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초상. 그는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국제정세 속에서도 성공적인 실리외교 정책을 구사했다. |
그는 백성을 사랑했던 성군(聖君)이자 조선왕조의 황금기를 연 현군(賢君)으로 추앙된다.
서울의 대표적 거리를 세종로라 이름 짓고,
얼마 전까지 최고액권이던 1만원짜리 지폐에 그의 초상을 넣고,
최근에는 광화문 광장에 동상과 기념관을 세웠다.
그런데 『세종실록』을 읽다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역대 임금 가운데 세종만큼 중국에 저자세였던 왕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세종은 명의 요구라면 거의 모든 것을 수용했다.
1429년 영락제(永樂帝)의 부음을 들었을 때 상복을 27일 동안이나 입었다.
신하들이 3일만 입어도 된다고 말렸지만
세종은 군신의 의리를 내세워 27일을 고집했다.
조선은 보라매를 공물로 바치라는 명의 요구 때문에 고민했다.
매를 포획하는 것 자체가 힘든 데다
그것을 산 채로 북경까지 가져가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신하들은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해 ‘적당히’ 하자고 건의했지만 세종은 달랐다.
“제후의 처지에서 황제의 명령을 받은 이상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명은 황제국이고 조선은 제후국이었다.
세종은 명을 ‘상국’으로 섬기기로 한 이상 성의를 다해 믿음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핏 보면 굴욕적이라고 할 정도로 명에 고분고분했지만, 세종은 분명 외교에도 달인이었다.
그것은 사군(四郡)과 육진(六鎭)을 개척해
평안도와 함경도를 조선 영토로 확실히 명토 박은 것에서 드러난다.
명은 일찍부터 조선이 압록강과 두만강 부근의 여진족들을 포섭하려 하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명 태조는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협박했다.
조선 건국 무렵 여진족들은 평안도와 함경도 내륙까지 들어와 살고 있었다.
조선의 태조와 태종은 여진족들을 어르며 북으로 밀어내는 정책을 썼다.
명은 격하게 반발했다. 사신을 보내 여진 부락들을 다독이고 조선을 견제했다.
이미 명에 복속한 여진 부족은 건드리지 않되,
조선에 우호적이거나 그들 사이에 내분이 있을 경우 과감하게 끌어들였다.
1437년(세종 19)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여진 지도자 범찰(凡察)은 명의 정통제(正統帝)에게
“조선이 우리를 박해한다”고 호소했다. 정통제의 대답이 흥미롭다.
“조선은 법도를 지켜 사대와 교린을 제대로 하는 나라니 그럴 리가 없다.”
세종의 허허실실(虛虛實實) 정책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천안함 사태 이후 중국과의 외교적 갈등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원칙과 신뢰 속에서 명을 다독이며 국익을 챙겼던 세종의 외교적 수완과 지혜를 곰곰이 되새겨볼 시점이다.
- 한명기, 서울대 국사학과 졸, 동 대학원 박사. 규장각 특별연구원,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 역임.
현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10.09.01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