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와 왕세자빈이 종묘에 행차한 이유는?
조선시대에 종묘(宗廟)는 역대 임금과 왕후의 신위(神位)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던 곳이다.
임금들은 이곳에서 선왕(先王)을 추모하면서 孝를 실천했고
백성에게 효를 이루어 忠을 실천하도록 전파하였다.
그래서 종묘는 조선의 이념과 문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공간이다.
조선의 건국 이후 종묘는 남성의 공간이었다.
여성의 경우 왕후에 한해서 죽은 후 신위만 들어갈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변화가 일어났다.
1696년(숙종 22) 처음으로 숙종비 인현왕후와 세자빈 심씨(경종비 단의왕후)가 종묘에 나아가 절하였다.
세자(경종)가 왕세자빈을 맞이해 종묘에서 ‘묘현의(廟見儀)’를 거행하면서
여성이 종묘에 첫걸음을 하게 된 것이다.
‘묘현의(廟見儀)’란 《주자가례》에 나오는 혼례 절차 중 하나로
‘친영(親迎)’한 후 신부가 사흘 만에 시가(媤家)의 사당에 인사를 올리는 절차를 말한다.
이 묘현의가 그대로 왕실에 적용되어 종묘에 알현하는 의식이 된 것이다.
당시 세자빈의 묘현의가 결정되자 왕비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져
이미 혼인한지 오래된 인현왕후도 묘현의를 거행하였다.
이후 묘현의는 왕실의 혼례의식으로 자리 잡았고,
1703년(숙종 29)에는 종묘와 함께 영녕전에서도 거행되었다.
곧 임금이 종묘에 배알하는 의식을 ‘전배례(展拜禮)’라 하고,
왕후나 왕세자빈이 종묘에 배알하는 의식을 ‘묘현의(廟見儀)’라 표현하였다.
오늘날 장서각에는《육상궁묘현의(毓祥宮廟見儀)(고종연간)》라는 자료가 있는데,
1첩 5장 분량의 한글로 쓰여 있으며,
겉표지는 물론 안쪽도 적홍색에 가까운 고운 빛깔로 물들여져 있어 단박에 여성용임을 알 수 있다.
이 자료에는 임금과 왕후가 육상궁과 냉천정에 거동해 묘현의를 실시하는 의식절차가 간략하게 실려 있다.
총 12단계로 임금과 왕후가 육상궁에 나아가 2번 절한 후에,
냉천정에 나아가 4번 절하는 의식으로 구성되었다.
냉천정은 육상궁에 있던 건물로 역대 어진들이 봉안되어 있었다.
왕비와 왕세자빈이 종묘에 알현하는 의식절차는
《국조속오례의(1744)》에 정리될 만큼 국가전례가 되었다.
王妃謁宗廟永寧殿儀, 王世子嬪謁宗廟永寧殿儀
하지만 현재까지 왜 왕후와 왕세자빈이 종묘에 행차했으며
그 변화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육상궁묘현의(毓祥宮廟見儀)》가 이 질문에 답하면서
종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돕는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이 자료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2010년에 발간한 <숙빈최씨자료집> (3)에 실려 있다.
- 정해은, 국학자료조사실 선임연구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AKS Vol. 19(2010. 08) ‘옛 사람의 향기’
'알아가며(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천 원천리 백제 유적 현장설명회 (0) | 2010.11.08 |
---|---|
국보ㆍ보물「석조문화재」지정명칭 변경 (0) | 2010.11.08 |
한국사 제대로 밝혀라 - 허성도 서울대 중문학과 교수 (0) | 2010.11.02 |
어수지교(魚水之交) - 인조와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0) | 2010.11.02 |
이건승의 <해경당수초(海耕堂收草)> - 경술국치와 어느 한말 지식인의 삶 (0) | 2010.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