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정문부, 왕자를 팔아넘긴 국경인을 진압

Gijuzzang Dream 2010. 11. 12. 01:47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팔아넘긴 국경인과 그를 진압한 정문부

 

 

 

 

 

 

 

 

 

 

 

 

 

 

 

 

 

 

 

 

정문부 장군의 초상.

장군의 호는 농포(農圃), 시호는 충의(忠毅)다.

1588년(선조 21)생원이 되고 문과에 급제,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1592년 회령의 국경인 등이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 등을

일본군에 넘겨주자 의병대장이 되어 반역자들을 죽이고,

이어 길주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격파하는

북관대첩을 거두었다. [사진=문화재청 홈페이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겪은 이후 많은 한국인은 ‘매국노’ 하면 이완용을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매국노’의 상징처럼 지목되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국경인(鞠景仁)이다.

그는 도대체 어떤 행적을 보였던 인물일까.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이 빠르게 북상해 오자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파천하기로 결정한다.

4월 29일 파천하기 직전, 선조는 장남 임해군(臨海君)과 5남 순화군(順和君)에게 함경도로 가라고 지시했다.

태조 이성계 선조들의 근거지이자 왕업의 발상지였던 함경도로 왕자들을 보냄으로써

지역의 민심을 다독이고 의병을 규합해 전란을 극복하는 데 보탬이 되게 하려는 조처였다.

그런데 두 왕자는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는커녕

7월 23일 회령(會寧)에서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포로가 되는 과정이 충격적이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일본군에 직접 붙잡힌 것이 아니라

당시 회령에 귀양 와 있던 전주 출신의 아전 국경인에게 포박돼 가토에게 넘겨졌던 것이다.

국경인은 반란을 일으킨 뒤 회령의 객사(客舍)를 습격해

두 왕자 부부와 그들의 외척들, 수행했던 신료들을 모두 결박해 가토에게 넘겨주었다.

국경인은 왜 이렇게 엄청난 반역 행위를 저질렀을까.

『조야첨재(朝野僉載)』를 비롯한 사료들은 두 가지 입장에서 그 배경을 서술하고 있다.

먼저 “평소 간악했던 데다 전주에서 회령까지 유배된 것에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라며

국경인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입장이다.

또 하나는 “가토가 이끄는 일본군이 함경도로 진입하자 주민 대다수가 반란을 꾀하게 되었다”고 해서

지역의 분위기가 이미 반정부적으로 돌아선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어느 분석이 맞든 이 사건을 계기로 중앙의 위정자들은 함경도를 비딱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교화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여차하면 반기를 들지도 모르는 위험한 지역’이라는 인식이

조선 후기 내내 이어졌다.

하지만 『선조수정실록』 『용사일록(龍蛇日錄)』 『재조번방지(再朝藩邦志)』등에는

국경인의 ‘반역’ 동기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내용이 실려 있다.

 

“임해군과 순화군이 함경도로 들어가 회령에 머물며

사나운 노복들을 풀어 백성들을 침학하고 수령들을 핍박해 인심을 크게 잃었다”거나

“순화군의 장인 황정욱(黃廷彧)이 궁노(宮奴)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

가는 곳마다 침탈하고 소란을 피워 인심을 잃고 반란을 재촉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임진왜란 때 정문부의 대첩 사실을 기록한 북관대첩비.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이 강탈해 간 뒤

도쿄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구석에 방치돼 있었다.

오랜 교섭 끝에 2005년 10월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2006년 북한에 전해져

함경북도의 원래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사진=문화재청 홈페이지]

 

 

왕자와 외척의 신분으로 평소 서울의 저택에서 호의호식하다 전쟁을 만나 갑자기 피란길에 올랐으니

그들이 느꼈던 낭패감이 오죽했을까.

더욱이 함경도, 그 가운데서도 회령은 조선에서 가장 궁벽한 오지가 아니던가.

식사나 잠자리가 성에 차지 않았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 두 왕자의 외척들은 지역 수령이나 백성들을 닦달했고,

그들의 접대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궁노들을 동원해 매질을 자행했다.

이들이 끼치는 민폐 때문에 결국 민심이 돌아서고 국경인 같은 인물의 선동이 백성들에게 먹혀들었다.

반역자로 돌아선 것은 백성들만이 아니었다.

호수(豪首)라 불리던 지역의 유력자와 토병(土兵)은 물론 지방 수령도 포함돼 있었다.

일부 수령 중에는 일본군에게 항복을 결심하면서 작성한 맹세문에서

“나를 위무해 주면 임금이며 나를 학대하면 원수이니,

누구를 부린들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랴”라며

노골적으로 가토 기요마사에게 아첨하는 자도 나타났다.

함경도 지역의 이 같은 분위기를 바꾸고 국경인 등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이 정문부(1565~1624)였다.

애초 함경도의 수령이나 장수들 대부분이 일본군이나 지역의 반란군에 의해 체포되었던 상황에서

북평사(北評事) 정문부 또한 붙잡혀 빠져나오기 힘든 상태였다.

그런데 『선조실록』에 따르면

‘정문부는 평소 무장으로 있으면서 형장(刑杖)을 사용하지 않고

지역의 교생(校生)들에게 글을 가르쳤기 때문에 제자들의 비호를 받아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민심을 얻었던 것이다.

정문부는 1592년 9월 의병장으로 추대되었고 3000여 명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정문부는 일본군과 싸우기에 앞서 국경인의 숙부 국세필(鞠世弼)을 비롯한 13명의 반역자를 처단했다.

우두머리 급은 제거했지만, 일반 반민(叛民)들이 저질렀던 죄는 불문에 부쳐 민심을 얻었다.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국세필 등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회령 유생 신세준(申世俊) 등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인을 제거했다.

정문부는 의병을 이끌고 명천(明川)을 수복한 뒤 길주(吉州)에 웅거하고 있던 일본군을 포위했다.

정문부의 의병이 땔감 공급로 등을 차단하며 압박을 가하자

가토는 마침내 길주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유명한 북관대첩(北關大捷)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민심을 자극하면 백성들은 반역자가 되기도 하지만 민심을 다독이면 의병이 된다.

국경인과 정문부의 행적을 돌아보면서 민심의 무서움을 새삼 절감한다.

- 한명기 명지대 교수 · 한국사

- 2010.11.10-11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