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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지교(魚水之交) - 인조와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Gijuzzang Dream 2010. 11. 2. 21:00

 

 

 

 

 

 

 어수지교(魚水之交)

 

- 인조와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어수지교(魚水之交)’라는 말이 있다.

물과 물고기의 만남이란 뜻인데 옛 사람들은 임금과 신하의 이상적인 만남을 이렇게 비유했다.

왕조국가에서 왕은 만기(萬機)를 주관하는 절대권력자였다.

모든 권력은 왕으로부터 나왔고 신민(臣民)의 생사여탈권도 왕에게 있었다.

때문에 왕은 지존으로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고,

때로는 국가보다는 왕실의 권위와 번영이 우선시되기도 했다.

이처럼 왕은 절대권력자였지만 독단은 금물이었다.

왕권을 믿고 독단을 일삼고 신료들을 경시한 군왕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말로는 그 단적인 증명이리라.

 

신료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보다 더 이상적인 지도력(Leadership)은 없다.

그 자발적인 마음은 신하에 대한 군왕의 예우에서 비롯된다.

신하를 귀하게 여길 줄 알고, 믿고 일을 맡기는 마음이 곧 예우(禮遇)이다.

예우를 통해 곧고 바른 신하가 조정에 가득하고 그들을 동반자삼아 나라를 운영할 때

정치와 민생도 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교훈이 이러했기에 현명한 군주는 신하를 예우할 줄 알았다.

때로는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신하에게 만류를 간청하는가 하면,

신하를 불러올리기 위해 교통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신하가 병환 중에 있을 때 어의를 파견하거나 내의원에서 조제한 약을 보내는 일은 예우의 극치였다.

신료에 대한 예우는 세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을 보필하던 신하가 병을 앓으면 약물과 음식을 보내 위로하였는데

이는 예비 군왕이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이기도 했다. 군왕의 예우는 신하들을 감동시켰다.

군왕의 위문서와 동봉된 약물, 음식물은

임금의 사랑이요, 눈물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신임의 증표였기에

관료로서의 한없는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1623년 인조가 장헌광을 사헌부지평에 임명하고 부임을 재촉하는 명령서

 

 

1623년 4월 인조는

경상감사에게 전직 사헌부지평 장현광(旅軒 張顯光, 1554-1637)을 호송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호송(護送)'이라면 언뜻 죄수를 연상하기 쉽지만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온 나라가 존경해마지 않는 석학을 극진히 모시고 오라는 말이었다.

 

한 달 전만해도 능양군(綾陽君)이었던 인조는

서인세력의 협조하에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아무리 광해군이 폭군일지라도 반정은 분명 국가비상사태였고 민심도 요동쳤다.

민심수습이 최우선 과제였던 인조는 반정공신들을 다 제쳐두고

고심 끝에 남인계 원로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을 영의정에 임명했다.

이원익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고 민심도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선 유림의 대표들을 초빙하여 민심을 더욱 진정시키고 정권의 정당성도 함께 천명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호서유림의 영수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과

영남유림의 종장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이 산림으로 전격 캐스팅되었던 것이다.

 

임금이 초빙하는 큰 손님이었기에 대접에 소홀함이 있을 수 없었다.

또 임금이 벼슬을 내려 불러올린다고 해서 섣불리 몸을 일으킬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인조로서도 무척 신경이 쓰였다.

그 상황에서 인조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편의를 제공하며 최대한 예우하는 길밖에 없었다.

 

인조의 마음은 승정원을 통해 경상감영에 공문으로 하달되었다.

공문에 제시된 호송의 방식은 단순히 역마 제공이 아닌 가교(駕轎) 호송이었다.

‘가교’란 말이 이끄는 덮개를 씌운 가마를 말한다. 당시로서는 가장 안락하고 호화로운 이동방식이었다.

호위 군졸도 배속되었고 원행(遠行)에 따른 숙식에도 만전을 기했다.

왕명을 접수한 경상감사는 장현광의 관할지인 안동도호부사에게 공문을 이첩하여

즉시 본가에 이 사실을 통지할 것을 지시했다.

공문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예의에 어긋남이 없도록 신신당부했다.

장현광 개인은 물론, 안동 고을로서도 커다란 광영과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일찍이 어느 누구도 이런 환대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장현광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일생을 초야에서 나그네처럼 살았기에 ‘여헌(旅軒)’이라 자호하였고 그런 삶에 익숙해진지도 오래였다.

인조의 뜻은 감복할만한 것이었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는 아들 응일(張應一, 1599-1676)에게

지필묵을 가져오라 명하고는 사직서를 작성하여 안동부사에게 제출했다.

 

1623년 장현광이 종 애남(愛男)을 시켜 제출한 사헌부지평 사직서

 

 

동시에 인조의 기대도 일단 무산되었지만 결코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후에도 인조는 거듭 징소(徵召)를 명했고

이듬해인 1624년 3월5일 자정전에서 꿈에 그리던 장현광과 상면하였다.

1년의 공을 들여 이루어진 소중한 만남이었다.

인조는 부복한 노신(老臣)에게 특별히 앉아서 말할 것을 허락하며

지우(知遇, 상대방의 능력이나 인품을 알아주고 우대함)를 표시했고

백성들의 생활상과 개선책을 꼼꼼하게 물어보았다.

그가 어전을 나서자 인조는 승지에게 의복과 음식을 내릴 것을 명하였다.

이것이 바로 옛 군왕이 신하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 김학수, 국학자료조사실 실장

-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AKS Vol. 20(2010. 09) ‘옛 사람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