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만에 탈출한 포로 안단, 조선은 도로 청에 돌려보냈다
현재의 봉황성. 봉황성은 명·청 시대 단둥(丹東)에서 랴오양(遼陽)·선양(瀋陽)으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청 시절에는 봉황성 장군이 주차하면서 조선과의 교섭을 담당했던 곳이다. 안단은 천신만고 끝에 탈출, 귀국했지만 의주에서 붙잡혀 도로 이곳으로 압송되었다. |
병자호란이 남긴 상처 가운데 가장 처참했던 것이 포로 문제였다.
인조와 조선 조정이 남한산성에 갇혀 있는 동안 서울과 경기도 주변에서는 ‘인간사냥’이 무차별적으로 자행되었다.
최대 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청군에 사로잡혔다.
청의 포로에 대한 집착은 유별났다.
그들은 포로를 ‘목숨을 걸고 획득한 정당한 성과’로 여겼다.
1637년 1월, 청 태종은 포로들을 심양(瀋陽 · 선양)으로 끌고 가기 직전 인조에게 다짐을 받아낸다.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청나라 땅을 밟은 뒤 조선으로 도망쳐 오는 포로는
그대가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같은 해 4월 이후 청을 탈출해 오는 포로들이 줄을 이었다.
낮에는 산속에 숨었다가 밤에 주로 움직였다.
감시와 체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천신만고 끝에 압록강변까지 왔을 때 그들은 실망했다.
청의 감시를 의식한 지방관들이 도강(渡江)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국을 거부당한 포로들은 강 상류로 올라간다.
수심이 얕고 감시가 덜한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중에 굶주려 쓰러지고, 맹수에게 희생되고, 끝내는 절망해 목을 매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압록강 상류 지역에 백골이 즐비하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있었다.
보다 못한 조정은 청 측에 몸값을 치르고 포로를 데려오는 속환(贖還) 작업을 본격화한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몸값이 은 수십 냥에 이를 정도로 비쌌기 때문이다.
왕실과 고관들, 부유한 집안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일부 고관이나 부유층들은 자기 혈육을 우선 송환하려는 욕심에
협정가보다 훨씬 많은 은을 싸 들고 심양으로 갔다. 자연히 몸값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세월은 흐르고 수많은 포로들이 이역에서 죽거나 잊혀져 갔다.
1675년(숙종 1), 안단(安端)이란 사람이 탈출해 왔다. 38년 만의 귀환이었다.
애초 심양으로 잡혀가 청인의 종이 되고 끝내는 북경(北京 · 베이징)까지 흘러들었던 기구한 인생이었다.
1674년 주인이 실종되자 탈출을 감행했다.
산해관을 통과하고 만주 벌판을 가로지르며 수많은 사선을 넘었다.
하지만 의주까지 왔을 때 의주부윤은 그를 묶어 봉황성(鳳凰城)으로 보내 버린다.
청의 힐책을 의식한 조처였다.
끌려가던 안단은 “고국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간절한데 왜 나를 죽을 곳으로 보내느냐”며 절규한다.
이후 그의 소식은 끊긴다.
60년 만에 탈북에 성공한 국군 포로가 중국에 있다고 한다.
여든넷의 고령인 그의 편지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고향이 그리워 60년을 흐느껴 울며 살았다”는 그의 슬픔은 안단과 너무 닮았다.
그의 귀환 열망을 실현시켜 주어야 한다.
- 한명기 명지대 교수 · 한국사
- 2010.09.3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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