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기녀를 둘러싼 홍순언과 석성의 기묘한 인연
석성(石星)의 초상화.
그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로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빌미가 되어
강화 실패의 책임을 지고 처형되는 비운을 겪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홍순언(1530∼1598)은 역관(譯官)이었다.
서얼 출신인 그는 수시로 북경을 왕래하면서 명과의 외교적 현안들을 해결했다.
태조 이성계를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잘못 기록한 『대명회전(大明會典)』의 내용을
바로잡는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
임진왜란 직후 명의 원군을 불러오는 과업을 해결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런데 홍순언과 명의 고위 신료였던 석성(石星)의 인연이 흥미롭다.
언젠가 홍순언은 북경에 갈 때 통주(通州) 부근의 유곽에 들러 미모의 기녀를 불렀다.
기녀는 홍순언에게 화대로 은 천 냥을 요구한다. 홍순언이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부른 까닭을 묻자
그녀는 “죽은 부모의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몸을 파는 것”이라 답한다.
다른 기록에는 “장물죄로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부친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쓰여 있다.
홍순언은 기녀를 측은히 여겨 공금을 털어 주고 유곽을 그냥 나온다.
귀국 후 홍순언은 공금횡령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1584년(선조 17) 종계변무를 위한 사절단의 역관으로 북경에 다시 간다.
100년 이상을 끌어왔던 종계변무 문제는 예부시랑 석성의 적극적인 주선과 협조로 술술 풀렸다.
그 배경에는 홍순언이 대속(代贖)해준 기녀가 석성의 총희(寵姬)가 되었던 사연이 있었다.
홍순언의 은혜를 잊지 못했던 그녀는 석성을 움직였고,
홍순언이 귀국할 때 ‘보은단(報恩緞)’이란 글자를 수놓은 비단을 선물한다.
그녀의 ‘보은’은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더욱 빛을 발한다.
당시 조선이 명에 원군을 요청했을 때 명 조정의 대다수 신료들은 시큰둥했다.
“오랑캐끼리의 싸움에 대국이 끼어들 필요가 없으니 일단 관망하자”는 의견이 대세였다.
병부상서였던 석성은 달랐다.
“조선은 대대로 충성을 바친 번국(藩國)인데 일본의 손아귀에 떨어지면 명이 위험해진다”며
파병할 것을 강조했다. 현직 ‘국방부 장관’의 주장은 황제를 움직였다.
그 배후에 홍순언에게 은혜를 입은 총희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석성은 조선에 명군을 파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일본군을 몰아낼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는 일본군과의 결전 대신 강화 협상을 선택한다.
하지만 측근 심유경에게 속아 강화가 파탄 나고 일본군이 다시 침략하자
석성은 책임을 뒤집어쓰고 처형되고 만다.
반면 홍순언은 공신이 되고 그가 살던 동네는 ‘보은단동’이라 불리게 된다.
한 여인을 매개로 엄청난 ‘인연’을 맺었던 홍순언과 석성.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 한명기 명지대 교수 · 한국사
- 2010.10.20-2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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