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한국, 세계와 만나다.

Gijuzzang Dream 2010. 11. 10. 15:37

 

 

 

 

 

 




 

상상 속 하늘과 땅

 

우리가 우주를 가보지 못했을 때 우주를 상상하듯이

우리 조상들도 하늘과 땅의 모습을 상상하고 또 알아갔다.

동양사회에서 하늘은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을 주재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천체 운행의 이상이나 기상이변 등은 예외 없이 왕도정치를 촉구하는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졌다.

자연히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는 하늘을 주시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천문학은 동양 과학의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일찍부터 발달할 수 있었다.

경주에 있는 첨성대는 한국에서 하늘에 대한 관심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실물로 말해준다.

천문대는 고려의 도읍인 개성에도, 조선의 도읍인 서울에도 있었다.

하늘에 대한 관심은 우주의 구조, 하늘과 땅의 모양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동양사회의 우주구조론 중에는 하늘을 공 모양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이것이 혼천설이다.

그러나 혼천설에서조차 땅은 평면으로 묘사되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새로운 세상을 보다

 

조상들이 펼친 상상의 나래 속에서 땅은 평면이었다.

그런데 그 평면의 끝은 어디일까?

한국 고대사가 배출한 인물 가운데 한반도에서 가장 먼 곳을 여행한 사람을 꼽으라면 혜초를 들어야 한다. 당나라에서 수학하던 그는 서기 727년(신라 성덕왕 26) 천축국을 여행한 뒤, 유명한 「왕오천축국전」을 지었다.

당나라가 중원에 기반을 둔 제국이었다면, 몽골은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명실상부한 세계 제국이었다. 이 제국 안에서는 당나라 때보다 더 다양한 문화가 교류되었으며, 더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었다. 유교문화는 이 제국으로 흡수되었으며 고려의 지식인들은 몽골에 합류한 한족 지식인들을 통해 제국을 보았다.

 

몽골이 축적한 지식은 명으로 계승되었으며, 그 일부는 다시 조선에 전해졌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1402년)는 이런 배경 아래에서 탄생했다.

중국에서 아프리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의 형상은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에서 따온 것이다.

도면 상단에는 중원대륙에서 명멸했던 역대 왕조의 도읍지와 그 연혁에 대한 설명이 자세한데,

이 정보들은 청준의 <혼일강리도>에서 옮겨 적은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원본지도들의 내용은 대부분 몽골제국시기의 것들이다.

몽골은 세계제국답게 놀랄만한 해외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물론 적지 않은 오류가 있다.

베트남-타이만-말레이반도에 이르는 굴곡진 해안은 <강리도>에서 평평한 선으로 묘사되었다.

인도와 아라비아에서도 왜곡은 심한 편이다.

그러나 이런 오류는 <성교광피도>와 같은 원본지도에서 온 것들이다.

의정부는 다양한 원본지도를 들여와 새로운 세계지도를 만드는데 국가적인 역량을 투입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현재 전하는 15세기 고세계지도 중에서

구대륙 전체의 윤곽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런 노력 덕분이다.

무엇보다 이 지도는 15세기 조선이 가진 넓은 시야를 웅변해준다는 점에서 더 없이 중요하다.  


어떤 세계지도를 보았는가?

 

서구식 세계지도를 최초로 동양사회에 소개한 사람은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였다.

1603년 조선사신 이광정과 권희가, 마테오리치가 제작한 단원형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를 들여왔다.

홍문관의 책임자였던 이수광은 이 지도에서 넓은 세계를 보았다.

1603년 마테오리치의 중국인 친구 이응시가 <곤여만국전도>를 토대로

<양의현람도>라는 8폭 병풍을 제작했다. 국내에는 숭실대 도서관에 그 판본이 남아 전한다.

 

그밖에 알레니의 <만국전도>도 수입되었다. 이 지도들은 대형 병풍으로도 만들어졌지만

「삼재도회」, 「도서편」과 같은 책자에 소략한 형태로 수록되기도 했다.

이 책들은 조선 지식인들이 즐겨 쓰던 대표적인 공구서들이었다.

조선에 유입된 서구식 세계지도 중에는 세계를 두개의 원, 즉 동반구와 서반구로 나누어 그린 것도 있었다.

페르비스트의 <곤여전도>(1674년), 장정부의 <지구도>(1800년) 등이 이런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페르비스트의 지도는 조선에서 중간되었으며,

장정부의 <지구도>는 최한기에 의해 <지구전후도>라는 이름의 지도로 재탄생하기도 하였다.

<지구전후도>는 목판으로 인쇄된 소형지도였으므로

<곤여만국전도>나 <곤여전도>에 비해 대중화가 용이했다.

최한기는 자신의 저서인「지구전요」에「영환지략」의 양반구도를 게재하는 등

양반구도의 보급에 노력했다.



‘넓은 세계’는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

<곤여만국전도>를 비롯한 단원형 세계지도는 양반구형 세계지도보다 훨씬 널리 보급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어느 유학 경전도 이런 지구적 규모의 ‘넓은 세계’에 관해 설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있거나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륙들(구대륙)은 그나마 나았다.

멀리 바다 건너편에 있는 남북아메리카대륙(신대륙)은 유학적 발상으로는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조선 지식인들은 이 알 수 없는 넓은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역사적인 전례(前例)를

유학 경전 바깥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산해경」에 주목했다.

이 책은 산경·해경·대황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경을 중앙에 배치하게 되면, 세계는 중앙에 대륙이 있고

중앙대륙(산경)과 외대륙(대황경) 사이에 바다(해경)이 있는 구도가 된다.

 

다른 사람들은 중국 고대 사상가 추연의 주장을 부활시켰다.

추연은 유교에서 주장하는 우공의 9주는 세계전체가 아니라, 전체 세계의 1/81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비해(裨海)에 의해 둘러싸인 9주가 있고, 9개의 9주는 다시 대영해(大瀛海)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이 세계관들은 조선에서 오랫동안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유학적인 세계와는 너무나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주장들이 17세기 조선에서 갑자기 살아나기 시작했다.

서구식 세계지도는 ‘비슷한 규모의 넓은 세계’에 관한 동양의 아이디어를 부활시켰던 것이다.


문화적 중심으로부터 퍼져나가는 새로운 세계’를 표현하다

 

이런 지적인 성취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만원권 신권에는 혼천시계의 시뮬레이터 부분이 묘사되어 있다. 혼천의 안쪽에 지구를 배치한 모양이다. 혼천의는 혼천설이라는 전통적인 우주구조론에 입각한 장치이며 공처럼 둥근 지구는 서양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지식이다. 최한기는 서구의 천문지리지식을 자신만의 독특한 기철학 안으로 수렴시켰다.

 

<천하도>는 중앙대륙-내해-외대륙-외해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구식 세계지도가 되살려낸 「산해경」, 혹은 추연의 세계관에 기원을 두고 있다.

<천하도> 중에는 경위선을 표현하거나, 서구식 세계지도를 그려 넣은 사본들도 있다.

<여지전도>는 서구식 세계지도의 도면 중 구대륙만을 표현한 것이다.

문화적 중심으로부터 육로로 도달할 수 있는 곳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위백규의 <천하제국도>는 아시아 · 유럽 · 아프리카 · 아메리카 · 남방대륙 등 5개의 큰 대륙을

바다에 뜬 섬처럼 묘사하고 있다.

다섯 개의 대륙은 서양에서 온 지식이며, 그것을 섬처럼 표현한 것은 동양의 전통적인 사고에 따른 것이다.

조선 지식인들은 ‘문화적 중심으로부터 퍼져나가는 새로운 세계’를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모색, 전통적인 지식과 새로운 지식을 조화시키려는

부단한 탐색의 과정이 이어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상들의 세계정신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도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 배우성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사진제공 · 성신여대 박물관, 삼성문화재단

- 2010-10-14 월간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