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

Gijuzzang Dream 2010. 11. 10. 18:31

 

 

 

 

 



 

 

 

조선을 말하기에 앞서

 

우리는 우리에 대하여 남이 하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역사학자들이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오류 중의 하나는

아마도 자기 연민(憐憫)과 그로 인한 사실의 호도(糊塗)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는 역사학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함정 중의 하나이며

이를 극복하지 못할 경우 한국사는 한국 사람만이 읽는 역사로 끝나고 말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사만으로서 한국사가 아니라

동양사에서의 한국사와 세계사 속에서의 한국사의 위치를 돌아보아야 한다.

역사학자가 근시에 빠질 경우에 시각(視角)을 교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잠시 자신의 자료를 덮어두고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어보는 것이다.

이는 한국 사학사(史學史)의 가장 근 병폐인 사료 부족으로부터 지평을 확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로서 한국의 개화기에 이 땅을 찾아온 외국인들의 기록을 들 수 있다.

한국과 외국의 관계 설정에 대하여 우리는 두 가지의 시각에서 문제에 접근하게 된다.

 

하나는 주체적으로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인식했고, 그들을 어떻게 상대하였는가의 문제이다.

한국사에서 흔히들 논의되고 있는 쇄국인지 사대인지의 문제,

우리는 진실로 그들에게 인종적 기피 의식(xenophobia)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들에게 호의적(xenophilia)이었는지의 문제 등이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았는가의 문제이다.

호기심, 모험심, 일확천금의 꿈, 의사와 선교사로서의 소명감, 그리고 외교관의 자격으로

이 땅을 찾아온 서구인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한국의 모습을 그린 글과 그림 또는 사진을 남겼는데,

이들의 묘사는 앞서 말한 우리의 생활사를 되짚어보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사진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당시에 그들의 기록은 우리의 회상 여행의 좋은 길잡이가 될 수도 있다.

그들의 자료들은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보는 과정에서 저지를 수 있는 편견과 오류를 바로 잡아 준다.

우리는 자신의 실상을 잘 알지 못하지만

서구인들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한 것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기록은 흥미의 범위를 넘어 사료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젤딘(Theodore Zeldin)의 주장처럼,

“역사가는 역사를 그릇되게 바라보는 독자의 눈으로부터 백내장을 제거해주는 안과 의사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기록은 우리에게 소중한 조언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그들은 보았던 우리의 모습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적할 수 있다.





망국의 책임

 

해방 정국의 군정기에 미군으로 한국에서 활약한 후 귀국하여 한국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된 헨더슨(Gregory Henderson)의 저서 「한국 : 소용돌이의 정치」(1978)를 보면,

“1910년에 그 많은 인구를 거느리고 그토록 훌륭한 유산을 가진 국민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멸망한 예는 역사적으로 희귀한 일”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서구인들이 보기에 민족에 대한 열망도 강렬했고,

문화와 역사가 유구한 한국의 멸망은 좋은 연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대한제국멸망사의 수수께끼를 지배 계급의 부패에서 찾고 있다.

 

그 한 예로, 런던 「데일리 메일」지의 기자였던 매켄지(F. A. McKenzie)는

1908년에 저 유명한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 1908)을 쓴 후에

1919년에 한국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두 번째로 한국을 찾아온다.

그가 3·1운동을 바라보면서 쓴 책 「한국의 독립 운동」(Korea's Fight for Freedom, 1920)을 통하여

일관되게 주장하는 그의 논지는 약소국의 멸망은 일차적으로 당사국, 특히 당시의 지배 계급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는 각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

매켄지의 망국의 논리는 지배 계급의 부패와 무능이지 결코 일본의 잘못만을 탓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의 멸망은 어쩌면 필연이었을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주장한다.

일본의 잔학상이나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적개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러한 논리만으로는 망국이 설명되지 않는다고 그는 설명한다.

만약 자신의 망국을 일본의 침략성으로 돌린다면 그것은 ‘탓의 역사학’에 머물게 될 것이다.

맹자(孟子)의 말을 빌리면, “어떤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 나라가 먼저 멸망할 짓을 한 연후에 다른 나라가 와서 그 나라를 멸망시킨다(國必自伐然後人伐之).”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망국의 문제는 먼저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는 자성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

 

독일의 철학자 니체(F. W. Nitzsche)의 말을 빌리면,

남자들이 역사에서 더 강한 역할을 했다고 우쭐대지만

인간의 내면에 들어가면 오히려 여자가 남자보다 더 강인하다고 한다.

역사의 표면에 나타난 지배자의 군상을 보면서 역사가 마치 남자들의 것인 냥 기록되어 있지만

어느 사건, 어느 위인의 배후에는 그 남자에 못지않은 여인들의 역할이 있었다.

때로는 어머니일 수도 있고 때로는 아내일 수도 있는 이들의 역할은 한국의 개화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개화기에 조선의 여성의 삶에 대하여 가장 깊은 연민과 통찰력을 가졌던 인물은

아마도 길모어(George W. Gilmore) 목사였을 것이다. 프린스턴대학과 유니언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1886년에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부임한 그는

「서울풍물지」(Korea from It's Capital, 1892)라는 책을 남겼는데,

이 책에서 그는 조선에서의 여성의 지위에 대하여 남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

흔히 한국 사회에서는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유교의 유산이 여성에게 참으로 가혹했다고 인식되어 왔다.

유교의 여성관이 인도주의적이지 않았던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길모어의 관찰에 따르면,

조선 사대부 가정의 경우에 여성의 지위와 권위는 매우 지존(至尊)하여 오히려 서방인들의 놀라움을 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는 매우 미묘하며 한국의 여권주의자들을 분노하게 만들 수도 있어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의 여성비하론은 서구우월주의에 의해 다소 과장된 느낌이 있다.

 

한국의 역사에는 여성을 존중한 유산도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관노가 아이를 낳으면 휴가를 백일 동안 주었고,

그 남편도 30일이 지난 뒤에야 사내구실을 하도록 했다(「세종실록」 16/4/26).

조선조의 「경국대전」첫머리가 여권을 다룬 내명부(內命婦)에 관한 조항이라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서양인이 바라본 한국의 토론 문화

한국의 정치를 논의할 때면 민주주의의 수준을 얘기하면서 그 전망을 회의적으로 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되돌아보면, 민주주의는 유서(由緖)이다.

그것은 하루 이틀에 이뤄진 것이 아니며 오랜 갈등과 부대낌을 겪으면서 이뤄진 고통의 산물이었다.

영국의 민주주의가 위대하다고 하지만 그들의 초기 모습은 어이없을 정도로 천박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어려움을 논의하면서 ‘토론 문화의 미숙’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남을 윽박지르고, 일갈(一喝)하고, 장황하게 한 소리 또 하고,

남의 얘기는 듣지도 않은 채 자기 얘기만 우기고, 목청을 높이고, 남의 말을 끊거나 주먹질이 오고 간다.

물론 침묵하고, 남의 말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국회의원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한국 토론 문화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헐버트(Homer B. Hulbert) 목사는 이 땅에 묻힌 은인 중의 한 사람으로,

개화기에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다. 가 남긴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1906)는

한국에 관하여 개화기에 씌어 진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그가 한국인의 성정(性情)을 지적하는 대목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바로 한국인의 토론 문화에 관한 부분이다. 그는 한국인의 대화법이 꼭 싸우는 사람들 같다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토론에 의해 건전한 결론에 이르는 일이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인의 회의는 투사들의 결전장 같고, 토론은 독립투사들의 열변처럼 들린다.

그리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악습이 있다.

 

서구 민주주의는 플라톤(Platon)의 「대화(對話)」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의 모든 작품이 대화체로 되어 있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우정이든, 부부든, 사회든, 정치든, 말이 통하지 않으면 함께 살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대화가 부족하고 그 기술이 투박한 것이 예나 지금이나 늘 문제인 것이다.





체념에서 비롯된 조선인의 게으름

 

1894년 2월, 한 초로의 서양 부인이 부산에 도착했다.

그녀의 이름은 비숍(I. B. Bishop). 그때 이미 그녀의 나이는 63세였다.

가족사의 비극을 잊기 위해 극동을 찾았던 그는 1897년까지 극동에 머물면서

네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여 체류했다.

그녀는 마적단의 습격을 무릅쓰고 시베리아의 한인촌을 탐사했으며,

뼈가 으스러지는 부상을 입으면서 봉천(奉天)을 여행했다.

한국의 이 시기는 갑오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청일전쟁과 갑오경장, 그리고 을미사변을 겪은

한말 풍운의 핵심이었다.

 

깔끔한 일본을 거쳐 내한한 비숍 여사가 한국을 돌아보고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가난과 불결, 그리고 게으름이었다.

그는 이러한 한국인의 생활을 바라보면서 이 나라의 장래는 암담하다고 체념한다.

그가 더욱 절망한 것은 상류 사회의 사치와 방탕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는 시베리아의 한인촌을 답사하고는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왜냐하면 이곳의 한인들은 경제적으로 유복하고 검소, 근면하며 인성도 착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이들의 삶을 시샘하는 러시아 정부가 한인들을 추방시키기도 하고 유입을 집요하게 막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비숍 여사는 한국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조선에 사는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가난하고 불결하고 게으르며,

러시아에 사는 한인들은 왜 그토록 근면하고 유복한가?  

 



비숍 여사가 얻은 결론은 간단했다.

조선에 사는 한국인들이 가난한 것은 노동의 의욕이 낮고 따라서 생산성이 낮았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부패한 관리의 수탈 때문이었다.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체념이

끝내 한국인을 가난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노동은 천형(天刑)이었으며 저주였고 관리는 기생충이었다.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될 수 없다는 절망으로 인해서

한국인들은 의욕도 없이 게으르게 살 수밖에 없다고 그는 진단한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은 결코 가난하거나 게으른 나라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가 보기에 한국인은 다른 나라에 나가면 더 잘사는 민족이었다.

 

그때로부터 1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살고 싶은 의욕이 날 만큼 행복한가?

이 땅은 과연 ‘공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역사에서 백년은 그리 길지도 않고 그리 먼 얘기도 아니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보다

 

한국근대사에서의 결함을 논의할 때면

으레 쇄국과 이를 뿌리로 하는 천주교 박해 또는 중국 위주의 사대주의를 내세우면서

한국사의 후진성을 들먹인다. 한국인은 과연 외국인에 대하여 늘 기피를 하였을까,

아니면 친근감을 가졌을까를 묻는 처음의 논의로 돌아가 본다면,

한국인은 외국인에 대하여 적대적이지도 않았고 폐쇄적이지도 않았다.

때로 서구 열강에 대하여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 적은 있으나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친근한 민족이었다는 것이 서구인들의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그런데 역사는 그렇게 씌어져 있지 않다. 한국인의 모습은 완매(頑昧)하고 수구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러한 곡해가 생긴 것은 일부 백색우월주의자들의 기록과 한국의 멸망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한국인의 결함을 과장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 식민사학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비춰볼 ‘거울’이 필요하다.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살아온 뒷모습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공자가 말했듯이

“지난날을 돌아봄으로써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曰 告諸往 而知來者: 「論語」 學而篇 )

한말 외국인들의 기록은 우리에게 그러한 거울의 역할을 해주는 자료들이다.      


- 신복룡, 건국대학교 정외과 석좌 교수  
- 사진제공 ·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국가기록원

- 2010-10-14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