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로 본 통일신라
-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중심으로 -
문자는 인간이 의사소통을 위하여 고안한 기호 체계로
표의문자(表意文字, 한자)와 표음문자(表音文字, 알파벳, 한글)로 나눌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일찍이 중국에서 한자를 사용하며 주변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쳤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도 한자를 사용하여
정치체제를 정비하고, 유학교육에 힘썼으며,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 중 신라는 6세기대 율령 반포, 불교 수용을 거치며 한자를 널리 사용하여 각지에 비석을 세워나갔다.
신라의 문자 활용은 통일 이후에 더욱 활발해졌으며, 당나라와의 교류 확대, 유학과 불교의 발전으로
한자 사용 범위와 수준이 향상되고 문자가 새겨지는 유물들도 다양해진다.
통일신라의 토기, 기와, 전돌, 도장, 목간 등에는
지명, 관명, 사찰명, 연호, 간지 등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비석이나 경전 등에는 불교문화의 확산과 함께 불교관련 문자기록의 비중이 대단히 높아지게 된다.
이러한 문자 유물 중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봉안된 이유와 제작연대 논란을 살펴보고자 한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이하 무구정경)은
1966년 10월 13일 불국사 석가탑을 해체 조사할 때 발견되었으며,
그 가치를 인정받아 다른 유물 27종과 같이 1967년 9월16일 국보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무구정경은 석가탑 2층 탑신부 사리공 내에 안치된 금동사리외함에서 발견되었는데,
장방형 금동합 위에 비단보자기에 싸인 채 얹혀 있었다.
12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길이 642㎝, 각 장 길이는 52.9~55.6㎝,
54~63행에 해서체 6~9자씩 배열된 두루마리 형식의 경전이다.
두루마리의 권축은 나무로 제작하였으며 양 끝에 붉은 칠이 되어 있었다.
무구정경은 도화라국(覩貨羅國)의 승려 미타산(彌陀山)이
당나라 측천무후 말년인 704년에 한역(漢譯)한 것이다.
미타산이 번역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측천무후가 후하게 사례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특별한 의도를 갖고 역경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측천무후가 705년 죽게 되면서 당나라에서는 널리 유행하지 않았고,
신라로 전해져 탑을 세우면 공덕을 쌓을 수 있다는 조탑경(造塔經)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무구정경의 내용과 관련된다.
“석가모니가 가비라성에 있을 때, 불교를 믿지 않는 한 바라문이
7일 후면 죽을 것이라는 관상가의 말을 듣고 찾아온다.
석가는 바라문이 죽어 지옥에 갈 것이며 고통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 한다.
이에 바라문이 참회하고 불교에 귀의하고자 간청하니,
석가가 가비라성 삼거리에 있는 낡은 탑을 수리하고 따로 작은 탑을 만들어
안에 주문을 써넣고 섬기면 생명을 연장하고
죽어서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복을 받으며 지옥의 고통을 면할 것이라 깨우친다.”
조탑 공덕을 강조한 무구정경은 중국에서 유입된 이래 통일신라의 탑 불사를 주도하였다.
본래 탑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안치하기 위한 것이지만,
경전은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는 법신사리(法身舍利)로 여겨져 탑 안에 봉안된 사례가 많았다.
8세기 초(706) 전(傳) 황복사지 출토 사리기에도 무구정경을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8세기부터 9세기 후반에 이르는 동안 석탑을 조성하는 소의경전(所衣經典)으로 널리 유통되었다.
무구정경에 의해 조성된 탑으로는
경주 창림사 무구정탑, 황룡사 구층목탑, 보문사 대탑, 합천 해인사 묘길상탑, 보령 성주사 석탑,
구례 화엄사 오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무구정경 발견 이전에는
일본 호류지[法隆寺]에 소장된 백만탑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 770년)이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알려져 있었다.
무구정경은 석가탑 창건연대인 751년(불국사고금역대기) 이전에 제작되었기 때문에
세게 최고의 목판인쇄술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데 석가탑 사리구 내에서 발견된 ‘묵서지편(墨書之片)’ 해독 중 일부 내용이 공개되면서 논란이 있었다.
그것은 11세기 초 석가탑이 중수되었으며 그때 무구정경이 봉안되었다는 지적이었다.
그때까지 석가탑은 중수된 적이 없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학계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묵서지편’으로 알려졌던 중수(重修)문서를 해독한 결과,
보협인다라니경(寶篋印陀羅尼經)과 중수문서로 구성되어 있었다.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佛國寺無垢淨光塔重修記),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 불국사탑중수보시명공중승소명기(佛國寺重修布施名公衆僧小名記)]
석가탑은 1036년 발생한 지진으로 인하여 1038년에 중수공사를 하였다.
이때 탑뿐만 아니라 행랑과 하불문(下佛門)도 수리한 것으로 보아 피해가 컸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다보탑은 1024년에 중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구조상 1038년에도 함께 수리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중수문서에서 확인된 내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석가탑과 다보탑의 창건이 742년에 이루어졌으며,
불국사의 면모를 갖춘 것은 혜공왕(재위 765~780) 때라는 점이다.
또한 다보탑을 ‘무구정광탑’으로 적었는데 이는 1024년 중수공사 때 무구정경 2종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석가탑에서는 경전이 발견되지 않아 ‘서석탑’이라고만 적혀 있다.
이는 조탑할 때 다른 사찰과 달리 두 개의 탑을 함께 세우면서
석가탑에는 경전 봉안을 생략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 신앙의식이 바뀌면서 1038년 석가탑을 중수할 때
무구정경이 없는데 반해 다보탑에는 2종이나 있었기 때문에,
석가탑에 무구정경 1권을 옮겨 봉안하고
보협인다라니경과 다보탑중수기도 필사하여 함께 봉안 한 것이다.
일부에서 제기된 무구정경 11세기 초 제작설은
당시 탑에 주로 봉안되던 경전이 보협인다라니경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즉, 무구정경은 742년 이전에 제작된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물인 것이다.
- 류정한, 국립중앙박물관 선사ㆍ고대관 통일신라실
- 2010년 10월13일 국립중앙박물관 ‘제 214회 큐레이터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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