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삶 속 門의 다양한 의미를 말하다
‘문을 열다’는 하루의 영업이나 사업의 시작을, ‘문을 닫다’는 장사를 마쳤거나 폐업한 상태를 이른다.
어떤 일의 마지막 고비는 ‘관문’이고, ‘등용문’을 거치면 크게 출세하여 영달을 누린다.
문은 반김을 뜻하고, 닫힌 문은 추방 · 불운 · 단절을 나타낸다.
좁은 문은 천국에 들어가는 어려움을, 열두 대문은 큰 집을 뜻한다.
문은 어떤 곳의 출입구인 까닭에 마을 어귀도 문으로 여겼다.
남사당의 풍물패는 자기들의 재주를 펴 보이려고, 입구에서 ‘문굿’을 친다. 문은 시작을 뜻한다.
경상도와 강원도의 오구굿에서, 첫머리에 문을 열어 신을 맞이하는 문굿을 펼치는 것이 그것이다.
집의 안팎을 가르는 것은 대문, 이를 거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중문, 방의 안팎을 나누는 방문이다.
그리고 큰방 위 · 아래 간 사이에 장지문을 붙이고, 아랫간에서는 주인이, 윗간에서는 ‘아래 것’이 머문다.
이 때문에 아랫간에서 윗간으로 건너가는 것을 ‘내려간다’ 이르고,
윗간에서 아래 간으로 내려가는 것을 ‘올라간다’고 이른다.
지체가 낮은 손님은 윗간에 서서 주인과 말을 나누어야 한다.
신분사회에서 이러한 풍속은 과거 우리의 건축양식 중 하나인 ‘솟을대문’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솟을대문은 대문을 좌우 양쪽의 행랑채 지붕보다 높게 지은 것을 말하는데,
양반 댁이나 서원 향교의 정문인 솟을대문은
말 그대로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며 대문으로서의 자기 과시를 확실하게 하고 있다.
본디 초헌 · 사인교(四人轎) · 가마 따위가 드나들게 하려고 높이 세웠지만,
점차 권문세가나 부유한 가문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대문 자체뿐만 아니라, 문턱까지 높아져서 문턱에 바퀴 자국을 따라 홈을 파기도 한다.
솟을대문에 대비되는 것은 평대문이다.
농가의 평대문에는 흔히 헛간이나 뒷간이 이어 달린다.
솟을대문이 상류가옥의 상징이라면, 평대문은 중류가옥의 전형인 셈이다.
한편, 내외관습에 따라 상류가옥에서도 사랑채로 향하는 문은 솟을대문으로 세우고,
부녀자들이 드나드는(안채로 향하는) 문은 평대문으로 꾸민다.
퇴와 퇴 사이에 있어, 흔히 사랑채에서 안채로 드나들 때 이용하는 문이 편문이다.
충청남도 서해도서 일대에서는
시부모가 거처하는 안방과 부엌 사이 또는 안방과 며느리 방 사이에 이 문을 달아 내 외벽으로 삼는다.
비바람을 가리기 위해 외벽에 덧붙이는 것이 널로 짜 맞춘 빈지문이다.
근래까지 도회지의 가게에서 문을 닫을 때 여러 죽을 문턱에 차례로 끼워서 벽으로 삼기도 하였다.
민초들의 삶, 유쾌한 해학으로 전해지다
민속신앙에서 門은 신성한 성역의 공간으로 존재했다.
농가에서는 단오날 문 위에 쑥 다발을 걸어둔다.
오월 단오는 양(陽)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날로 정오에 절정에 이르므로,
이때 벤 쑥 다발을 걸어두면 잡귀인 음기를 쫓는다는 것이다.
쑥은 예로부터 신약(神藥)으로 알려져 왔다.
또 다른 예로 제주도에서는 주목신(柱木神)과 정살신을 문 지킴이로 여긴다.
큰 길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좁은 골목인 올레 입구에 가로로 걸쳐놓는 서까래만한 나무는 정살(정낭),
이를 꿰어놓으려고 양쪽에 세운 나무나 돌을 정주목이라 부른다.
정주목을 주목신으로, 나무를 정살신으로 받드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뿐 아니라 혼령도 문으로 드나든다고 여긴다.
제사 때 반드시 문을 열어두고 불을 밝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선조들의 삶 속 문에 대한 의식은 구술로 전해지고 있는 속담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남의 집에 버려진 아이를 개구멍받이라 하는데,
이 아이는 들어온 복 이라 여겨 맡아 키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처럼 우리네 선조들은 문을 특별한 장소로 생각하고 문뿐만 아니라 문지방도 성스럽게 여겼다.
나와 남, 안과 밖 그리고 일의 성패를 가르는 경계인 까닭이다.
속담에서는 다양한 문 이야기가 나오는데 상황마다 유쾌한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것을 볼 수 있다.
뜻밖의 봉변을 당했을 때 “문지방 넘어서자 홍두깨 찜질 당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뜻을 “문턱 밑이 저승이라”고 일컫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애써 일을 하였음에도 마지막 끝맺음을 잘못하여 수고한 보람이 없을 때
“다 가서 문턱을 못 넘었다”고 빗댄다.
“천릿길을 찾아와서 문턱 넘어 죽는 것”은,
오랫동안 고생하여 오던 일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물거품이 되었음을 이른다.
지금 70대 무렵에 이른 사람 가운데,
어릴 때 문지방에 앉거나 다리를 올려놓았다가 어른에게 꾸중을 듣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농가에서는 오늘날에도 문지방에 걸터앉으면 논둑이 무너진다고 한다.
임산부가 그렇게 하면 불구자를 낳는다는 속설도 있다.
그만큼 문은 우리 민중들의 삶 속 가까이에서 신성한 공간이자 성역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옛 분네들은 문에도 얼굴이 있다고 여겼다.
문짝을 달거나 끼우는 테를 ‘문얼굴’이라 부른 것이다.
이 때문에 “문얼굴의 설주가 지나치게 굵거나 가늘면 불길하고,
밤나무로 문얼굴을 삼으면 도둑이 들지 않는다.”고 일러왔다.
아닌 게 아니라 문은 사람의 얼굴과 같아서 주인의 품격이 드러난다.
우리 농가에는 울타리는 물론, 문조차 달지 않는 집이 많았지만,
누구든지 문이 그 자리에 있거니 여기며 드나들었고,
이 마음의 문은 눈에 보이는 문 못지않은 구실을 하였다.
우리네 선조들은 세상에서 가장 큰 문은 마음의 문이며,
열어놓으면 온 우주를 들여 놓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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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사진 : 김광언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문화재위원회 민속문화재분과위원장
- 사진 : 엔싸이버 포토박스
- 2010-09-16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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