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국새(國璽)

Gijuzzang Dream 2010. 10. 3. 15:13

 

 

 

 

 

 

 

 국새(國璽)

 

국가 상징물 … 年 1만6000번 날인

현재 美 · 英 · 日 등 10개국만 사용

 

 

 

 

‘민홍규 사태’ 계기로 본 국새(國璽) A to Z

국가의 상징인 국새가

한 제작자의 사기행각과 담당공무원들의 관리부실로 엉터리로 제작된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새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어떤 국새를 만들어 사용해왔을까.

서명문화가 발달한 서구에서도 국새를 사용할까.

새로운 국새 제작을 앞두고 국새의 의미와 역사를 되짚어 본다.

 

 

 


1. 국새(國璽)란 무엇인가

 

국새(國璽)는

국가의 권리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인장(印章 · 도장)이다.

국인(國印) · 새보(璽寶) · 어보(御寶) · 대보(大寶)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중국 황제가 준 국새와

조선 국왕이 만든 어보를 구분하기도 했다.

 

왕조 시대 때 국새의 이동은

왕위의 계승 및 국가권력 이양의 징표로 여겨졌다.

국새는 외교문서에 쓰는 것, 국내에서 쓰는 것으로 나뉜다.

 

조선이 1392년 건국한 이후 1894년 갑오개혁 전까지

외교문서에는 중국 역대 왕조의 황제들에게서 받은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란 국새를 사용했다.

그러나 중국이 ‘조선국왕지인’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면서

국왕의 문서와 서적 배포 등에 사용할 다양한 ‘어보’가

제작됐다.

 

대한민국 국새는 헌법 개정 공포문 전문,

대통령 명의의 비준서, 훈장 및 포장증,

고위공무원의 임명장 등에 사용되고 있으며

관리는 행정안전부 의정관실 의정과에서 하고 있다.

 


2. 국새 언제 처음 만들어졌나

기록에 보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새는

‘삼국지 위지동이전(三國志 魏志東夷傳)’에서

부여의 예왕(穢王)이 사용한 ‘예왕지인(穢王之印)’이다.

 

삼국시대에도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국새를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요 · 금 · 원 · 명 등에서

금인(金印)을 받아 국새로 썼다.

 

조선시대에는 명 · 청나라로부터 ‘조선국왕지인’이라는

인장을 받았다. 중국으로부터 받은 인장은 대대로 물려가며

쓰고 새로 발급받을 때는 이전에 쓰던 것을

중국에 다시 반납했다.

 

1894년 갑오개혁 후 고종은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끝내며

과거 국새를 없애고 ‘대조선국보(大朝鮮國寶)’ ·

‘대조선대군주지보(大朝鮮大君主之寶)’를 만들어 사용했다.

 


3. 현재 남아 있는 국새는

조선시대 중국으로부터 받은 국새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다만 조선국왕이 만들어 사용하던 어보는

320여 점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과정을 기록한

‘대례의궤(大禮儀軌)’에는 고종황제가 당시

새로 만든 13과(顆 · 도장을 세는 단위)의 인장이

소개돼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대한제국 어보 3개와 국새로 추정되기도 하는 1개의 어새가 남아 있다.

 

일제 총독부와 미군정을 거쳐 우리 정부에 인계된 ‘제고지보(制誥之寶)’와

‘대원수보(大元帥寶)’, ‘칙명지보(勅命之寶) 등 3개 어보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2009년에는 국립고궁박물관이 한 재미교포로부터 ‘황제어새(皇帝御璽)’를 구입했다.

'황제어새'는 1903년 고종 황제가 경운궁에서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황제친서임을 증명하기 위해 찍은 인장이다.

또 1909년 고종 황제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파견을 건의한 헐버트 박사에게 보낸 문서에도

이 인장이 찍혀 있다.

 


4. 대한민국의 1~4대 국새는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듬해인 1949년 5월 1대 국새가 제작됐다.

‘개국국새’로 불린 이 국새는 사방 두치(6.06㎝)의 정방형 인면(印面)에

한자 전서(篆書)로 ‘대한민국지새(大韓民國之璽)’라고 전각되었다.

그러나 이 국새는 분실돼 그 기본 형태조차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다만 행안부 국새백서에는 1대 국새는 은으로 제작됐고,

사용 기간은 1949년 5월5일부터 1962년 12월31일까지였다는 기록이 있다.

1958년 문화공보부가 남긴 초대 국새 사진의 손잡이 부분은 삽살개 모양이지만,

나라의 상징을 삽살개로 한 점 등의 의문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1963년 박정희 정부 때 제작된 2대 국새는 손잡이가 봉황 모양이며

가로, 세로, 높이 7㎝의 정사각형에 한글 전서로 ‘대한민국’이라고 새겨져 있다.

 

1999년 김대중 정부는 가로, 세로, 높이 10.1㎝의 봉황 모양의 3대 국새를 마련했다.

 

2005년 3대 국새에서 균열이 발견되면서 2008년 봉황 모양의 4대 국새를 만들었으나

제작자 민홍규씨의 사기 논란에 휩싸여 폐기키로 했다.


 

5. 국새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1대 국새는 ‘천상당(天賞堂)’이란 도장업체가 만들어 사용해오다 한글로 만들자는 주장이 일어

13년8개월만에 퇴역했다.

 

2대 국새는 1963년 새로운 국새 규정에 따라 당시 ‘필경사’란 인장업체에서 100% 은으로 만들었다.

 

3대 국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과학자들이 설계를 했고 인면 부분은 전각가 여원구씨가 새겼으며,

봉황 형상을 한 손잡이 부분은 김영원 홍익대 조소과 교수가 만들었다.

이 국새는 18금 75%(약 1.5㎏), 은 12%, 동과 아연 등의 합금으로 전체 중량이 2.15㎏이다.

 

문제가 된 4대 국새는 2007년 민홍규씨가 국새제작단장으로 임명돼

순금 2㎏을 비롯, 주석 등의 합금으로 가로, 세로 9.9㎝ 크기로 만들어졌다.

 


6. 어떻게 보관하나

제1대 국새는 분실됐지만 2대와 3대 국새는 국가에서 보관중이다.

1962년 순은으로 만들어 국새의 품격을 낮췄다는 평가를 받는 2대 국새와

1998년 제작돼 균열이 생긴 3대 국새는 용도 폐기돼 경기 성남시 국가기록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2008년 제작된 제4대 국새는 현재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19층 국새실에 보관돼 있다.

4대 국새는 앞으로 폐기될 경우 국가기록원에 보내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국새는 국가의 상징성과 문화재적 가치 등을 따질 때 단순히 값을 매기기는 어렵다.

현재 제작 기록이 남아 있는 3대 국새는 5500만원이, 4대 국새는 1억9000만원의 제작비가 각각 소요됐다.

 


7. 어떻게 가짜 국새가 만들어졌나

 

경찰 조사 결과, 전통기술이 없는 민홍규 전 4대 국새제작단장의 거짓 여론몰이와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담당 공무원들의 무책임이 빚은 황당한 결과였다.

씨는 국새제작단장에 오르기 위해 모 경제일간지 부장에게 금품을 제공하면서 만들어낸

홍보성 기사를 이용해 스스로 전통기술 보유자처럼 행세했다.

민씨는 시민단체를 조직해 자신을 국새제작단에 추천하기까지 했다.

행안부 담당 공무원들은 민씨의 여론몰이를 사실로 믿고

전통기술에 대해 객관적인 확인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국새 제작을 맡겼다.

 

결국 4대 국새는 흙으로 거푸집을 만드는 전통기술이 아니라

석고를 이용한 현대기술로 제작된 엉터리 국새로 판명났다.

 


8. 과거 위조나 분실 사건은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국새 위조 사건은 조선 초기에도 몇차례 나온다.

조선 초기의 문신 신숙주의 아들 신정은

영의정인 아버지 덕에 서른살이 되기 전에 재상의 자리에 올라 노비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재산에 만족하지 못하던 신정은 성종 13년(1482) 고령현 한 사찰에 있던 부유한 노비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임금의 옥새인 어보를 위조했다. 그는 위조된 옥새로 가짜 공문을 만들어

부유한 노비를 다른 사찰로 보내려 했지만 계획이 탄로나 사형을 당했다.

 

또 광해군 4년(1612)에도 인조반정의 명분으로 제공된 ‘김직재의 옥’사건에서도

어보 위조사건이 등장한다. 소북파 인사 100여 명이 숙청당했는데

이는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어보, 관인을 위조한 사건이 발단이 됐다.

이외에도 국새의 위상과 막대한 권한으로 인해 위조사건은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9. 5대 국새 새로 만드나

정부는 국새가 국민에게 주는 상징성을 고려할 때 추문에 휩싸인 4대 국새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고

보고 폐기할 방침이다. 행

안부는 새로 만들어질 5대 국새의 경우 우선 각계 전문가와 국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모양이나 제작방법, 재료 등을 신중히 결정하기로 했다.

당연히 현존하는 최고의 제작기술로 국새를 만들되 국새의 재질은 금·합금에 한정하지 않고

티타늄 등 다양한 신소재도 검토 대상에 포함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공청회를 열어 ‘국새 제작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국새제작위원회의’를 구성해

2011년 상반기에 제작하기로 했다.

 


10. 국새를 사용하는 나라는

세계 200여 개 국가 중 국새가 있는 나라는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일본 등 10개국 정도에 불과하다.

새는 헌법개정 공포문 전문, 외교문서, 고위공무원 임명장 등에 연간 1만6000회 정도 사용되고 있지만

이들 문서엔 대통령이나 총리, 장관 직인(職印) 등도 이중으로 찍히기 때문에

국새 날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중국도 1960년대 문화혁명 이후 국새를 사용하지 않고 박물관에 보관하고

주요 문서엔 국가주석이나 총리, 외교부장 등의 서명을 넣고 있다.

이처럼 대통령이나 외교부 장관 등의 친필 서명만으로도 문서의 효력이 발휘되는 시대인 만큼

국새 필요성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 2010-09-17  문화일보

 

 

 

 

 

 국새도 기가 막힌 ‘금도장 로비’

 

4대 국새 제작과정 비리 의혹 쏟아져

국가 기강 세우려면 차라리 새로 만들자!

 

 

옥새 장인 민홍규 씨가 만든 대한민국 국새. 하지만 이 국새와 관련한 비리 의혹은 커지고 있다.

조선 태종 3년(1403) 4월 8일 명(明)나라 영락제의 즉위를 축하하러 간 등극사(登極使) 하륜(河崙, 1347~1416)이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가지고 한양에 도착했다. 고명은 중국 황제가 주변 제후국 왕을 임명하는 임명장이고, 인신은 왕의 권위를 보장하기 위해 금으로 만들거나 도금한 도장인 금인(金印)이다. 이른바 고명과 금인은 조공책봉 관계의 표징으로 중국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비로소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편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 개국 이래 태조 이성계는 명태조 홍무제에게 고명과 인신을 요청했으나 종계변무 문제(宗系辨誣問題 · 이성계 계보를 바로잡기 위한 문제), 표전 문제(表箋問題 · 정도전이 작성한 외교문서로 명태조가 정도전 소환 요구), 양국 간 국경 마찰 등 외교 현안으로 불편한 관계가 계속돼 성사되지 못했다.

 

이런 험악한 조명관계가 홍무제의 훙거와 정도전의 죽음으로 실마리를 찾았다. 홍무제 사후 명나라는 2대 황제인 건문제가 즉위했으나 3년 후 삼촌 영락제에게 숙청되는 내전이 일어났다.

 

이러한 명나라의 복잡한 내부 상황은 조선에 유리하게 작용해

태종이 2대 황제에게 고명과 인신을 받았음에도 새 황제인 영락제에게 새로운 고명과 인신을 요청하자, 영락제는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조선에게 바로 고명과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 새겨진 금인을 보냈다.

이성계는 말로만 조선 국왕이었고, 조선 국왕이란 명칭은 태종 때부터 사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로써 조선과 명의 사대외교가 정립됐으니 이른바 존명사대(尊明事大) 정책으로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용하면서 조공무역을 통해 경제적 실리를 추구할 수 있었다.

  

조선 초, 명나라 영락제가 ‘조선국왕지인’ 금인 보내

 

조선 국왕이 중국 황제로부터 받은 금인은 흔히 '옥새(玉璽)'라고 통칭했는데, 정확하게 따지면 옥새는 옥으로 만든 인장이다. 진시황제 때 화씨벽(和氏璧)을 얻어 천자의 인장으로 제작한 것이 그 유래인데 중국으로부터 내려진 옥새에는 ‘예왕지인(濊王之印)’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 혹은 ‘조선국왕지인’ 등의 인문(印文)이 새겨져 있었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출범하면서 자주적 의미의 옥새가 처음으로 제작 · 사용됐는데 ‘대한국새(大韓國璽)’와 ‘황제지세(皇帝之璽)’의 두 가지 인문이 새겨졌다.

옥새는 왕조시대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대문서(외교문서) 및 왕명으로 행해지는 국내 문서에 사용됐고, 왕위 계승 시에는 전국(傳國)의 징표로 전수됐다. 또 국왕 행차 시 행렬 앞에 봉송돼 위의당당(威儀堂堂)을 과시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옥새제도가 폐지되고 새로운 국가의 상징으로 국새(國璽) 제도가 마련돼 1949년 5월 ‘대한민국지새(大韓民國之璽)’가 제작됐다.

1970년 3월 인문을 한글 전서체(篆書體)로 고쳐 ‘대한민국’으로 했다.

 

옥새도 태평성대에는 정상적인 왕위 교체로 차기 왕에게 전수됐으나 난세에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세도정치기가 시작되는 순조 원년(1800) 아버지 정조가 승하하자 11세의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가 즉위했으나 어린 나이 탓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장헌)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영조의 외척인 벽파(僻派) 김구주(金龜柱)의 누이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어죽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순왕후는 옥새를 거머쥐자 친정인 경주 김씨 일가를 요직에 발탁하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한 세자의 외척세력인 시파(時派) 세력을 대대적으로 타도했다. 그때 천주교 탄압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엄청난 피바람이 불었는데, 남인시파 정약용(丁若鏞) 집안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산의 셋째 형인 정약종은 순교하고, 둘째 형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 길에 오르게 됐다. 그러나 정순왕후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시파였던 안동김씨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이미 정조 때 간택됐다가 순조비가 된 것이다. 그 후 벽파 정권은 시파 정권으로 교체되고 말았다.

 

순조는 재위 27년(1827) 2월 장남 효명세자(익종, 1809~1830)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으나 효명이 4년 만에 죽자 그의 장남인 8세의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이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헌종이 어려서 할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조의 비, 1789~1857)의 수렴청정이 시작됐고, 헌종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권력 암투의 와중에 호색군주로 전락해 1849년 6월 6일,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어머니 신정왕후(神貞王后, 조대비, 1808~1890)의 무릎에서 승하하고 말았다.

그때 순원왕후는 나인에게 명령해 옥새를 가져오게 하고는 “국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일이 시급하다. 전계군 제3자 이원범(李元範)으로 대통을 잇게 한다”라고 천명했다.

 

세도정치 그늘에 국새 수난…민주주의 시대에 웬 국새 수난?

 

고종이 1903~1905년 러시아, 이탈리아 등에 보내는 비밀외교문서에 사용했던 황제어새.

헌종 10년(1844) 형 이원경(회평군)의 옥사로 천애고아가 돼 강화에 유배된 14세의 이원범은 나무를 하고 농사짓다가, 5년이 지난 19세에 별안간 명을 받아 창덕궁 인정문에서 옥새를 받고 국왕에 즉위했다.

그가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哲宗, 1831~1863, 재위 1849~1863)이다. ‘강화도령’ 철종은 나이는 어리지 않았으나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왕이 돼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던 19세기 3대 63년에 걸친 세도정치는 그야말로 수렴청정의 시대였고, 정상적으로 옥새가 전수되지 못한 혼돈의 시대였다. 세도정권의 그늘 아래 국왕은 하나같이 유약한 군주로 자신의 경륜을 펼치지 못하고 술과 여색에 탐닉해 국정을 그르쳤다.

 

최근 2007년에 제작한 대한민국의 상징인 국새에 대한 비리 의혹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제4대 국새의 주조 과정,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의 국새문화원 건립 지원, 황금 횡령, 금도장의 정 · 관계 로비, 국새 제작 단장이 옥새전각장이 아니라는 이력 등 국새 의혹에 국민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고, 3년간 수면 아래 잠복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니 대한민국이 유린당한 느낌이 든다.

 

2007년은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말이고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해인데, 국새를 제작하고 남은 금으로 16개 도장을 만들어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와 행정자치부 공무원 등에게 13개를 돌리고 3개는 일반인에게 판매했다니 범법행위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누구에게 왜 금도장을 돌렸을까. 책임부서인 행정안전부는 빠른 시일 안에 하얀 가면 뒤에 숨겨진 검은 실체를 샅샅이 밝혀 국가의 얼굴인 국새에 대한 진실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2000만 원 상당의 금도장이 누구에게 전달됐는지, 그 실명을 공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세도정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금의 금도장 로비를 보면서 일제강점기 화신백화점 사주 박흥식(朴興植, 1903~1994)이 순금 명함을 만들어 총독부 고위 관료를 접견해 면담을 성공시켰다는 추악한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국민의 일부를 끝까지 속이고, 국민의 전부를 한때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국민의 전부를 끝까지 속일 수는 없는 것이 역사의 정의가 아닐까. 이명박 정부는 이런 국새라면 하루라도 빨리 폐기하고 새로운 국새를 만들어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2010.08.30 752호(p74~75) 주간동아 [이영철교수의 5분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