노는 장례풍속’은 쉽게 사라질 수 없었다.

조선후기에도, 호상(好喪)놀이라는 이름으로

엄격하고 까다로운 유교식 상례와 가무(歌舞)의 장례풍속이 적절히 혼융되었다.

이것은 장례문화의 새로운 창출을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유교식 상례절차와 복식을 따르지만

토속적인 음악과 노래, 연희들이 삽입됨으로서 더욱 풍성한 장례문화가 꽃피워진 것이다.


부모가 생의 수(壽)를 다 누렸고, 장성한 자손들이 있는 호상(好喪)시에 호상놀이가 행해진다.

이른바, 상여놀이라 해서 출상전날 밤에 빈상여를 메고 ‘상여소리’를 하거나 춤을 추면서 노는 것이다.

황해도에서는 이를 ‘생여도듬’이라 하고,

강원도에서는 ‘손모듬’, 경기도나 충청도에서는 ‘손모듬’ 또는 ‘걸걸이’,

경상도에서는 ‘개도듬’, 전라도에서는 ‘대뜨리’ 또는 ‘대어린다’라고 불렀다.

 

이중에서 진도(珍島)의 다시래기는 매우 연희성이 짙은 상여놀이이다.

비통해하는 상주를 웃기고, 재담이나 노래와 춤등이 등장하여 한편의 연극처럼 드라마틱하게 진행된다. 다시래기는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상여놀이는 출상(出喪)을 위한 연습과정이기도 했다.

큰 상여가 나가기 위해서는 상두꾼 30명 이상이 상여를 메야했다.

상두꾼 30명이 일사불란하게 발을 맞추어 움직이기 위해서는 사전 연습이 필요하다.

더구나 상가(喪家)에서 장지(葬地)까지는 긴 여정(旅程)이 있으며,

외나무다리나 가파른 길을 올라가기도 하는데

이때 상두꾼들의 통일된 힘과 행동, 순발력이 요구된다.

상주에게 상여놀이는 슬픔을 극복시켜주는 의례이며,

상두꾼들에게는 고된 노동을 준비하는 의례인 셈이다.

 

 

 

바위절 마을(암사동)에 쌍상여가 나가고…

 

1996년, 서울의 바위절마을(암사동)에서 전승되었던 ‘호상놀이’가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바위절마을 호상놀이는

암사동이 1963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기 전까지 전래되어 왔다가 이후 그 명맥이 끊겨졌다.

30여 년이 지난 1990년에 그 원형이 복원되었으며,

제주도에서 개최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장려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현재는 암사동 선사주거지(사적 제267호)에서 매년행사로 재현되고 있으며,

강동구의 대표적인 무형문화재로 자리잡게 되었다.


바위절 마을(암사동, 岩寺洞)이란 명칭은 너른 바위 위에 아홉 개의 절이 있던 사실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구암서원(龜巖書院)이 자리잡았으며,

현재는 주춧돌만 남아 절터의 흔적을 어렴풋이 확인시켜 주고 있다
현재는 서울특별시 강동구의 관내이지만 1960년까지 이곳은 경기도 광주(廣州) 땅이었다.

 

광주의 옛말에

“암사리(암사동)가서 소리하는 체 하지 마라, 길리(길동)가서 막걸리 먹는 체 하지말라.

미리당(명일동)가서 키 큰 체 하지 말라‘라는 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선소리 타령이 잘 전수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선소리타령의 보유자였던 고(故) 정득만이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또한 바위절 마을 호상놀이의 보유자인 이재경도 선소리 타령의 대가이기도 하다.
바위절마을 호상놀이는 출상, 상여놀이, 노제, 징검다리 건너기, 외나무다리 건너기, 산비탈타기,

산역행의 순으로 이어진다.

징검다리나 외나무다리 건너기를 할 때에는 다리가 좁으므로 바깥 2열이 빠진다.

남아있는 안쪽 2열은 몸을 바깥으로 기울여 균형을 유지하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V"자를 보는 것 같다.

이처럼 바위절마을의 호상놀이는 전통적인 운구요령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매우 가치가 있다.


바위절마을호상놀이는 쌍상여가 나간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것은 1951년, 암사동에 거주하는 고(故) 문창순 부부의 장례에 있었던 상여놀이를 복원한 것이다.

문창순(당시 69세)은 음력 3월 18일에, 그의 부인은 음력 4월 12일에 타계하였다.

한국전쟁의 급박한 와중이라 문창순의 장례때는 상여로 모시지 못했고,

얼마후 부인이 타계했을 때 쌍상여가 나간 것이다.

상여놀이에서 큰 특징은 ‘상여 어루기’이다. 마치 풍물굿의 짝두름을 보는 것 같다.

짝두름은 두패가 길게 줄을 지어 마주본 다음 서로 밀고당기는 놀이이다.

상여어루기에서도 쌍상여가 마주보며 서로 밀고 당기기도 하고 맴돌기도 하다.

이것은 양패의 놀이라기보다는 문창순과 그의 부인이 생전에 나누었던 사랑을 상징하는 것 같다.

20여 일을 차이로 죽음까지 같이했으니 그들의 천생연분을 상여놀이에서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바위절마을호상놀이에서 우리는 인생을 배운다.


신부는 꽃가마를 타고 신랑집으로 가며, 망자는 꽃상여를 타고 장지로 간다.

일반백성들이 전통시대에 ‘탈것’에 오르는 일은 흔지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혼례식과 장례식에는 최고의 대우를 받는 셈이다.

상여놀이에서 상여는 집을 상징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고택(古宅)의 난간처럼 상여에도 난간이 달려있고, 단청을 상징하는 연꽃·목단 문양들이 그려졌다.

편안한 집에서 장지까지 모셔지는 것이다.

또한 집의 바깥에다가 한아름의 꽃을 달아주었으니,

망자는 최고의 예우를 받으며 북망산천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장지까지 가는 여정(旅程)은 그야말로 망자의 인생사를 상징한다.

시냇물을 만나면 건너야 하고 때로는 산비탈을 올라야 한다.

고된 인생사를 거친 뒤에야 비로서 영면(永眠)에 들수 있게 된다.

 

이외에도 우리는 호상놀이에서 중요한 교훈들을 얻을 수 있다.

죽음이란 일대절명의 순간에 부딪쳐서도, 웃고 떠들 수 있는 낙천적 세계관이 바로 그것이다.

비극적 사건이 잦은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귀감일 수 있다.

오늘의 슬픔은 내일의 기쁨이며 절망을 희망으로 받아들이는 세계관을 호상놀이에서 배워야 한다.

또한 호상놀이가 결국 산자를 위한 것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음악과 노래, 놀이로서 생을 달리한 망자를 위로할 수 있는가?

이것은 부모의 죽음에 직면한 상주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이승의 기쁨을 직시시키기 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여소리 한가락을 보면,

 

“우리 인생은 한번가면 그만이다.

북망산천이 멀다해도 대문밖이 저승일세.

한번 아차 죽어지면 다시오기 어려워라. 이제가면 언제오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 유승훈 (서울시 문화재과 학예연구사)

- 서울특별시, 하이서울뉴스 [재발견 서울문화재]

 

 

 

 

 

 

 

 

바위절마을(岩寺洞) 호상(好喪)놀이

 

부부쌍상여(雙喪輿) 호상놀이로서,

가정형편이 좋으며 오래 살고 복이 있는 사람이 사망하였을 때 하는 놀이이다.

출상시(出喪時) 험난한 길을 무난히 갈 수 있도록 전날 밤

빈 상여를 메고 선소리꾼과 상여꾼들이 모여 밤새도록 만가(輓歌)를 부르며 발을 맞추는 놀이이다.

이 놀이는 현 강동구 암사동이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전래되어 왔으나,

그 뒤 마을의 개발과 도시화 물결로 단절된 것을 30여 년만인 1990년에

몇몇 뜻있는 이들에 의해 원형 복원되었다.


이 놀이의 구성은

출상ㆍ상여놀이ㆍ노제ㆍ징검다리ㆍ건너기ㆍ외나무다리 건너기ㆍ산비탈 타기ㆍ산역행으로 짜여있으며,

대여(大輿)는 4인씩 9행해서 36명, 소여(小輿)는 4인씩 7행해서 28명의 상두꾼으로 꾸몄다.

대여에는 선소리꾼이 올라서거나 앞서 걸어가며 요령을 흔들고 소리를 멕이며,

소여에도 요령잽이를 한 사람 배치한다.

상여를 들어올리거나 내릴 땐 요령을 잦게 흔듬으로써 신호로 삼는다.


절차는 발인제, 노제, 논두렁 건너기, 짐검다리 건너기, 외나무다리 건너기, 산신제, 달구질, 평토제

순이며, 복식은 상복이다.
배역인원은 대표기 1, 농악 6, 방상시 2, 요여 2, 만장기 20, 명정 2, 운삽 2, 불삽 2, 공포 2, 큰상여 36,

작은 상여 28, 상주(남·여) 10, 복재기 10, 조객 10, 지게꾼 2명이다.
도구는 상여 2, 요여 1, 만장기 20, 공포 2, 명정 2, 불삽 2, 운삽 2, 상복, 방상시(탈 2, 방패 2, 칼 2) 호적 1,

장고 1, 상쇠 2, 징 1, 북 1, 제기류, 관 2, 외나무다리 1조, 징검다리 1조, 논두렁 1 등이다.

 

 

놀이 내용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출상, 발인

출상하는 날 망인(亡人)이 상여에 옮겨지면 상주와 복인(服人)들이 발인제를 지낸다.

발인제가 끝나면 상여꾼들이 상여 옆에 도열하고 선소리꾼이 상여 주위를 돌며

요령잡기 소리를 구슬프게 부르며 상여꾼들은 상여를 메고 일어선다.

 

선소리꾼이 요령을 흔들면서 "곤방네"를 세번 부를 때

상두꾼들이 "네"하고 대답하며 상여를 들어 어깨에 멘다.

 

"어러기넘차" 소리를 몇 회 부르며 발을 맞춘 뒤 선소리꾼이 마모소리를 내면

상주ㆍ복재기들은 절을 세 번한다. 상여도 앞쪽을 숙이며 하직 인사를 한다.

요령잽이가 상여 앞에 올라선다. 이때 농악 악사가 소리를 하면서 선두를 이끌고 집을 떠난다.

 

발인제가 끝나면 선소리꾼이 상주와 맞절을 세 번 하고 구성지게 선소리를 하는데

그 소리는 회심곡(回心曲)과 비슷하다.

 

여보시오 벗님네야 이내 말씀 들어보소.

한두 사람이 밀지라도 수십명이 미는 듯이.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는 날을 일러주게.

어제 오늘 성한 몸이 저녁나절 병이 들어

인삼, 녹용 약을 쓰니 약덕이나 입을손가.

무인 불러 굿을 하니 굿덕이나 입을손가.

맹인 불러 경 읽으니 경덕이나 입을손가.

실락 같은 이 내 몸이 태산 같은 병이 들어

부르나니 어머니요 찾으니 냉수로다.

혼미하여 나 죽겠네 정신차려 살펴보니 약탕관이 놓여 있고

일직사자, 월직사자는 나를 가자 기다리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는 날을 일러주게.

우리 인생 한 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살아생전 놀고 가세.

 

상여가 발인된 뒤의 대열은

악사, 방상시, 명정, 만장(輓章), 지전(紙錢), 공포(功布), 불삽, 지초연(紙草煙), 혼백, 상여, 운삽, 상주,

복재기(服人), 조객 순으로 상여 뒤를 따른다. 상여꾼들은 이 마을 특유의 소리를 주고받는다.

 

말없이 소리 없이 떠나는 님은 어디로 가나.

북망산천이 멀다 해도 대문 밖이 저승이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산촌으로 들어가니 슬프기 한이 없다.

산 절로 수 절로 하니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인생에 마지막 길이 허무하기 짝이 없다.

이팔청춘 소년들아. 내 이 말을 들어봐라.

늙었다고 웃지 말고 망령이라 웃지 마라.

이 내 이 몸 늙어지면 싹이 나나 움이 나나 죽어지면 그만이다.

 

소리가 구성지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상여는 뒤로 밀리는 듯, 앞으로 나가는 모습이

마치 강물이 출렁이는 것과 같아 보인다.

  

(2)노제(路祭)

동구 밖을 나가기 전에 쌍상여가 마주 보며 서로 밀고 당기며 맴돌기도 하면서 상여어루기를 한다.

소리는 방아타령이 불리워진다. 상여는 망인이 잘 다니던 곳, 자기 소유 전답을 지날 때 잠시 쉰다.

상여가 장지를 향하여 가는 동안 미처 상가(喪家)를 찾지 못한 조객(弔客)들은 상여 뒤를 따라간다.

상여는 망인(亡人)이 생전에 친히 지내던 사람의 집이나 또한 본인 소유 전답을 지날 때 잠시 쉰다.

이때 길거리에서 간단하게 제(祭)를 올리고 조문객들은 마지막으로 문상을 한다.

 

(3)외나무다리와 징검다리 건너기

상여가 가는 도중 물속에 동발을 박고 통나무 2-3개를 한데 묶어 발판을 만들거나

말판 위에 뗏장을 엎어놓은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다.

상여꾼들은 이 외나무다리 위에서 V자가 되어 중심을 유지하면서 건너간다.

또 가는 동안 개울을 만나면 개울에는 돌을 띄엄띄엄 놓은 징검다리를

선소리에 상여꾼들이 발을 맞추면서 무난히 건넌다.

 

징검다리와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는 4열의 상두꾼 중 바깥편 2열은 대열에서 나가고 안쪽 2열만 건넌다.

상여와 발은 중심에 두고 몸을 바깥으로 곧게 기울이기 때문에 2열의 상두꾼이 V자형을 이루게 된다.

산비탈을 탈 때는 4열로 가되 높은 경사면의 상두꾼들 2열은 몸을 숙이고

낮은 논둑의 다른 2열은 상여를 높이 치켜 들어줌으로써 균형을 맞춘다.

이렇듯 여러 가지 형태의 행상모습과 그 운구 요령을 보여 주고 있다.


암사동의 일반적 상여 행렬은 연 혹은 지초연이 앞서고 만장기와 농악(징·장·북·쇄납)이 뒤따르며

상여ㆍ상주ㆍ복재기ㆍ조객순으로 길을 떠난다.

증자들은 방상시를 보지 못하였으며 민속경연 준비 때에 첨가했다고 한다.

 

(4)달구질

출상에서부터 징검다리 건너기까지 몇 차례 어려운 고비를 넘긴 상여는 장지에 도착하고

이어 하관(下棺)과 동시에 성분(成墳)을 하면서

이승에서 집터를 다지듯 고인의 천년 유택을 짓기 위하여 덕담과 방아타령을 부르며 달구질을 한다.

달구질은 6인이 2회 다지고 평토 후 벌다구질은 10∼15인이 3회 다짐이 기본이며,

상주가 더 달궈주길 바랄 때는 2회 더 해서 모두 9회를 다지기도 한다.

선소리꾼은 따로 서서 북을 치면서 메기고

달구꾼들은 각자 한발 두 뼘 길이의 긴 달굿대를 쥐고 나비 놀 듯 허리를 굽놀리면서 소리를 받는다.

 

 

달구질소리가 울려 퍼진다.

 

달고 닺은 동갑님네. 이 내 말씀 들어보소.

세상천지 만물 중에 인간 밖에 또 있는가.

우리 인생 한 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한 두 사람이 다질지라도 열 스물이 다지듯이 일심으로 다져보세.

먼데 사람 듣기 좋게 가까운 사람 보기 좋게

한발 두 뼘 달고대를 두세 발이 되는 듯이,

좌우로 제치면서 일심으로 다져보세.

깎은 머리를 흔들어가며 삼등허리를 구부리면서 일심으로 다져보세.


 

 

암사동 쌍상여 호상놀이의 순서는 일반에서 널리 행해지는 전통 장례행사와 비슷하다.

다만 다른 점은 슬픔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즐거운 가운데 진행된다는 것과

부부 상여인 쌍상여란 점이 다르며, 발동작이 절도 있다는 것과

또 상여소리 즉 만가(輓歌)는 또 회심곡과 방아타령 등이 불리어지는 것이 일반 상여와 다르다 하겠다. 

또 ‘노세 노세 젊어 노세 늙어 병들면 못노나니 일생일장 춘몽이라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라는

노랫가락 가사가 섞여 있는데 이것은 놀이이기 때문에 일반 상여소리와는 다르다고 하겠다.

이 놀이는 조선시대 이 마을에 세거(世居)하던 문씨(文氏) 문중에서 행해진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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