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낳은 사연 … ‘동래 할미’의 기막힌 한평생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이 일본군에 의해 포위된 모습을 담은 ‘동래부순절도’. 동래 할미도 성이 함락 되면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육군박물관 소장) |
이름 모를 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원래 동래(東萊)의 창기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그녀는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삼십대의 나이였다.
그녀는 십여 년 동안 일본에 억류됐다.
1606년 두 나라의 강화협상이 진척되면서 그녀는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귀환의 기쁨도 잠시, 그녀는 다시 슬픔에 잠긴다.
전쟁 중에 헤어진 어머니 때문이었다.
고향 사람들은 그녀의 어머니도 일본으로 잡혀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모녀는 십여 년 동안 일본에 있으면서 서로의 생사를 몰랐던 셈이다.
그녀는 친지들에게 이별을 고했다.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며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다. 일본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머니를 찾기 위해 구걸하며 전국 각지를 떠돌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마침내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이미 일흔이 넘었지만 아직 정정했다.
모녀의 상봉 소식에 일본인들도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모녀의 소문은 곧 일본 각지로 퍼져 나갔고 쇼군(將軍)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쇼군은 모녀를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모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그녀는 언니와 함께 늙은 어머니를 업고 경상우도의 곳곳을 떠돌았다.
함안의 방목리(放牧里)란 곳에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녀가 기댈 사람은 언니밖에 없었다.
자매는 품팔이를 해서 생계를 꾸렸다. 그녀는 먹을 것이나 옷가지가 생기면 먼저 언니를 챙겼다.
이러구러 세월은 흘렀고 그녀는 팔십이 넘어 생을 마감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동래 할미’라고 불렀다.
허목(許穆)의 『기언(記言)』에 실린 ‘동래구(東萊嫗)’라는 글의 내용이다.
허목은 당시 전해지던 이 이야기를 선행(善行)이라는 제목을 붙여 기록했다.
그러면서 “동래 할미가 남자도 감히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을 해서 오랑캐를 감화시켰다”고 찬양했다.
눈물 없이는 읽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서글픈 디아스포라의 사례가 어디 동래 할미뿐이던가.
당장 사할린의 한인들이 떠오른다. 일본은 수많은 한인들을 사할린으로 끌고 가 죽도록 부려먹었다.
그러고는 패전과 함께 그들을 헌신짝처럼 팽개쳤다.
일본 정부의 책임 회피와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 속에서 그들의 귀환 열망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다.
강제로 병합된 지 100년이 된 오늘, 이제는 그들이 흘리는 이산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
최소한 동래 할미 모녀의 상봉 장면에서 함께 눈물을 흘렸던 측은지심을 회복해야 한다.
- 한명기 명지대 교수 · 한국사
- 2010.09.0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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