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의 구사일생 고국 귀환, 그리고 안타까운 죽음
1487년(성종 18) 11월 교리 최부(崔溥 · 1454~1504)는
삼읍추쇄경차관(三邑推刷敬差官)이란 직함을 갖고 제주도에 도착한다.
육지에서 제주도로 도망쳐 들어간 죄인들을 색출하고 노비와 목장 행정을 살피라고 파견된 특별 어사였다.
그런데 이듬해 1월 30일 최부는 나주에서 달려온 집안 노비로부터 부친의 부음을 듣는다.
상복으로 갈아입고 황망히 귀향을 서두르는 그를 제주의 지인들은 만류했다.
한라산에 구름이 끼고 날씨가 고르지 못하면 큰 바람이 일어날 우려가 있다며 배를 타지 말라고 말렸다.
하지만 윤1월 3일, 최부는 나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런데 추자도 부근까지 왔을 때 배는 역풍에 휘말려 거꾸로 떠내려가고 만다.
대양에서 표류하기를 열흘 남짓, 최부와 일행 마흔세 명은 말린 쌀을 씹고,
오줌과 빗물을 받아 마시며 악전고투를 벌인다.
12일 명나라 영파(寧波) 근처의 하산(下山)이라는 곳에 표착한다.
그곳은 해적들의 소굴이었다. 해적 두목은 최부에게 금은을 내놓으라며 작두로 목을 베려고 덤빈다.
최부의 부하들이 빌면서 애원하자 그들은 의복과 식량 등을 빼앗은 뒤 배의 노와 닻을 끊어 버리고 사라진다.
17일 우두(牛頭)라는 해안에 이르렀을 때 두 번째 위기가 찾아온다.
그곳을 지키던 사자채(獅子寨)의 명 관원들은
최부 일행을 왜구(倭寇)로 확신하고 목을 베어 공을 세우려고 덤빈다.
최부의 부하들은 최부에게 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으라고 간청한다.
사모관대를 갖추면 조선의 관원임을 인정받아 왜구 혐의를 벗고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상복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는 것은 효의 도리에 어긋난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효도와 신의가 아닌 일은 차마 할 수 없다”고 버텼다.
부하들이 “목숨을 건진 뒤에야 의리도 지킬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항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최부 일행은 결국 그들을 죽이려는 명군을 피해 내륙의 마을로 도주한다.
1488년 명나라 영파 해안에 표류해 귀환한 뒤 『표해록』을 남겨 유명한 최부와 그의 조상 최사전, 최부의 외손인 유희춘을 모시고 있는 무양서원(武陽書院).
세 사람 외에 병자호란 직전 절의를 지킨 나덕헌도 모시고 있다.
무양서원은 1927년 탐진 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 세운 서원으로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에 있다. [사진=문화재청 홈페이지]
굶주림과 공포에 지친 최부 일행은 윤1월 21일 무렵에야 비로소 조선 사람임을 인정받고
왜구라는 오해가 풀렸다. 이후 영파부의 관원은 최부 일행을 북경으로 보낸다.
영파에서 항주(杭州) · 가흥(嘉興) · 소주(蘇州) · 진강(鎭江) · 양주(揚州) · 제녕(濟寧) · 임청(臨淸)을 거치는
수천리 길이었다. 각 지방을 지날 때마다 최부는 심문을 받았다.
그는 그래도 상복을 벗지 않았고 고기와 생선 · 젓갈 등은 입에 대지 않았다.
부친상을 당한 상주로서 몸가짐을 흐트러뜨릴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쌍돛을 단 조선시대 바닷배 그림(위쪽).
최부 일행이 표류할 당시 타고 있었던 배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1488년 중국의 영파 지방에 표류해 강남을 거쳐 귀환했던 최부는 ‘조선의 로빈슨 크루소’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드라마틱하고 다채로운 행적을 남겼다.
아래 사진은 구한말 촬영된 한선(韓船).
[출처 : 김재근 『한국의 배』, 1994]
중국인들의 의심이 가까스로 풀리면서 최부 일행에 대한 대접은 달라졌다.
최부는 이제 표류자·도망자의 처지에서 강남을 유람하는 여행자이자 관찰자로 입장이 바뀌었다.
당시 북경에 갔던 조선 사신들은 강남으로 내려갈 수 없었기 때문에 최부의 경험은 아주 특별한 셈이었다.
최부는 북경으로 가는 도중 곳곳에서 명의 지식인들과 필담을 나누었다.
1488년 2월 17일, 최부는 소주(蘇州)에서 아주 득의양양한 체험을 한다.
각각 왕씨(王氏)와 송씨(宋氏) 성을 가진 안찰어사(按察御史)와 필담을 나누는데, 두 사람은 최부에게 대뜸
“당신네 나라에 무슨 장기가 있어서 수(隋) · 당(唐)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는가”라고 물었다.
최부는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들이 있었고 병졸들이 모두 윗사람을 위해 죽으려 했기에
고구려 같은 작은 나라가 천하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쳤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지금은 신라 · 백제 · 고구려가 한 나라가 되어 물산과 재물은 넉넉하고 군사는 강하며,
충성스럽고 지모 있는 선비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당시 중국 강남의 지식인들이 고구려를 조선과 동일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최부는 여행 도중 목도했던 명의 문물들 또한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소흥(紹興)에서 수차(水車)를 사용하는 것을 발견한 뒤 그 제작과 사용 방법을 꼼꼼히 물어 챙겼다.
그것을 배워다가 가뭄에 시달리던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깜냥이었다.
4월 19일 북경에서 황제에게 절을 올릴 때 최부는 결국 고집을 꺾어야 했다.
그는 당시에도 상복을 벗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명 관원의 힐책을 이기지는 못했다.
관원은 강제로 그의 상관(喪冠)을 벗기고 사모(紗帽)를 씌웠다.
최부는 황제를 알현한 뒤 일행과 함께 산해관 · 요동을 거쳐 6월 4일 마침내 압록강을 건넜다.
표류한 지 5개월 만이었다. 최부는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표류하면서 한 번, 해적의 작두에 또 한 번, 명 관헌의 칼에 다시 한 번. 절체절명의 순간만 세 번이었다.
하지만 운명이었을까?
이 자존심 강한 선비는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서 파당을 만들었다는 혐의로 단천(端川)으로 유배된다.
그리고 1504년 갑자사화 때는 사형에 처해진다. 표류에서 살아 돌아온 지 16년 만이었다.
뒷날 남구만(南九萬)은 이렇게 읊는다.
“청류의 화를 면치 못할 줄 일찍 알았던들/ 물고기 뱃속에 몸 감추는 것이 더 편안했으리.”
- 한명기 명지대 교수 · 한국사
- 2010.10.20-2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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