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일행이 난파선에서 내려 상륙하는 장면. 하멜 일행은 애초 대만에서 일본의 나가사키를 향해 가는 길이었다. 이 장면은 하멜이 조선 탈출 이후에 썼던 『조선유수기』에 실려 있다. |
제주목사에게 “목적지인 일본의 나가사키로 보내달라” 호소했다. 이윽고 10월 29일,
그들은 붉은 수염을 가진 중년의 사내와 조우한다.
얀센 벨테브레. 그 또한 네덜란드 출신의 ‘오랑캐’였다.
1627년(인조 5), 일본으로 항해 도중 물을 구하려 잠시 상륙했다가 26년째 붙잡혀 있던 억세게 운 없는 인물이었다.
이름도 아예 박연(朴燕, 朴淵)으로 고쳤던 그는
하멜 일행의 ‘사연’을 조사하기 위해 서울에서 파견돼 왔다.
뜻밖에 동포를 만난 기쁨도 잠시,
하멜 일행은 박연의 더듬거리는 화란어를 듣고는 절망에 빠진다.
“이 나라는 일단 들어온 외국인은 절대로 내보내지 않는다.”
결국 서울로 압송된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에 배속된다.
화포를 잘 다루는 재주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1655년 3월,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청나라 사신 행렬 앞으로 두 사람이 뛰어든다.
조선 조정을 압박해 자신들을 나가사키로 보내달라고 시위를 벌였다.
청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조정은 두 사람을 투옥하고 남은 자들을 전원 전라도로 귀양 보냈다.
청 사신들과의 조우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조처였다.
하멜 일행은 이후 11년 이상 전라도 각지에 억류됐다.
그 세월 동안 멍석을 짜고, 진흙을 이기고, 잡초를 뽑는 등의 노역을 해야만 했다.
항해술 등에 밝고 화기도 잘 다루던 일급 기술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생활이 고달파질수록 탈출 의지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1666년(현종 7) 9월, 하멜 일행 여덟 명은 몰래 마련한 배를 타고 조선을 탈출한다.
조선은 과연 이 진객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던 것일까.
하멜 일행보다 53년 빠른 1600년, 네덜란드 선박 리프데호가 일본의 분고(豊後) 앞 바다에 표착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배의 1등 항해사였던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를 외교 고문으로 임명하고
영지와 노비를 후하게 하사한다.
감격한 애덤스는 일본에 귀화해 이름도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으로 바꾼다.
그는 서양 정세를 자문하는 것은 물론, 무역선을 이끌고 각지를 다니며
1609년 일본과 네덜란드가 국교를 맺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얼마 후 히라토(平戶)와 나가사키에 설치된 네덜란드의 상관은
일본이 서양 문물을 수용하고 서양에 대한 ‘면역력’을 키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청을 의식해 하멜 일행을 숨기기에 급급했던 조선과
윌리엄 애덤스의 효용성을 한눈에 알아봤던 일본을 비교할 때마다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한명기 명지대 교수 ·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