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조유전의 문화재 다시보기> 화순대곡리 출토 청동 유물

Gijuzzang Dream 2010. 10. 21. 13:22

 

 

 

 

 

 

 

 

 화순 대곡리 출토 청동 유물

 

 

 

땅속에 묻혀있다가 우연히 발견되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는 경우도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전남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에서 무더기로 출토된 청동유물이다.

바로 국보 제143호로 지정된 청동일괄유물로 국립광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총 13점의 청동일괄유물. 왼쪽의 세형동검 2점이 2008년 새롭게 발견된 유물이다.


 

 

청동거울인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 2점, 좁은 청동단검인 세형동검(靑銅劍)3점,

방울 8개를 한 몸체에 만든 청동팔두령(靑銅八頭鈴) 2점,

방울이 대칭으로 2개가 마련된 청동쌍두령(靑銅雙頭鈴) 2점, 작은 청동도끼(靑銅斧) 1점등 모두 11점이다.

 


1971년 12월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문화재연구실(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근무하던 필자는

그 해 마지막 전남지역의 문화재지표 현황조사를 마치고 12월 20일 전남도청 문화공보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 때 이 청동일괄유물이 국립박물관에 보고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청동유물이 많은 데 놀랐던 나는 유물이 입수된 경위가 떠돌이 엿장수가 신고한 것이라는 설명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즉시 문화재관리국에 이 사실을 보고하게 하는 한편

매장문화재 발견신고 절차를 밟게 하고 서울 연구실로 돌아왔다.

워낙 중요한 일괄유물이기 때문에 즉각 현장 조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24일 국립박물관의 윤무병 수석학예관과 함께

김포공항에서 광주공항으로 날아갔다.

 

발견된 곳은 대곡리 구재천(具在天 67세)씨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발견자의 증언을 통해 비가 오면 초가의 지붕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바로 흘러나가지 않아

배수로 작업을 하다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이 유물이 무슨 쇠붙이인가 하고

함께 파낸 돌에 두드려 보기로 했으나 부러지지도 않아 그대로 두었다가

엿장수와 엿 몇 가락과 교환했던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름 모를 떠돌이 엿장수가 뭔가 오랜 유물이라고 생각되어

바로 전남도청 문화공보실에 신고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하루 만에 유물이 출토된 현장을 되파게 해서 무덤의 구조를 확인하고

아울러 바닥에 깔려있는 목판의 일부를 연대측정을 위한 시료로 채취하고

당일로 작업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출토지가 분명하게 확인되었고 무덤의 구조도 밝혀지게 되어 이듬해 3월 바로 국보로 지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발견 37년 후인 2008년 다시 2점의 세형동검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전남도에서 이 일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이 유구의 정식 발굴조사를 국립광주박물관 주관으로 실시하여 찾아낸 것이다.

 

최초 확인 당시 완벽하게 조사하지 못한 결과여서 변명의 여지없이 정말 부끄러운 일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은 발견자인 구재천씨가 보상을 전혀 받지 못한 것이다.

문화재보호법에 매장된 문화재가 발견되면 신고를 통해 전문가의 감정을 받아

그에 상응하는 금전적인 보상을 받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신고기간을 넘겨 발견자나 신고자 모두 한 푼의 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

국보로 지정된 청동일괄유물의 값은 상상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법에는 무지로 인한 잘못은 판결에 있어서 참작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재보호법은 무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 2010/01/20  ⓒ 인터넷한국일보

 

 

 

 

 

 

빛나는 권위의 상징, 청동무기

 

요령식 동검

중국 요령지방에서 주로 발견된다고 하여 ‘요령식 동검’이라고 부르지만,

그 모양이 악기의 일종인 비파를 닮았다고 하여 ‘비파형동검’이라고도 한다.

검몸과 손잡이를 따로 만들어 결합하도록 되어 있어 중국식동검 등과 다른 특징을 보이며

등대에 돌기가 있고 날 부분에 허리패임이 있는 등 한국식동검과 공통적인 특징도 지니고 있어서

한국식동검의 조형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동검은 주로 간돌검, 돌살촉이나 부채모양도끼 등과 공반되는 예가 많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에서 간돌검이나 간돌살촉 등과 함께 출토된다.

 

한국식동검

‘한국식동검’은 요령식 동검을 조형으로 하여 발전된 우리나라 특유의 동검으로

기원전 4세기 이후에 가장 많이 만들어져 세부적인 변화를 보이면서 초기철기시대까지 계속 보인다.

이 동검은 청동거울과 곱은옥 등과 함께 출토되는 예가 많고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투겁창이나 꺾창 등과 함께 일본으로 전파되어

일본의 청동기문하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기원전후한 시기에 중국 한의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막을 내린다.

이 시기의 청동유물로는 한국식동검을 비롯하여

투겁창, 꺾창 등과 같은 무기류와 거울, 각종 방울 등과 같은 의기류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청동무기와 의기를 가진 사람은 당시 종교적 제의 주재자임과 동시에

정치적 권력을 지닌 지배자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한수, 선사고대관 고조선실

- 제242회 큐레이터와의 대화, 2011년 5월4일, 국립중앙박물관

 

 

<劍의 상징성>

마제석검(磨製石劍)은 돌을 갈아 만든 단검(短劍)으로

동북아시아 중에서도 한반도에서 가장 발달하였고

그 영향을 받아 일본열도의 규슈(九州) 지방에서도 출토된다.

석검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는데

중국 동북지방의 요령식동검(遼寧式銅劍)을 모방하였다는 견해가 많다.

이러한 석검을 비교적 규모가 큰 주거지나 일부 무덤에서만 출토되어

마을 내에서도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었다.

길이 40㎝가 넘는 대형품이라든지, 손잡이 부분이 사용하기 불편할 정도로 과장되거나

거기에 무늬가 새겨진 것 등은 어떤 상징적이고 의기(儀器)적인 도구로서

청동기시대의 석검에 단순한 칼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암시해준다.

 

고인돌 상석(上石)에 석검이 새겨진 예도 검이 지닌 함축적인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여수 오림동 유적의 고인돌에는 석검과 사람이 새겨져 있다.

석검은 사람보다 과장되게 칼집과 함께 표현되었고,

검의 왼쪽에는 날 끝과 수평을 이루어 머리, 다리, 팔이 표현된 두 명의 사람이 있다.

검 바로 옆의 사람은 마치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로 검을 향해 두 손을 받들어 올린 자세를 취하고 있어 숭배의 대상인 검 앞에서 무언가를 빌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리를 벌리고 양팔을 허리에 받치고 있으며,

가장 아래쪽에는 사냥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석검과 석촉이 새겨진 영일 인비동 고인돌과 함께 검의 상징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거대한 고인돌은 지배자의 무덤으로서 그가 속한 집단의 막대한 노동력을 동원하여 축조되는 것인데,

그것을 지상에 표시하는 상석에 석검을 새겼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석검이 지닌 의미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 구멍무늬가 새겨진 석검/ 석검 출토모습(진주 대평리)

 

<지배자의 탄생>

 

수렵채집 위주의 사회에 비해 농경사회에서는

개별 가족단위의 활동을 넘어 마을 전체의 단결과 공동노동이 중요해진다.

더불어 생산지의 점유나 잉여물의 분배 등 새로이 시작된 농경사회에 뒤따르는 각종 사안들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인물도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바로 무덤에 부장되는 청동검이나 석검이며,

玉으로 만든 장신구 등도 당시의 사회적 계층이나 권위를 대변하는 물품이라 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는 거대한 무덤의 축조와 더불어 청동검을 비롯한 이른바 ‘위세품(威勢品)’이 부장된다.

마을의 지배자 혹은 우두머리의 죽음과 그에 따른 장송의례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속한 마을 전체의 공동행사였다.

이때 청동검을 비롯한 위세품을 부장하면서 지배층의 권위를 확고히 하는 동시에,

일체감을 높이면서 공동생활이 중시되는 농경사회 내부의 크고 작은 갈등을 완화시켜

마을 전체의 통합을 굳건히 하였다.

 

대규모 마을의 등장과 함께 마을 내부는 물론 마을 간에도 격차가 생기는데,

이때 중심이 되는 마을의 지배자는 주변의 여러 마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로써 일정한 지역권 혹은 넓은 영역을 총괄할 수 있는 지위에 이를 수 있었다.

이것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요령식 동검이나 한국식 동검이라고 부르고 있는 청동검이다.

한국의 청동기문화인 요령식 동검 문화와 한국식 동검 문화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성장하고 발전해 나갔다.

- 배진성, 역사관 특별전시실

- 제198회 큐레이터와의 대화, 2010년 6월23일,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