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조선의 정신을 담은 서울의 門

Gijuzzang Dream 2010. 9. 29. 03:32

 

 

 

 

 

 




 

시간의 흐름 속, 변화해 온 문의 의미

 

 

‘조선의 정신을 담은 서울의 문’을 말하고자 한다면

‘서울’과 ‘문’의 의미를 살핌에 있어,

조선왕조 도읍지였던 시대와 그 시대를 이끌어왔던 정신적 가치를

반영한 문이라는 것이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서울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도로의 의미와

그 터전이 되었던 조선왕조의 도읍지인 한성을 가리킨다.

 

나아가 고려의 남경과 백제의 위례성을 이은

2000년 고도이자 왕경이었던 역사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서울의 문은

인천국제공항 · 김포공항 · 서울역 · 고속버스터미널 · 시외버스터미널 · 화물터미널

그리고 각종 톨게이트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상징적인 관문을 지나 각종 건물과 통로,

그리고 개인 주택의 입구까지 이르는 여러 통행문과 가정의 각 방문에 이르기까지

그 성격에 따라 그 종류가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러한 현대의 문이라는 의미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국가방위나 방역 또는 무역의 통제를 위한 목적을 제외하고,

원칙적으로는 어떠한 의례나 통행 제한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아울러 현대의 문은 어떤 상징이나 의미보다

현실의 필요성에서 요구된 기능성에 의해 설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위치의 선정이나 구조와 방향 등이 모두 실용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는 달랐다.

조선시대 한성으로 칭했던 서울은 지명 그대로 한양도성이라는 성곽이 있어 성 안팎을 구분하였다.

따라서 도성 문은 관문으로서의 통행에 따른 의례와 제도 및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그 관문으로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한양도성의 4대문과 4소문 그리고 5대 궁궐의 궁성문이 될 것이다.

그런데 《예기(禮記)》에 의하면 대궐에 이르기까지는 9개의 문을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의 제도였고,

우리는 3문의 궁성문 제도를 택하여 경복궁의 경우 광화문(치문)-흥례문(응문)-근정문(노문)을 통과하여

정전인 근정전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궁궐은 칠중심처 · 칠문 · 칠금(七禁)이 된다.

이러한 3문 구조는 일반 사찰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과정에도 적용되어

일주문-천왕문(금강문)-해탈문을 지나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풍수지리 사상에 입각해 축조된 도성의 문들

 

한편 한양도성의 대문 즉, 숭례문 · 흥인문 · 돈의문 · 숙정문의 4대문과

광희문 · 소의문 · 혜화문 · 창의문의 4소문을 통하여

한반도 전역과 지구상으로 연결되는 사통팔달의 교통로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성문은

서울의 지세를 풍수지리적으로 이해하여 적절한 방향과 위치를 선정하여 축조된 것이다.

 

즉, 경복궁 또는 창덕궁을 중심(황룡)으로 좌청룡 · 우백호 · 남주작 · 북현무의 4신사(四神砂)가 감싸고

그 밖에도 2중 · 3중의 산세가 거듭 궁궐로 표현되어 혈(穴)을 보호하는 지형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내명당수와 외명당수가 산수역(山水逆)에 따라 흐르는 방향을 달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4신사에 해당하는 산봉우리는

주산(主山)의 북현무인 백악(북악 · 북악산), 안산(案山)의 남주작인 남산(목멱산),

그리고 좌청룡은 낙산(낙타산 · 타락산), 우백호는 인왕산으로 비정된다.

그리고 주산을 지켜주는 진산(鎭山)은 삼각산, 안산에 예물을 올려놓는 조산(朝山)은 관악산이 된다.

그리고 내명당수는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청계천(개천),

외명당수는 동출서류(東出西流)는 한강이 되는데,

이 두 물줄기는 남산줄기에 가려 그 끝자락에서 중랑천과 청계천이 만나고

다시 한강에 합류되는 형상을 띠고 있다.

 

이러한 풍수지리적 지형을 가지고 있는 한성은

4신사 즉, 내4산의 능선을 따라 도성 18,627㎞가 축조되어

궁궐을 비롯한 각종 도시시설을 보호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따라서 4대문 · 4소문은 풍수지리적 가치에 따라 그 위치와 방향이 설정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 방향성은 주역의 4괘(건 · 이 · 감 · 곤)와

8괘(건 · 태 · 이 · 진 · 손 · 감 · 간 · 곤)의 이념을

받아들였고, 위치는 통행이 수월한 지형조건의 편의성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는

인 · 의 · 예 · 지 · 신(仁義禮智信)의 유교덕목 5상(五常)을

도성의 숭례문 · 흥인문 · 돈의문(지와 신은 숙종 때 홍지문과 고종 때 보신각) 등 대문 이름에 붙여

나라의 정체성을 밝히고 그 뜻을 전국적으로 홍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성문은 동서남북의 방위에 따라

동대문 · 서대문 · 남대문 · 북문 · 동소문 · 서소문 · 남소문 · 시구문 · 수구문 등으로 불려

실용성과 기능성을 따르기도 하였다.

이는 성 안을 사방에서 수호하는 사신상(四神像) 즉, 좌청룡 · 우백호 · 남주작 · 북현무의 형태와

춘하추동 사계절 방향으로도 표현되었다.

 

이는 궁성문에도 적용되었다.

즉, 경복궁의 북문은 현무를 뜻하는 신무문으로,

동문은 봄을 뜻하는 건춘문으로,

서문은 가을 뜻하는 영추문이라 일렀다.

그리고 여름은 남쪽, 겨울은 북쪽 방향으로 비정된다.

여기서 서울성곽의 4대문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자.

 


도성 내 4대문이 갖는 의미와 역할

 

숭례문(崇禮門)은 청계천과 만초천을 가르는 언덕(분수령)에 세워져 있으며, 인왕산 줄기와 남산 줄기를 잇는 길마재 즉, 안부(鞍部)에 해당된다.

례문은 조선왕조 도성의 정문으로

서울성곽 8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커 도성의 얼굴 구실을 하였다.

예를 숭상한다는 의미를 지닌 성문을 통하여,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으로서 나라의 품격을 지키는 상징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전근대사회 중국의 외교사절은 이 문을 통하여 입국하여 태평관에 머물렀고,

조선의 외교사절은 이 문을 지나 의주로를 통과하여 중국의 베이징에 이르렀다.

여기서 숭례문의 큰 의미 가운데 하나가 당대의 정통 외교통로였다는 점에서

특히 오늘날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비롯한

각종 정치 · 경제 · 외교상에 걸린 여러 문제를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는 계기를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흥인문(興仁門)

서울 도성 안을 남과 북으로 나누는 청계천 물줄기가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오간수문(五間水門) 바로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지형 상으로 볼 때 서울 도성 내에서 가장 낮은 곳이 된다.

사람은 일상생활의 활동 반경에서 있어서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하여 높은 곳으로 나간다.

자기 자신의 하루 생활이 시작되는 곳이 그날 일과의 출발점이 되어 가장 낮은 곳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역설적으로 높은 곳으로 가는 것이 된다.

그리고 땅과 물이 만나는 곳 또한 인류 생활의 가장 낮은 곳으로 많은 물산과 인간이 교통하는 곳이 된다.

여기서 인류문명의 발상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仁(사랑)을 불러일으켜 인간생활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니,

흥인문의 상징은 우리로 하여금 낮고 모자란 것을 비보하여

평화로운 도성 안의 주민생활을 보장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가장 먼저 점령당한 도성 문이 되니,

여기서 얻어질 역사적 교훈도 오늘날의 한일관계와 관련하여 냉철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돈의문(敦義門)은 서울도성 4대문 4소문 가운데 서쪽 대문으로,

성문의 이름은 ‘의로움을 돈독히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유교덕목인 인의예지신 가운데 오행에 따라 방향을 잡아 서쪽을 뜻하는 ‘의(義)’를 취하였다.

 

여기서 ‘의(義)’자의 뜻을 살펴보자.

‘의(義)’는 ‘양(羊)’과 ‘아(我)’의 합성글자이니

양가죽으로 만든 훌륭한 옷을 입은 나의 단정한 모습을 일컫는다.

즉, 자세가 바르고 행동함에 있어서 나쁜 짓을 하지 않고 바른 길을 걷는다는 의미가 된다.

나아가 불의를 보면 기꺼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실천적 행동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의’는 ‘仁’과 대비된다. ‘仁’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드러움을 나타내는 반면,

'義'는 옳고 바름으로서 옳지 않음을 물리치는 절도 있고 올바른 행동으로 표현되는 강함으로 나타난다.

 

이에 ‘인의(仁義)’로서 조화를 이룬 가치관이 실행되는 사회를 기원한 것이 조선왕조의 정치이념이었고,

인간 도리를 밝히고 널리 실천하게 하여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흥인문과 돈의문이라는 현판으로 한양도성의 동대문과 서대문에 걸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의’는 인간이 당연히 행하여야 할 덕목으로서,

‘의를 보고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논어》의 뜻에 따라

돈의문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고, 실제 돈의문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음미함으로써

그 가치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조의 정권장악 과정이었던 계유정난 때 김종서가 칼을 맞은 곳이었고,

을미사변 때 일제의 군사에게 속은 흥선대원군이 이 문을 통과하여 경복궁에 들어가,

명성황후가 살해된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아픔의 역사 현장이었던 돈의문이 어찌 의로움만이 현창되기를 기원했던 문이라 하겠는가?

이상과 현실은 항상 괴리가 있는가 보다.

숙정문(肅靖門)은 종로구 삼청동 한양도성의 북쪽에 위치하여

북악의 산줄기에서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휴암(부엉바위)과 응봉(鷹峰)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숙정문은 도성의 북대문으로

그 기능은 서울에서 의정부를 거쳐 원산과 함경북도로 이어지는 관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정문은 4대문 · 4소문을 갖추고자 했던 조선왕조 도성의 성문체제에 의한

형식적인 구도에 따라 축조되기는 하였지만 실질적인 기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이 살지 않고 교통로로서의 필요성을 갖지 못한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문의 기능은 동소문인 홍화문(후에 혜화문)과 동대문인 흥인문이 대신하였던 것이다.

 

숙정문은 서울 도성의 북쪽 대문으로 처음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다.

한편 '숙정'은 ‘북방의 경계를 엄하게 하여 도성 안을 평안하고 정숙하게 한다.’는 뜻으로,

'숙청'은 ‘도성 북쪽의 경계를 엄하게 하여 도성 사람들이 정숙하고 맑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한다.’고

해석할 수 있어 비슷한 뜻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비가 오지 않으면 남대문을 닫고 북대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으며,

장마가 심하면 북대문을 닫고 남대문을 열어 기청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는 방위에 따른 음양의 조화를 이끌어 내어 평온함을 기원한 것이었다.

 


문(門), 사람들의 염원과 기원을 담은 행복의 상징

 

한편 한양도성의 대문과 소문은 그 기능도 달리 나타났다.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임금이 행차하고,

사대외교의 대상이었던 중국 사신이 왕래하는 문이었다.

그러나 교린외교의 대상이었던 일본 사신은 광희문(남소문),

여진 사신은 혜화문(동소문) 등 소문을 이용하였고,

도성 내의 장례 때는 상여가 광희문(시구문)과 소의문(서소문)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문의 격에 따라 의례 제도가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서울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이 되는 5대 궁궐이 남아 있고, 그곳에는 정문이 있다.

그런데 5대 궁궐의 정문 이름은 한결같이 중앙에 ‘화(化)’를 붙여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경복궁의 광화문, 창덕궁의 돈화문, 창경궁의 홍화문, 경희궁의 흥화문, 경운궁(덕수궁)의 인화문 등

모두 교화를 뜻하는 ‘化’가 들어가 있다.

이는 대궐의 정문을 통하여 임금의 덕목인 仁(사랑)을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통하여 백성들을 교화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고자 나라의 정령이 나아가는 관문임을 밝힌 것이다.

 

궁성문의 정문은 임금이 출입하는 문으로 사용되었고,

동문은 왕실들의 출입구, 서문은 관리들의 출퇴근 문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궐내각사(궁궐내의 관아)가 주로 궁궐의 서쪽에 위치하고,

동궁과 자경전을 비롯한 왕실의 생활공간은 주로 동쪽에 위치해 있어

실용적으로 기능을 부여한 것이라 하겠다.

 

또 우리의 민속에 보면 모든 길흉화복의 출입구를 문으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종묘의 칠사당에서는 가을에 문신(門神)에게 제례를 올려 안녕을 기원하였다.

이와 같이 서울의 문은 조선시대 이후 단순한 교통로와 경계의 의미를 넘어

풍수지리에 어울리는 방향에 따라 위치하였고,

나아가 나라의 정치이념을 표시하여 안정된 국가경영을 기원하기도 하였으며,

사람의 도리를 밝게 하여 문 안 사람의 행복을 실천하도록 하는 상징이기도 하였다.   


- 글 : 나각순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연구 간사  
- 사진 : 문화재청, 연합콘텐츠, 엔싸이버 포토박스

- 월간문화재사랑,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