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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김상용, 비흡연으로 명예회복한 병자호란 충신

Gijuzzang Dream 2010. 11. 12. 00:45

 

 

 

 

 

 

 

 

비흡연으로 명예회복한 병자호란 충신 김상용

 

 

 

 

조선시대의 재떨이와 담뱃대(장죽 · 사진 위). 담배와 흡연 문화가 확산되면서 재떨이와 담뱃대(장죽)도 조선 중기 이후 사랑방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재떨이는 본래 목제가 주종을 이뤘는데 때로는 가죽, 도자기 등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담뱃대는 길이가 긴 것은 장죽, 짧은 것은 곰방대라고 불렀다.

사진에 보이는 세 개의 침은 헤비(아래)로서 담뱃대의 막힌 구멍을 뚫는 데 사용됐다.(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소장)

 

병자호란 직후인 1637년 11월, 조정에서는 문제가 불거졌다.

강화도가 함락될 당시 순절(殉節)했던 김상용(金尙容)의 사인을 둘러싼 논란이었다.

 

청군이 강화성을 포위하자 김상용은 남문에 올라가 화약에 불을 붙여 자결했다. 그런데 엉뚱한 소문이 돌았다.

“김상용은 절의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담뱃불을 붙이려다 실수로 화약에 불이 옮겨 붙어 폭사했다”는 것이다.

 

인조는 소문을 반신반의하여 김상용의 순절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김상용의 아들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부친이 평소 흡연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순절 순간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 억울함을 항변했다.

그들은 특히 김상용이 사위 장유(張維)가 흡연하는 것을 면전에서 질책할 만큼 흡연을 혐오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다른 신료들도 이들의 호소에 동조하면서 인조는 비로소 의심을 풀었다.

 

흡연 여부가 김상용의 명예를 좌우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장유(張維)가 애연가이자 담배 예찬론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담배의 효능을 칭송하는 글’에서

“배고플 땐 배부르게 하고 배부를 땐 배고프게 하며,

추울 땐 따뜻하게 하고 더울 땐 서늘하게 한다”며

담배를 찬양했다. 또 담배가 약재로서도 탁월하다며

장차 차와 더불어 기호품의 수위를 다투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자신의 흡연을 나무랐던 장인 김상용의 질책은 질책이고

애연 기호 자체를 숨길 수는 없었던 셈이다.

'남초(南草)'라 불렸던 담배가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직후였다.

이후 흡연 풍습은 급속히 퍼져 인조대에는 남녀노소를 떠나

전 계층이 담배를 피운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흡연의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정신과 기를 상하게 하는 건강상의 폐해뿐 아니라

화재를 부르고 시간과 재물을 허비하게 한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안정복(安鼎福)은 특히 흡연과 관련된 풍기 문제를 거론했다.

그는 ‘흡연하려 할 때 길 가는 사람에게 달라고 하면서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부녀자에게 달라고 하면서도 스스럼이 없는 것, 노비에게 달라고 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그러면서 남초를 가리켜 ‘요망한 풀’이라고 했다.

담뱃값을 대폭 올려 흡연을 억제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값을 올린다고 청소년 등의 흡연이 줄어들까.

올라버린 담뱃값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요망초’로 매도하거나 값을 올린다고 해서 습관으로 굳어진 기호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 한명기 명지대 교수 · 한국사

- 2010.10.09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