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성균관(成均館)

Gijuzzang Dream 2010. 10. 18. 00:34

 

 

 

 

 

 

 

 성균관(成均館)  

 
 

비판 상소에 화난 연산군, 성균관을 기생 거처로 만든 적도...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이 인기입니다.

여장 남자인 김윤희가 ‘김윤식’이란 이름으로 성균관에 입학한 뒤 겪는 사건을 다뤘습니다.

원작 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역시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인기의 비결이 뭘까요?

‘조선 최고의 엘리트’라는 근엄한 이미지로만 각인돼 온 성균관 유생들의 솔직하고 장난기 가득한 모습에

사람들이 반한 게 아닌가 합니다.

역사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 항상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드라마 속 일들이 실제로 있었을까?”라는 것입니다. 마침 이 질문에 답하는 책 한 권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문신 윤기가 쓴 『반중잡영(泮中雜詠)』입니다.

윤기는 성균관에서 보낸 20여 년을 220편의 시로 남겼습니다.

 

 

성균관에 입학하려면

조선이 건국된 지 7년째가 되던 1398년,

태조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인문사회과학 캠퍼스 안에 성균관을 세웁니다.

올해로 612년째입니다. 600여 년 역사에 곡절이 없을 수 없겠죠.

연산군은 유생들이 자신의 사치와 향락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화가 나서 성균관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성균관은 한동안 기생들의 거처로 쓰입니다.

임진왜란 때는 건물이 대부분 불타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건물들은 선조 이후 복원된 것들이 많습니다.



성균관은 크게 학습 공간과 제사 공간으로 나눠진다. 학습 공간의 중심 건물이 명륜당이다. 유생들은 이곳에서 오전에는 사서삼경을 중심으로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자습을 했다. 명륜당 앞의 넒은 마당은 과거시험장으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성균관대 제공]


사실 성균관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992년 고려는 ‘태학’이라는 최고 교육기관을 세웁니다.

이 태학이 고려 말 성균관으로 명칭이 바뀌어 조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북한에선 성균관의 역사를 1000년으로 봅니다.

1992년 개성의 성균관에선 김일성이 참가한 설립 1000주년 기념 행사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은 일종의 국가 장학생이었습니다.

학비 · 기숙사비 · 식비는 모두 국가가 부담했습니다.

대궐 다음으로 고기반찬이 자주 나오던 곳이 성균관이었다고 합니다.

학용품도 공짜였습니다. 많지는 않았지만 매달 술까지 나눠줬습니다.

이 귀하던 시절, 도서관인 ‘존경각’도 자유롭게 이용했습니다.

요즘도 장학금을 많이 주는 대학의 경쟁률이 올라가 듯, 혜택이 많은 성균관의 입학 경쟁도 치열했습니다.

조선의 과거시험은 소과와 대과로 나눠져 있습니다.

소과에 합격하면 생원·진사가 되고 대과를 통과해야만 정식으로 관직에 나가게 됩니다.

소과는 예비시험, 대과는 본시험인 셈입니다.

바로 소과를 통과해야만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습니다. 정원은 200명입니다.

아버지가 고위 관료일 경우 과거를 보지 않아도 입학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하재생(下齋生)’이라 불리며 무시당했습니다.


신입생 환영회부터 커닝까지


유생들은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으며 ‘스파르타’식으로 공부했습니다.

오전에는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그날 배운 것을 복습했습니다.

학교 안에선 장기 등 취미생활도 금지됐습니다.

한 달에 쉬는 날은 고작 이틀. 공식적인 이유는 ‘옷을 빨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쉬는 날에도 유생들은 바둑을 두거나 사냥·낚시를 하다 걸리면 처벌을 받았습니다.

요즘의 재수 기숙학원을 연상시키는 빡빡한 일정입니다.

그러나 피 끓는 젊은이들이 모여 사는 곳에 소동이 없을 수 없겠지요.

그 시작은 신입생 환영회입니다.

드라마에선 ‘신방례’라는 신입생 환영회가 등장합니다. 선배들이 신입생들에게 밀가루를 뿌리고

주인공 김윤희에게 “한양 최고 기생의 비단 속곳을 가져오라”는 등의 짓궂은 명령을 내립니다.

정말로 그런 명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드라마적 상상력이지요.

다만 중종 때 기록을 보면 성균관 선배들은 새로 생원이나 진사가 된 사람의 집에 찾아가서

거나한 잔치를 벌였습니다. 가난한 유생들은 이 때문에 성균관 입학을 그만두는 일도 있었습니다.

조정에선 이런 폐해를 막기 위해

주모자인 학생회 임원들이 과거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처벌을 내립니다.

선배가 후배를 괴롭히는 ‘면책례’도 있습니다.

선배가 “누구누구를 면책한다!”고 선언하면 유생들과 시중 드는 노비들은 그 사람의 방으로 몰려갑니다.

욕을 하고 밀쳐 넘어뜨리며 당사자를 조롱했습니다.

면책례는 고려시대 건방진 권문세족 집안 출신 유생들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생겼다고 합니다.

유생들은 원칙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성균관에는 기숙사 2동이 있습니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각각 두 칸짜리 방 28개가 있습니다.

한 방에 2~4명이 지냅니다. 2005년까지 성균관대 유학 · 동양학부 학생들도 이곳에서 지냈습니다.

조선 후기엔 기숙사도 같은 당파끼리 씁니다. 당쟁의 여파가 성균관 유생들에게도 미친 것이지요.

서재는 노론이 썼고, 동재는 소론과 남인 · 북인들이 지냈습니다.

학생회 대표인 ‘장의(掌議)’도 동재와 서재에서 각각 1명씩 뽑았습니다.

기숙사 생활은 그리 편하지 않았습니다.

온돌이 없어 겨울엔 화로를 끼고 살거나 이불을 몇 겹씩 덮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균관 근처 반촌(泮村)에서 하숙하는 유생들도 많았습니다.

서재 네 번째 방에선 개고기를 먹다 체해서 죽은 유생의 귀신이 나오기도 했다는군요.

 

 

<참고>




성균관 반궁도.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지도의 가운데에 있는 큰 건물이 공자 등 성현에게 제사 지내던 대성전.

뒤쪽 가운데 건물이 강의실인 명륜당이다.

양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반수(泮水)’로 하천 이름을 따 성균관을 ‘반궁(泮宮)’이라 부르기도 했다.




 태학계첩(太學契帖)

 

1747년(영조 23),  지본채색, 44.9×27.3㎝, 서울역사박물관

 

 

성균관 대사성 이정보(李鼎輔, 1693-1766)가 성균관 내외의 환경을 정비한 것을 기념하여

이 일에 참여한 사람들과 만든 계첩이태학계첩(太學契帖)』이다.

태학지(太學志)는 성균관 대사성 민종현(閔鍾顯)이 엮은 것으로

이 책의 卷之 1 '建置'에 관아도형인 <반궁도(泮宮圖)>가 수록되어 있다.

태학지(太學志)정조 9년(1785)에 성균관장 민종현이 편찬한 성균관 400년사인데,

이 책 서문에서 민종현은

"국조에서 길러낸 많은 선비는 400년 동안에 명유 석보가 앞뒤로 서로 바라다 보이니"라고 했다

 

조선시대 성균관의 시설은 제후(諸侯)의 학궁(學宮)은 '반궁(泮宮)'이라는 입장에서

반궁제도(泮宮制度)에 입각하여 정비되었다.

반궁(泮宮)에는 반수(泮水)가 필수적 요소인데,

반수는 1478년(성종 9) 7월 24일(계미)에 공사가 완료되었다.

 

오른쪽 가장자리에 성균관을 둥글게 감싸며 흐르고 있는 반수(泮水),

그 위에 세워진 3개의 다리는 중석교(中石橋), 향석교(香石橋), 반수교(泮水橋),

반수교 옆의 탕평비각 등 성균관임을 말해주는 표현이 사실적인 기록을 나타내고 있다.

 

비각에는 1742년(영조 18) 영조가 쓴 어필(御筆)을 새긴 탕평비석이 있는데,

성균관 유생들에게 당쟁의 폐풍에서 벗어나

참다운 인재가 되기를 권장하는 뜻을 적어서 내린 것이다.

 

예기(禮記)』에 있는 한 구절을 써서 새겼는데,

“신의가 있으면서 아첨하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변된 마음이요,

아첨하면서 신의가 없음은 이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 라는 내용이다.

비의 액제(額題)를 쓰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이를 '탕평비'라고 말했다.

 

 

 
유생들 역시 요즘 대학생들처럼 시험에 치여 살았습니다.

매일 유생 두 명을 골라 그날 배운 내용을 외우고 뜻을 풀게 하는 ‘일고(日考)’,

열흘마다 보는 작문시험 ‘순고(旬考)’, 달마다 보는 ‘월고(月考)’, 일년에 두 번 보는 ‘연고(年考)’까지.

그 외에도 임금이 직접 주관하는 ‘친시(親試)’도 있었습니다.

시험이 잦다 보니 시험 공포증에 걸린 유생도 있었습니다.

선조 때 유생 정사신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청심환 세 알을 먹고서야 시험을 봤다고 합니다.

정사신은 훗날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됩니다.


커닝도 등장합니다. 1705년 명륜당 앞 과거시험장에선 땅에 묻힌 노끈 하나가 발견됩니다.

노끈은 땅속 15㎝ 깊이의 대나무 관을 통해 30여m 옆 정자까지 이어졌습니다.

방수를 위해 대나무 위에 기와까지 덮어뒀다고 합니다.

문제가 출제되면 대나무 관을 통해 문제를 시험장 바깥으로 내보내고

바깥에서 대기하던 사람이 답안을 대신 쓴 뒤 다시 시험장 안으로 들여보내는 장치였던 겁니다.

누가 이런 대공사를 했을까요?

사상 초유의 대규모 커닝 설비에 형조까지 나서 성균관 노비들을 고문했지만 결국 단서를 잡지 못했습니다.

범인은 300년이 지난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성균관의 대학로, 반촌(伴村)


소과를 통과하고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들은 명륜당에서 공부하며 기숙사 생활을 했다.
기숙사는 동재와 서재로 나눠져 있었는데 각각 28개의 방이 있었다.
최근인 2005년까지도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학생들은 이곳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정문부터 성균관대 입구 사거리까지는 조선의 대학로 ‘반촌’이었습니다.

반촌을 ‘조선의 게토(getto)’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습니다.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자 빈민가였습니다.

반촌엔 야간 통금도 없고 포졸이나 순라꾼이 함부로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신성한 성균관 근처였거든요. 이 때문에 유난히 강력 사건이 많았다고 합니다.

반촌의 주민인 ‘반인’들 중엔 천민인 백정들이 많았습니다.

조선 최고 두뇌들이 공부하는 곳 바로 옆에 최하층 천민들이 살았다는 점에서 반촌은 독특한 동네였습니다.

유생들은 반촌에서 하숙도 하고 주전부리도 사먹으며 반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돈을 빌리기도 했지요.

실학자 정약용은 서학(천주교) 비밀 스터디 장소를 빌려 준 반인 김석태가 곤장을 맞아 죽자

제문을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제문에서 정약용은 “내 잘못을 남이 지적하면 칼을 뽑아 크게 화내던 사람”이라고 슬퍼했습니다.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 유생들 역시 지금의 대학생들처럼

시험을 앞두고 힘들어하고 때론 술을 먹고 싸우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정치를 잘못하면 상소문을 써 대궐까지 찾아간 의기 있는 청년들이기도 했습니다.

유생들이 상소가 든 함을 앞세우고 대궐로 향할 땐

대신이라도 말에서 내려야 했고 근처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왕이 상소를 듣지 않으면 성균관을 비우고 동맹 휴학에 들어갔습니다.

바른 목소리를 내는 것. 그것은 유생의 사명이었습니다.

- 2010.10.15  중앙 이한길 기자

 

 

 

 

 

 

 

  전통사회에서 입학(入學)의 의미 

 

  

 

고려, 국립대학 국자감을 비롯해 6등급으로 나눠, 무과는 실시하지 않고... 

고려와 조선시대 대표적 교육기관의 입학 자격과 교육 과정을 살펴보면,

고려에서는 지금의 대학격인 국자감(國子監)에서는 유학(儒學)을 중심으로 

고관의 자제가 공부하던 국자학(國子學), 국가 중앙 학부인 태학(太學), 서민을 위한 사문학(四門學)과

실생활에 필요한 전문 과정을 이수시키는 율학(律學), 서학(書學), 산학(算學) 등

6등급의 학과를 두고 '경사6학(京師六學)'이라 불렀다.

 

입학 자격은 국자학은 문무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의 자제와 서인이

입학할 수 있도록 신분에 따른 규정을 두었다.

잡학(雜學) 즉 율학, 서학, 산학의 전문학과는 지금의 전문대에 해당하며

주로 하층 관리와 서민에게도 자격이 주어졌다.  

국립대학격인 국자감의 수학(修學)방법은

국자사업박사, 태학박사, 사문박사, 조교 등이 교수(敎授)하였고,

유학생(儒學生)의 성적에 따라 사문학은 태학으로, 태학은 국자학으로 편입시키는 제도도 있었다.

고려왕들은 국자감 교육을 중요시하였기에,

예종 4년(1109)에는 교육과정을 구체화하여 전문 7강좌인 7재(七齋)를 설치했다.

주역을 공부하는 여택재(麗澤齋), 상서(尙書)의 대빙재(待聘齋), 모시(毛詩)의 경덕재(經德齋), 주

례(周禮)의 구인재(求仁齋), 대례(戴禮)의 복응재(服膺齋), 춘추의 양정재(養正齋),

무학(武學)의 강예재(講藝齋) 등 전문 강좌로 꾸몄다.

고려조의 과거제도에 무과(武科)가 없었다.

강예재가 무과를 대신했으나 인종 11년(1133)에 문신의 반대로 폐지되었다.

국자감은 성균감(成均監), 성균관(成均館)으로 바뀌고 훗날 성균관은 조선으로 이어진다. 

 


 

 

 조선시대 교육의 산실 성균관 명륜당


 

 


조선, 성균관 입학자격은  3등급으로 분류, 9과목 이수까지 3년반 걸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행단(杏亶)을 상징하는 명륜당 앞의 은행나무. 중종 14년(1519)에 명으로 대사성(大司成) 윤탁(尹倬)이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수령 600년 .천연기념물 제59호.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로는 서울에 성균관과 사학(私學)이,


지방에는 향교, 민간교육기관으로 서원과 서당이 있었다.

모든 교육기관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한 준비과정이기도 하다.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는 정3품직의 대사성(大司成)이며, 

아래에 좨주(祭酒), 악정(樂正), 직강(直講), 박사(博士), 학정(學正), 학록(學錄), 학유(學諭) 등의 관직을 두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국립종합대학인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15세 이상의 양반자제로

△초시를 통과한 생원시, 진사시의 합격자 200명

△소과(小科), 향시(鄕試), 한성시(漢城試)의 합격자

△하급관리 중 입학을 원하는 자, 일반서출 등 3등급으로 나뉜다.

 

입학 후 유생(儒生)들은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에 기숙하고,

양인과 서출 출신들은 남헌(南軒)에서 생활하였기에

그들은 '남반(南班)'이라고 부른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였으며,

소정의 선발 시험인 사학(四學)의 초시합격자인 승보(升補)나

가족의 공적으로 입학자격을 얻은 음서(蔭敍)에 의해 입학한 유생들을 '하재생(下齋生)' 이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의 주요과목은 4서와 5경이다.

신입생은 대학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다음 과목으로 올라간다.

총 아홉 과목을 이수하는데 필요한 독서기간은 3년 반정도 걸린다.

유생들에게는 매월 말에 시험을 보았고, 그 결과를 국가에 보고하는 등 매우 엄격했다.

 


300일 이상 출석해야 시험 자격 주어지고 학생자치회도 운영

교육은 과거를 위한 준비단계로 엄격한 규율 속에 생활을 하며,

과거에 급제하여 등용하면 졸업을 하게 된다.

유생들의 일과는 아침저녁 식당에 비치한 출석부인 도기(到記) 서명을 해야 한다.

당시에도 특채가 있었는데, 이는 출석점수인 원점(圓點)을 기준으로

300일 이상 개근을 하면 관시(館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거나

종합성적이 우수한 유생은 식년시와 천거를 통해 남들보다 먼저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다.

성균관에도 지금의 총학생회와 비슷한 자치기구인 '재회(齋會)' 가 있었다.

회장에 해당하는 장의, 색장, 조사, 당장 등의 기구로 구성하여 유생내부의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였다.

임원선출방법은 장의, 상색장, 하색장은 동 · 서재에 각각 1명씩 두었고,

새로 과거에 합격한 자 중에서 문벌이 좋은 자를 하색장으로 기존의 합격자 중에서 상색장을 뽑았았다.

장의(掌議)는 먼저 들어와 공부하는 유생 중 문벌이 뛰어난 사람으로 뽑았다.

회의는 장의의 주재로 하며 다수의결을 따랐고, 퇴학을 결정하는 출재(黜齋)도 담당하였다.

때로는 국정에도 관여하여 전원의 이름으로 유소(儒疏 : 상소)를 올려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권당(捲堂)'이라 하여 동맹휴학으로 성균관에서 나가거나 석고대좌도 서슴치 않았다.

고려의 국자감이나 조선의 성균관은

인재양성은 물론 성현의 뜻을 배우고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정사를 돌보는 덕치를 배웠으며,

지배사상과 관료사회를 재편하는 기능까지 담당하였다.

- 한철수 편집위원

- 2008년 03월 04일 남양주투데이

 

 

 

 

 
    
● 반촌(泮村) - '서울의 게토(ghetto)'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778

 

신참례(新參禮) - 조선시대 신입관리 신고식

     : http://blog.daum.net/gijuzzang/7605808

 


● 조선시대 신고식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272


● 고문서 - 과문(科文)=시권(試卷)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359

 

● <조선시대 문과백서>-조선시대 문과방목(文科榜目) 분석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311


● 대사례 - 영조 19년(1743) : http://blog.daum.net/gijuzzang/4338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