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ㆍ목간이 알려주는 신라사
(公私 활동과 생각)
Ⅰ. 신라 금석문 개요
1. 금석문의 가치
책에 적힌 기록만이 역사가 아니며
큼지막한 전쟁과 정치적 사건, 두드러지게 활약한 위인들의 일생만 역사인 것도 아닐 것이며,
멀리 크게 보면 수많은 평범한 백성들의 삶이 그들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은 곧 일상의 역사이다.
신라사를 알아가는 데는 《삼국사기》《삼국유사》등의 문헌자료가 기본이 된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신라가 사라진 뒤에 한참 시간이 지나고 만들어진 것이고,
뒷 시기 사람들의 표현과 취향에 따라 선택되고 여과된 내용이다.
이런 측면에서 금석문, 목간(木簡)이 주목된다.
금석문(金石文)이나 목간(木簡)은 당시 사람들이 직접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생생한 자료이다.
신라는 고구려ㆍ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금석문이 남아 있다.
2. 금석문의 종류
●비문(碑文) : 돌을 다듬어 세운 것
한국의 대표적 금석문으로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묘비(墓碑)는 많지만, 신라 묘비는 거의 없다.
비석의 몸돌이 사라지고 귀부(龜趺)나 이수(螭首)만 남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태종무열왕, 김인문, 흥덕왕, 성덕왕), 문무왕릉비는 일부가 남아 있다.
●묘지(墓誌) : 무덤 속에 넣는 것
신라의 경우에는 묘지가 아직 발견되지 않음.
●불상명(佛像銘) : 불상의 광배 등에 만들게 된 동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것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경우인데
때로는 불상의 등(도피안사 비로자나불)과 어깨 뒤(보림사 비로자나불) 등에 새긴 경우도 있다.
●종명(鐘銘) : 종을 만든 배경과 제작에 참여한 시주자, 기술자 등을 새긴 것.
신라의 경우 꽤 많이 남아있다. 성덕대왕신종, 상원사종 등.
●목간(木簡) : 종이가 없던 시대에 동아시아에서 가장 널리 쓰였으며,
나무나 대나무를 다듬어서 먹글씨로 쓰거나, 칼로 깎아 새김(竹簡은 한국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음).
신라에서는 경주 안압지, 월성 해자(垓字), 함안 성산산성 등에서 많이 나오고 있음.
문서로 쓰인 것, 일시적 기록, 물품을 운송할 때 내역을 기록하여 딸려 보낸 경우,
제사나 의례를 거행할 때 사용한 것, 낙서 등 다양하다.
그 밖에 금속그릇(호우총의 호우), 벽돌, 기와, 바위(울진 천전리서석) 등에 새긴 금석문이 있다.
Ⅱ. 영토확대와 백성 지배
1. 진흥왕순수비, 적성비
신라는 6세기에 들면서 급격히 발전, 법흥왕대의 불교 공인, 율령 반포, 진흥왕대의 영토 확장 등
당시 신라가 어디까지 진출했는지 문헌기록에 보이던 것을 잘 믿지 않다가
실제 비석이 발견되면서 확인되기도 했다.
창녕비(561), 북한산비(555), 마운령비와 황초령비(568)를 흔히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라고 부른다.
또는 척경비(拓境碑)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마운령비에 대해 후대에 옮긴 것이라고도 주장하였는데
(윤관이 북방개척 때 영토 기득권을 주장하기 위한 것),
더 북쪽에서 황초령비가 발견됨으로써 허구로 밝혀지기도 했다.
진흥왕비의 내용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새 주민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는 내용이다.
무릇 순풍(純風)이 일지 않으면 세도(世道)가 참됨에 어긋나고,
그윽한 덕화(德化)가 퍼지지 않으면 사악(邪惡)한 것이 서로 경쟁한다.
그래서 제왕(帝王)이 연호(年號)를 세움에는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 만약 충성과 신의와 정성이 있거나, 재주가 뛰어나서 재난의 징조를 살피고,
적에게 용감하고 싸움에 강하며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공(功)이 있는 무리에게는
작(爵, 벼슬)과 물(物, 상품)을 더해주어 공훈(功勳)을 표창하고자 한다.
신라가 영토를 넓혀가는 방향은
①낙동강을 건너 서쪽 가야지역으로, ②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방향, ③죽령을 넘어 남한강 유역이다.
4개의 순수비는 이 방향과 일치한다.
그런데 1979년에 ③번 방향으로 막 진출하던 상황을 알려주는 비석이 발견되었다.
곧 단양신라 적성비이다.
적성비에는 이사부를 비롯한 신라장군들이 죽령을 넘어 진출한 다음,
단양지역에 살던 현지 유력자인 야이차(也尒次)를 비롯한 몇 사람을 포상하고
현지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2. 남산신성비, 관문성 명문
지금까지 파편을 포함하여 모두 10개 발견되었다.
591년(진평왕 13) 경주 남산에 신성을 쌓을 때 만든 것으로 앞부분이 모두 꼭같은 다짐으로 시작되고 있다.
“신해년 2월26일에 남산신성(南山新城)을 지을 때, 法에 따라 만들되
3년 안에 붕파(崩破)되면 罪로 다스릴 것임을 널리 알려 서약(誓約)하게 한다.”
이 서약문 뒤에 열거된 인명들은
장정을 동원한 지역에 파견된 지방관(도사道使, 나두邏頭), 현지에서 지방행정을 보조하는 촌주(村主)와
그 보조자, 성 쌓기에 필요한 석공(石工)을 비롯한 여러 기술자들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각 비(碑)마다 촌락별로 국가에서 할당받은 ‘受作 ○步○尺’ 등으로
‘책임공사구간’을 명기해 놓은 것이다. 이런 형식은 앞선 명활산성비(551)에도 보이고,
7세기후반의 관문성(關門城) 성벽에도 보인다. 일종의 공사책임제라 할 수 있다.
이런 전통은 조선시대 서울도성, 해미읍성, 문경 관문성 등으로 이어진다.
3. 목간
목간은 최근에 출토양이 늘어나면서 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과거에는 충분히 분석되지 못했던 안압지 출토 목간과
금속제 유물에 새긴 글자들까지 함께 관심의 대상이 되어 매우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다.
- 경주 황남동 유적 목간 - 창고와 관련된 내용
- 안압지 목간 - 항아리 표시(고성의 식혜? 등), 궁궐문의 순찰기록표 등
- 함안 성산산성 목간 - 세금운송 및 수납과 집하와 관련된 내용 등
목간은 극히 단편적인 내용인 반면, 실생활에 직접 관련된 기록이 대부분이라는 특징이 있다.
다만 목간연구는 아직 초창기라고 할 수 있어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의견 차이와 판독의 차이가 있는 상태이다.
Ⅲ. 종교적 염원과 이상
신라의 금석문에서 뺄 수 없는 것이 불상명(佛像銘), 종명(鐘銘) 등인데
이것은 삼국 중 가장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내용을 통해 신라의 역사와 문화, 생활과 사상까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鐘銘, 봉덕사종, 에밀레종)이다.
경덕왕 때 계획되었다가 이루지 못하고 771년(혜공왕 7)에 완성되었으며
국내 현존하는 종으로는 최대급이다.
아름다운 비천상(飛天像)과 830자의 명문이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 정계의 실력자는 물론 실무자급 명단까지 망라되어 역사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다.
한편 종을 만든 종교적 목적은 아래와 같은 문장에 드러나고 있다.
“무릇 지극한 道는 형상의 바깥을 포함하므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 없고,
큰 소리는 천지 사이를 진동하므로 들어도 그 울림을 들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임시로 이야기를 열어서 삼승의 가르침(聲, 緣, 菩薩)을 관찰케 하고
신종(神鐘)을 걸어 진리에 이르는 가르침을 주는 원음(圓音)을 깨닫게 한다.”
그런데 이 종을 만든 배경에는 성덕왕의 공덕을 칭송하고, 그 아들 경덕왕의 효성을 높이고
다시 그의 아들 혜공왕의 권위를 종교적으로 수식하려던 노력이 있다.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태후(경덕왕비로 혜공왕의 어머니)가 주도하여 이룩한 일이며
정치적 긴장을 엿볼 수 있는 경우이다.
종교적 목적으로 만든 불상명을 통해 당시의 신분제와 인간생활을 엿볼 자료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는데,
719년(성덕왕 18)에 만든 감산사 아미타여래입상, 미륵보살입상이 대표적인 자료이다.
광배 뒷면에 조성기(造成記)가 새겨져 있다.
두 불상을 만든 주인공은 중아찬(重阿湌) 김지성(金志誠=金志全)이다.
<미륵보살상 조성기>에는
아버지 인초(仁草) 일길찬,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觀肖里)를 위해 만든다는 구절이 기록되었다.
나이 67세에 조정 일을 사퇴하고 노자ㆍ장자의 유유자적함을 사모하고 불교를 독실히 믿었다는 내용,
이렇게 보살상을 만드는 작은 정성이 동생과 누나, 전처 고노리(古老里), 후처 아호리(阿好里) … 등을
비롯한 일체 중생에게 미쳐 함께 세속을 벗어나 부처의 경지에 오를 것을 염원하였다.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 부인은 66세에 죽어 동해 바위에 뿌렸다는 내용도 있다)
<아미타 조성기>에는
비슷한 내용과 함께 감산사(甘山寺)를 세울 때 감산장전(甘山莊田)을 희사했다는 사실도 새겨져 있다.
이들 내용은 신라의 신분제와 6두품 귀족의 생활, 사상 등을 알아보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Ⅳ. 그리움과 약속
금석문은 국왕의 통치나 백성 지배와 관련한 공적(公的) 기록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몇 가지 사적(私的) 기록이 있어서 흥미롭다.
1. 천전리 서석(書石)
[원명(原名)]
“을사년(525년, 법흥왕 12) 어느날
사훼부(沙喙部) 葛(文王) … 찾아와서 놀다가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게 되었다.
고곡(古谷)이나 무명곡(无名谷)이라, 좋은 돌을 얻어 글을 만들고
서석곡(書石谷)이라는 글자를 쓰게 하였다.
함께 놀러온 벗, 누이는 여덕광묘 어사추녀랑(麗德光妙 於史鄒女郞)이다.
식다살작공인(食多煞作功人)은 …”
[추명(追銘)]
“과거(過去) 을사년 6월18일 새벽에,
사훼부(沙喙部)의 사부지(徙夫知) 갈문왕(葛文王)과 누이 어사추녀랑(於史鄒女郞)께서
함께 놀러오신 이후 (몇)년이 지났다.
누이님을 생각하니 누이님은 과인(過人)이라, 정사년(537)에는 (갈문)왕도 돌아가시니,
그 왕비인 지몰시혜비(只沒尸兮妃)께서 애달프게 그리워하시다가
기미년(539) 7월3일에 그 (갈문)왕과 누이가 함께 보고 글을 써놓았다는 돌을 보러 골짜기에 오셨다.
이때 영즉지(另卽知) 太王의 妃인 부걸지비(夫乞知妃),
사부지왕(徙夫知王)의 아들 탐맥부지(探麥夫知)가 함께 왔다. …”
2. 임신서기석
“임신년(552년 또는 612년) 6월16일에 두 사람이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늘 앞에 서약하기를 금일부터 3년 이후에 충도(忠道)를 지키고 과실(過失)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를 잃으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얻을 것이라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해져 크게 어지러워지면 가히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 따로 먼저 신미년(551년 또는 611년) 7월 22일에
시(詩), 상서(尙書), 예기(禮記), 춘추전(春秋傳)을 3년 안에 차례로 습득하기를 크게 맹세했었다.”
신라의 두 청년이 위와 같은 맹세를 스스로 하고 있다는 것,
그 내용에 국가에 충성하며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자신들도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는 것,
사적(私的)인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 하일식, 연세대학교 사학과교수
- 2009년 10월 14일 국립중앙박물관 은하문화학교 교육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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