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의 올곧은 기상
조선 중기의 뛰어난 학자이자 교육자였던
남명 조식의 영정 사진.
경(敬)과 의(義)를 함양하고 실천할 것을 강조했던
그의 학풍과 교육관은 16세기 조선에서
아주 이채롭고도 소중한 것이었다.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제공]
“전하의 국사(國事)는 이미 글러먹었고 나라의 기반은 이미 무너졌으며,
하늘의 뜻은 이미 떠나고 백성들의 마음도 이미 멀어졌습니다…
말단 관리들은 아래에서 시시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고관들은 위에서 어물거리며 뇌물을 챙겨 늘리는 데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궁궐의 신하들은 당파를 심어 안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지방의 관리들은 백성들을 착취해 밖에서 이리처럼 날뛰니
살갗이 닳아버리면 터럭이 붙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자전(慈殿)은 생각이 깊지만 구중궁궐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나이 어린 일개 고아일 뿐입니다.
천재(天災)가 수없이 일어나고 민심이 끝없이 갈라진 것을
무엇으로 감당하고 무엇으로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1555년(명종 10) 11월, 경상도 단성현감(丹城縣監) 조식(1501~1572)이 올린 상소의 내용이다.
나라 정치가 엉망이라 백성들의 고혈이 다 빨려버린 현실에 대한 추궁이 신랄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당시 실권자였던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를 ‘궁중의 일개 과부’로,
국왕 명종을 ‘일개 고아’라고 지칭한 점이다.
국정을 농단하고 있던 문정왕후와 왕후에게 휘둘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명종에게
그야말로 직격탄을 날린 셈이다.
상소를 읽은 명종은 진노했다.
그는 조식이 자신과 문정왕후를 비판하는 불경을 저질렀음에도
승정원에서 상소문을 그대로 올려 보낸 것을 문제 삼았다.
이어 “임금을 공경하지 않은 죄를 다스리고 싶지만 ‘숨어 있는 처사(處士)’이므로 불문에 부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의 부덕(不德)을 헤아리지 못하고
대현(大賢)을 조그만 고을의 수령으로 삼으려 한 것이 부끄럽다”며 비아냥거렸다.
명종이 조식을 단성현감에 임명한 것은 1555년 10월 11일이었다.
명종은 그전에도 처사 조식의 명성을 듣고 벼슬을 주겠다고 여러 차례 불렀었다.
하지만 조식은 좀처럼 응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조식은 단성현감에 임명된 지 한 달여 만에 사표를 내던지며 자신과 모친을 통박했다.
벼슬하지 않겠다는 처사를 자신이 먼저 불렀으니 처벌할 수는 없고,
궁벽한 시골의 선비에게 모욕을 당한 분은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명종은 ‘조식이 미관말직이 마음에 들지 않아 투정을 부린 것’ 쯤으로 자위하고 싶었을 것이다.
남명(南冥) 조식이 ‘희망이 없다’고 진단을 내렸던 명종대(1545~1567)는 어떤 시대였던가.
한마디로 척신정치(戚臣政治)가 판을 치던 때였다.
명종이 열두 살에 즉위하자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전권을 휘둘렀고,
그 와중에 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의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산천재(山天齋).
남명 조식이 61세 이후 작고할 때까지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서북쪽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위치에 자리 잡았다. 국가문화재 사적 305호.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제공]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이후 윤원형뿐 아니라
이량(李樑) · 심강(沈鋼) · 심통원(沈通源) 등 외척들이 권력을 휘둘렀다.
이들은 모두 문정왕후나 명종 비 심씨의 인척이었다.
인사권을 거머쥐고 입맛에 맞는 인물들을 요직에 앉혔다.
다른 사람의 땅을 빼앗는가 하면 백성들을 동원해 서해안의 갯벌을 메워 농장을 만들었다.
거상들과 연결하여 북경에서 비단을 수입해 폭리를 취했다. 권력형 비리가 만연했다.
척신들이 발탁한 수령들 밑에서 백성들의 신음 소리는 깊어갔다.
1559년 양주의 백정 임꺽정이 탐관오리들을 죽이겠다고 들고일어난 것은 다 까닭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남명이 상소를 올린 그 해,
왜구의 선단 60여 척이 전라도의 영암 · 장흥 · 진도 등지를 유린했던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조선은 안팎으로 붕괴 직전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김해와 산청 등지에 머물며 학문을 닦고 제자를 키웠던 남명은 고고한 선비였다.
하지만 단순히 현실을 냉소하거나 외면하는 서생이 아니었다.
자신을 들러리로 세우려는 조정의 부름에는 응하지 않았지만
척신들의 부정과 비리 때문에 백성과 나라가 위기에 처한 현실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지리산처럼 장중하게 앉아 스스로를 닦고 내공을 키우면서 때로는 국왕과 권력자들에게 직언을 퍼부었다.
남명은 성리학은 물론 노장과 불교를 섭렵하고 천문 · 지리 · 수학 · 의학 · 병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가 경(敬)과 의(義)를 함양하고 실천을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남명은 평소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과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칼을 차고 다녔다.
칼에는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여덟 글자를 새겼다.
선비가 칼을 찬다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지만
“안으로 밝히는 것이 경이요, 밖으로 결단하는 것이 의”라는 구절 속에는
자신이 터득한 도를 실천으로 옮기려는 그의 결기가 녹아 있다.
‘경’을 통해 마음을 확고히 다졌으니 어떤 일이 닥쳐도 ‘의’를 행하는 데 두려울 것이 없다.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이어졌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곽재우 · 김면 · 정인홍 등 그의 문인들이
잇따라 의병을 일으켜 적과 맞섰다.
남명의 장중한 가르침은 위기에서 더욱 빛을 발했던 것이다.
집권당의 다음번 집권 가도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화제다.
여론의 추이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남명처럼 올곧은 인사를 과감히 수용하고,
듣기에 거슬리더라도 곧고 쓴소리를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길은 저절로 열리지 않을까?
- 한명기 명지대 교수 · 한국사
- 2010.11.03-0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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