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남이흥장군, 사찰 때문에 군사훈련조차 못해 참패

Gijuzzang Dream 2010. 11. 11. 23:59

 

 

 

 

 

 

 

 사찰 때문에 군사훈련조차 못해 참패한 남이흥 장군

 

 

 

 

 

 

정묘호란 당시 안주성에서 장렬히 전사했던 평안도 병마절도사 남이흥 장군의 영정(의령 남씨 충장공파 대종중 소장).

1627년(인조 5) 1월 21일 새벽, 청천강을 건넌 후금 군대는

안주성(安州城)을 공격했다.

호각을 불며 북을 치고 깃발을 휘두르며

철기(鐵騎)라 불리는 수만의 기병이 밀려들었다.

성을 지키던 조선군은 대포와 화살을 일제히 발사했다.

쓰러지는 적병도 많았지만 돌격은 멈추지 않았다.

후금군은 사다리를 타고 순식간에 성벽을 기어올랐다.

가공할 속도였다. 후금군이 입성하면서 승부는 결정되었다.

조선군은 그들의 창검에 속절없이 도륙되었다.

당시 안주성의 지휘관은

평안병사 남이흥(南以興)과 안주목사 김준(金俊)이었다.

두 사람은 영루(營樓)에 기대어 목이 터져라 싸움을 독려했지만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후금군이 포위해 오자 두 사람은 화약 주머니에 불을 붙여

자폭한다. 장렬한 죽음이었다.

그런데 폭사하기 직전, 남이흥이 남긴 유언이 폐부를 찌른다.

“내가 지휘관이 되어

한 번도 습진(習陣)을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애통하다.”

습진(習陣)이란 진을 치는 훈련을 말한다.

최전방 군사 지휘관이었던 남이흥은 어찌하여 습진을 한 번도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당시 횡행하던 기찰(譏察) 때문이었다. 기찰이란 오늘날로 치면 감시와 사찰(査察)을 가리킨다.


 

1623년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던 인조 정권은 집권 이후에도 전전긍긍했다.

광해군 추종 세력에 의해 ‘반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반정을 주도했던 공신들은 곳곳에 밀정들을 풀어놓았다.

과거 광해군 정권에서 벼슬을 했던 사람들과 그 주변 인물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자연히 밀고가 성행하고 그에 따른 옥사(獄事)가 빈발했다. 그런데 정작 적은 내부에 있었다.

반정 당시 공을 세웠던 이괄(李适)이 1624년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이괄의 반란군은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하고 인조는 공주로 피신했다.

남이흥은 당시 서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괄의 난’ 이후 공신들은 기찰을 한층 강화했다.

어렵사리 되찾은 정권을 지켜야 한다는 초조감 때문이었다.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평안도로 나가 있던 남이흥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수시로 찾아와 꼬치꼬치 캐묻는 정보원들 때문에 진 치는 훈련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훈련이 안 된 병력을 이끌고 철기의 공격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겠는가.

정권을 지키기 위한 기찰 때문에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사찰은 예나 지금이나 불신 풍조를 낳고 사회와 국가의 활력을 갉아먹는다.

며칠 전까지 집권당 내부에서 ‘사찰’ 운운하는 논란이 빚어졌던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한명기 명지대 교수 · 한국사

- 2010.09.08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