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이건승의 <해경당수초(海耕堂收草)> - 경술국치와 어느 한말 지식인의 삶

Gijuzzang Dream 2010. 11. 2. 19:33

 

 

 

 

 

 

 

 경술국치와 어느 한말 지식인의 삶

 

 

 

 

 

 

저 삐죽하고 여윈 모습 나와 다름없으나

이 한(恨) 굽이 서린 참 난 어디에서 찾을꼬!

 

 

이 짧은 글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건승(李建昇)이 만주로 건너가기 전 개성에서 홍승헌(洪承憲)을 기다리며

찍은 사진의 뒷면에 직접 써놓은 것이다.

왼편에 국화분을 놓고 의자에 앉아 찍은 이 사진에는

마른 외모에 꼿꼿한 기상이 눈에 서려 있다.

 

이건승(李建昇, 185-1924)은

자는 보경(保卿), 호는 경재(耕齋)ㆍ해경당(海耕堂)이며

조선의 대표적인 명문가였던 전주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의 후손이었다.

강화학파의 거봉인 고조부가 이충익(李忠翊, 1744-1816)이며

한말 문장가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그의 친형이다.

 

그러한 그가 마치 도망하듯 남의 눈을 피하여 고향을 떠나 만주로 떠난 것은

나라를 빼앗긴 백성으로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自愧感)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9월24일 강화도를 출발하여 26일 밤 개성에 도착한 이건승은

친구인 왕성순(王性淳, 1868-1923 )의 집에 여장을 풀었다.

여기에서 미리 약속한 충북 진천의 홍승헌(洪承憲, 1854-1914)이 오기를 기다리며 사진을 찍고 글을 썼다.

동행하는 홍승헌은 조선후기 문장가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5대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던 인물이다.

 

1910년 12월 초하루 이들은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 청나라 상인의 달구지를 빌려타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만주로 건너갔다. 마차로 600리의 낯선 길을 달려 회인현 홍도촌에 도착하니

이미 두 달 전 이곳에 도착한 정원하(鄭元夏, 1855-?)가 이들을 맞았다.

정원하는 조선양명학의 비조로 추앙되는 정제두(鄭齊斗, 1649-1736) 의 6대손이었다.

 

이후 이들의 삶은 그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애초에 무엇을 목적하고 온 것이 아니었기에 뚜렷한 행적을 남기지도 않았다.

사실 60줄의 노인들이 낯선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그저 만주의 기후와 풍토병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연명할 뿐이었다.

 

이러한 이건승 일행의 험난한 여정과 그곳에서의 고난은 그의 <해경당수초(海耕堂收草)>에 자세하다.

이 책은 이건승의 문집으로,

조선을 떠나 만주로 향하는 과정부터 이역에서의 고단한 삶의 모습이 실려 있다.

나라 잃은 지식인의 고뇌와 부끄러움을 생생하게 전한다.

 

결국 1914년 8월 풍토병으로 홍승헌이 생을 마쳤다.

살아서는 돌아갈 수 없었던 길을 죽어서야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험난한 여정을 함께 했던 이건승은 시를 지어 절통한 심정을 표현하였다.

 

 

떠나올 때 손을 잡고 왔더니 오늘 운구를 돌려보내네.

수레는 너무 빨리 지나고 언덕에 내 외침은 막히니

강가에서 홀로 배회할 뿐.

내 발길은 이 물에 막혀

멀리서만 바라보니 간장은 끊어질 듯.

 

 

홍승헌의 시신이 고국으로 돌아간 지 10년 뒤인 1924년 이건승은 67세의 나이로,

정원하 역시 다음해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명문가의 후예들이었지만 경술국치를 경험하면서 한결같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어떤 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어떤 이는 정처없는 방랑의 길을 나섰으며,

또 어떤 이는 세상에 알려지기를 두려워하며 산골에 은거하였다.

나라가 망하는 치욕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지식인으로서의 비애와 부끄러움이 공통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 박용만, 장서각 선임연구원

- 경향신문 2004-06-07

-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AKS Vol. 21(2010. 10) ‘옛 사람의 향기’

- 한국민족운동과 종교활동, 유준기, 국학자료원

 

 

 

 

 

 

 

 

 

만주로 떠난 강화학파 후예들

 

 

1910년 9월 24일, 이건승은 새벽에 사당문을 열고 하나하나 위패 앞에 마지막 하직을 고했다.

그리고는 대나무 지팡이 하나를 짚고 마치 이웃마을에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강화도 사기리, 자신의 집을 나섰다. 사람들의 이목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장조카 이범하가 작은 아버지 춥겠다며 이부자리를 메고 길을 뒤따랐다.

 

이건승은 배를 타고 개성에 도달하여 전 홍문관 시강 왕성순 집에다 여장을 풀었다.

전 이조참판 홍승헌과  아우 이건방을 이곳에서 만나 함께 망명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10월 2일 한밤중, 이건승과 홍승헌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며

개성 성서역에서 북행열차에 올랐다.

애당초 이건방(李建芳, 1861-1939)도 함께 망명길에 오를 예정이었으나 처음의 계획을 변경하여

아우인 이건방에게 국내에 남아서 강화학파의 학통을 후진에 전수시키는 일을 맡긴 것이다.

그 이건방의 제자가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2-?)로 그를 통해 조선 양명학이 후세에 전해졌다.


이건승과 홍승헌은 신의주역에 내려 사막촌에 몸을 숨겼다.

이곳에서 압록강 강물이 얼기를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11월 1일, 마침내 사막촌에서 중국인 달구지에 몸을 싣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6백리 길을 중국인 마차를 타고 달려 도착한 곳이 환인현 흥도촌(횡도촌)이다.


그곳에는 대사헌을 지낸 정원하가 미리 와서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원하는 강화학파의 창시자인 정제두의 6대 손이다.

일찍이 을사년(1905) 초겨울, 이건승과 정원하는

‘장차 나라가 망하려는데 어찌 살아서 하늘을 볼 것인가?' 탄식하며 함께 자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죽을 만큼의 간수(양잿물)를 준비하는 데까지는 좋았는데 그만 주위의 감시로 죽지를 못했다.

이때 정원하는 간수를 담은 그릇을 빼앗기자 날이 선 칼날을 빼어 들었다.

주위에서 뺏으려 하자 날이 선 칼날을 잡고 놓지 않았다.

이때 힘주어 잡은 칼날에 손바닥이 끊겨 나가, 정원하는 한쪽 손을 쓰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다.  


교리 벼슬을 했던 안효제도 이곳에 망명해 와서 이웃에 함께 살았다.

안효제는 일본이 대한제국 고관들을 매수하려고 주는 '은사금'이란 것을 받지않아

창녕의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서는, ‘어찌 이 땅에 살아 일본민이 되랴?’ 싶어 압록강을 건넜던 것이다.


당대 명문가의 후예인 이들은 만주에 도착하여

동포들을 위해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

그러고 나니 정작 자신들이 먹고 사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끝내 그들 모두는 살아서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5대를 계속하여 고관대작이 끊이지 않던 집안의 홍승헌이 만주로 망명한 지 4년 만에

제일 먼저 객사하였는데, 기막힌 것은 부음을 받고 상주가 달려갔으나 당장 관짝 하나 살 돈이 없었다.

가난한 이웃 동포들이 한푼두푼 모아 마련해 준 관에 몸을 누이고 겨우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강화학파 후예들이 만주로 망명해 고초를 받고 있을 즈음,

국내에서는 76명의 고관, 양반들이 이른바 한일합방 공로로 ‘작위’와 ‘은사금’을 일제로부터 받았다.

한마디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대가였다.

심산 김창숙의 자서전에는 이때의 상황을

“온 나라의 양반들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고 격앙하여 말하고 있다. 

- 김병기,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

- 2009년 11월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