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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자(甲寅字)와 활자(금속활자, 동활자, 목활자)

Gijuzzang Dream 2010. 9. 30. 21:08

 

 

 

 

 

 

 

 우리나라의 활자(금속활자, 목활자, 동활자)

 갑인자 (甲寅字)

 

 

 

1420년(세종 2)에 만든 '경자자(庚子字)'가

납(蠟)을 판(板) 밑에 펴서 그 위에 글자를 차례로 맞추어 꽂아 사용하는 형태이므로

글자가 가늘고 빽빽하여 쏠리고 비뚤어지는 등 정밀하지 못하여 보기가 어려워지자

좀더 큰 활자가 필요하다하여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었다.

 

1434년(세종 16) 갑인년(甲寅年)에 세종의 왕명에 의해

이천(李蕆) · 김돈(金墩) · 김빈(金鑌) · 장영실(蔣英實) · 이세형(李世衡) · 정척(鄭陟) · 이순지(李純之)

등이 2달 동안 20여만 자의 글자를 주조하였다.

이 활자를 만드는 데 관여한 인물들은 당시의 과학자나 또는 정밀한 천문기기를 만들었던 기술자였으므로

활자의 모양이 아주 해정하고 바르게 만들어졌다.

 

글자는 경연청(經筵廳)에 소장된《효순사실(孝順事實)》《위선음즐(爲善陰騭)》《논어》등

명(明)나라 초기 판본(版本)을 자본(字本)으로 삼았다.

 

대자와 소자의 크기가 고르고 활자의 모양이 바르고 네모가 평정(平正)하여

글자의 크기가 고르게 조립되었으며,

조판(組版)도 자판의 빈틈을 납(蠟)을 사용하지 않고 대나무(竹木)를 이용, 빈틈을 메우게 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 갑인자본을 보면 글자가 선명하고 아름답다.

글자 획에 필력(筆力)의 약동이 잘 나타나고 글자 사이가 여유 있게 떨어지고 있으며,

판면이 커서 늠름하다. 또 먹물이 시커멓고 윤이 나서 한결 선명하고 아름답다.

 

하루에 활자를 찍어 내는 양도 40여 장에 달해 경자자보다 곱절 이상의 생산력을 가질 수 있었다.

 

'갑인자'는 우리나라 활자본의 백미이다.

 

 

 

 

갑인자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섯 번에 걸쳐 개주(改鑄)되었다.

 

①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활자를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

②1580년(선조 13) 경진년에 만들어진 활자를 ‘재주갑인자(再鑄甲寅字) 혹은 경진자(庚辰字)’

③1618년(광해군 10)에 만들어진 활자를 ‘삼주갑인자(三鑄甲寅字) 혹은 무오자(戊午字)’

④1668년(현종 9)에 주조된 활자를 ‘사주갑인자(四鑄甲寅字) 혹은 무신자(戊申字)’

⑤1772년(영조 48)에 만들어진 활자를 ‘오주갑인자(五鑄甲寅字) 혹은 임진자(壬辰字)’

⑥1777년(정조 1) 주조된 활자를 ‘육주갑인자(六鑄甲寅字) 혹은 정유자(丁酉字)’ 라고 부른다.

 

 

 

초주갑인자=갑인자

1580년(선조 13)에 재주(再鑄)될 때까지 140여 년간에 걸쳐 오래 사용되었기 때문에

전해지고 있는 인본의 종류가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 소장의 ≪대학연의(大學衍義)≫,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분류보주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등을 초인본으로 들 수 있다.

 

그리고 갑인자에 붙여 특기할 것은 이 활자에 이르러 처음으로 한글활자가 만들어져 함께 사용된 점이다.

만든 해와 자체가 갑인자와 전혀 다르므로 ‘갑인자병용한글활자’

또는 처음으로 찍은 책의 이름을 따서 ‘월인석보한글자’라 한다.

이 한글활자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수양대군 등이 세종의 명을 받고 1446년에 죽은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1447년 7월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편찬하여 국역한〈석보상절〉과

그것을 세종이 읽고 지었다는 국한문본〈월인천강지곡〉이 한글활자로 찍혀졌으므로

세종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세종 때 만들어진 갑인자는 획이 굵고 강직한 인서체(印書體)인 것이 특징이며,

조선시대 활자의 기본이 되었으며,

세종이 우리의 글자를 제정하고 처음으로 만들어진 활자본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또한 갑인자는 지속적으로 보완, 발전되어 갔다.

 

초주갑인자는 오래 사용하는 사이에 활자가 닳고 이지러지고 부족한 글자가 생겨

1499년(연산군 5) ≪성종실록≫을 찍어낼 때와 1515년(중종 10)에 보주(補鑄)가 이루어졌고,

그 밖에도 수시로 목활자를 만들어 보충하며 선조 초까지 사용되었다.

 

 

재주갑인자=경진자

1580년(선조 13) 경진(庚辰)에 주조한 활자를 그 해의 간지를 따서 ‘경진자’라 하고,

이것이 갑인자를 두 번째로 다시 주조한 것이므로 ‘재주갑인자’라 일컫는다.

이 활자의 재주에 관하여는 1573년(선조 6) 계유년과 1580년 경진년에 이루어졌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계유자’설(癸酉字說)은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초(眉巖日記草)≫에

“갑인자 주조의 철은 먼저 466근1냥1전을 받아 내놓았는데, 주자로 사용된 것이 397근3전”이라고 한

기록에 의한 것이다.

 

‘경진자’설(庚辰字說)은 ≪광해군일기≫에

“평시의 서적인쇄는 전적으로 주자에 의존해왔는데,

그 뒤 1580년 경진에 선왕인 선조가 또 갑인자의 개주를 명하여 일국에 보급하게 함으로써 큰 도움을

주더니 불행히도 병화를 겪는 사이에 옛 활자를 잃어, 지금은 오직 나무활자를 사용하고 있다.”라고 한

기록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유희춘의 ‘계유자’설은 그 해에 을해자를 크게 보주(補註)하기 위하여 내놓은 철을

갑인자 주조를 위한 것으로 착각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재주갑인자는 초주갑인자에 비하면 정교도가 떨어지고 운필에 박력이 적지만,

이후의 다른 개주갑인자보다는 낫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재주갑인자의 인본으로는

≪회찬송악악무목왕정충록(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 · ≪시전대전(詩傳大全)≫ 등이 있다.

 

 

삼주갑인자=무오자

갑인자의 세 번째 개주는 1617년(광해군 9)에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던 종래의 주자제도를 복구하고자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고 주조를 시작하여 다음해인 1618년 7월에 완성되었다.

그 해의 간지를 따서 ‘무오자(戊午字)’ 또는 ‘광해군동자(光海君銅字)’라 한다.

갑인자를 개주한 것 중에서는 가장 박력이 없으나, 갑인자의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활자의 특징은 1623년(인조 1) 6월에 사간 정온(鄭蘊)에게 내사(內賜)한 기록이 적힌

유시부(柳時溥) 소장 ≪서전대전(書傳大全)≫이 발견됨으로써 밝혀진 것이다.

 

이 활자로 찍어낸 책은 그 밖에 ≪시전대전(詩傳大全)≫이 겨우 전해지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근년에 일본 동경대학교 도서관에서 1622년(광해군 14)에 찍은 ≪황화집(皇華集)≫과

국내의 오운(吳澐) 종손가에 있는, 1620년 3월 임금이 신하들과 선농단(先農壇)에 제사지내고

밭갈이 한 다음 주연을 베풀 때 신하들이 읊은 ≪노주연송덕회편(勞酒宴頌德會編)≫을

각각 이 무오자로 찍어냈음이 밝혀졌다.

 

이렇듯이 활자 인본의 전래가 극히 드문 것은 임진왜란 후의 어려운 사정 속에 이루어진 개주였기 때문에

그 규모가 작은데다가 1624년 이괄의 난으로 모두 흩어져 없어진 데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전래되고 있는 인본의 종수가 적은 점을 들어

임진왜란 후에 만들어 쓴 목활자의 부족과 이지러진 것을 보충하기 위한 보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인본들에서 목활자가 섞여 있지 않은 동일한 갑인자계의 동활자로 찍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듯이 다른 개주갑인자와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사주갑인자=무신자

갑인자의 네 번째 개주는

호조판서와 병조판서에 있으면서 수어사(守禦使, 남한산성을 지키던 수어청의 우두머리)를 겸직한 

김좌명(金佐明)이 1668년(현종 9)에 호조와 병조의 물자 및 인력을 사용하여

수어청에서 대자 6만6100여 개와 소자 4만6천여 개의 동활자를 주조한 것으로,

이 활자들은 그가 죽은 뒤 교서관(校書館)으로 옮겨졌다.

이것을 그 해의 간지를 붙여 ‘무신자(戊申字)’ 또는 ‘무신갑인자’라 한다.

 

이 활자도 개주갑인자로서는 정교롭지 못하나 무오자보다는 박력이 있으며,

영조 말기까지 백여 년 동안 사용되어 그 인본의 종수가 매우 많다.

이와 같이 오래 사용되었기 때문에 초기에 찍은 책은 인쇄가 깨끗하지만,

뒤에 찍은 것은 활자가 닳고 이지러지고 목활자가 많이 섞여 인쇄가 정교하지 않은 편이다.

그리고 이 무신자와 함께 한글활자가 다시 만들어져 국역본의 인출에 병용되었음도 특기할만하다.

 

사주갑인자본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잠곡선생연보(潛谷先生年譜)≫ · ≪동래선생음주당감(東萊先生音註唐鑑)≫ · ≪시경언해(詩經諺解)≫ 등이 있다.

 

 

오주갑인자=임진자

갑인자의 다섯 번째 개주는 정조가 동궁으로 있던 1772년(영조 48)에

초주갑인자본 ≪심경(心經)≫과 ≪만병회춘(萬病回春)≫을 자본으로 하여 주조한 것으로

‘임진자(壬辰字)’라 하며 교서관에 두고 사용하였다.

 

정조의 어정서(御定書)와 명찬서(命撰書)를 해제하여 연대순으로 엮어놓은 ≪군서표기(群書標記)≫에

수록된 오주갑인자 인본을 보면,

1772년에 ≪역학계몽집전(易學啓蒙集箋)≫, 1773년에 ≪신정자치통감강목속편(新定資治通鑑綱目續編)≫,

1775년에 ≪경서정문(經書正文)≫, 1777년에 ≪원속명의록(原續明義錄)≫, 1799년에 ≪아송(雅誦)≫

등이 각각 인출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임진자 조판의 실물이 있다.

 

 

육주갑인자=정유자

마지막으로 나온 갑인자계 동활자는

1777년에 평안감사 서명응(徐命膺)에게 명하여 15만 자를 더 주성하게 한 것으로 ‘정유자(丁酉字)’라 한다.

'정유자'는 가주(加鑄)한 것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교서관에 둔 임진자에 합치지 않고 규장각의 본원에 따로 두고 사용하였다.

 

책을 인쇄할 때는 감독을 맡은 각신(閣臣)이 당시 주로 사용했던 임진자 · 정유자 · 임인자(재주한구자) 중

어떤 활자로 찍을 것인가를 임금에게 품의하여 사용하고, 다 쓰면 원위치로 돌려보내서 간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글자체가 서로 같아 인본의 식별이 어려워서

종래는 정유자가 주성된 1777년 이전의 인본은 모두 ‘임진자본’이고,

그 이후의 인본은 모두 ‘정유자본’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군서표기≫에 의하면,

1781년(정조 5)에 정유자로 찍은 ≪팔자백선(八子百選)≫이 최초의 것이며,

그 이후 정유자본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러다가 1794년에 이 활자를 창경궁의 옛 홍문관에 설치했던 주자소로 옮겼다.

 

이는 1814년(순조 14)에 만든 ≪판당고(板堂考)≫ 주자소응행절목(鑄字所應行節目)에

“위부인자 동자 큰 글자 10만5638자, 작은 글자 4만4532자는 평안도 감영인 기영(箕營)에서 주조한 것”

으로 표시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1857년(철종 8) 8월 주자소에 화재가 발생하여 활자가 모두 소실되었는데,

그 중의 '위부인자'가 바로 '정유자'였다.

 

그때 화재로 소실된 다른 활자는 다음해에 다시 주성되었지만 정유자만은 주조되지 않았다.

그것은 교서관에 둔 임진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정유자는 1857년까지 인쇄에 사용되고, 그 이후는 임진자가 조선 말기까지 사용되다가

다른 활자와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어 그 잔존 활자가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한글활자를 언제 만들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나무로 만들어 임진자 · 정유자와 병용되어

≪속명의록(續明義錄)≫ 등의 국역본을 적지 않게 찍어내는 데 이용되었다.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증도가(證道歌)>

 

불교 경전을 대량 찍어내는 데 목판인쇄가 제격이었으나

 

                                   

수요가 많지 않은 서적의 목판인쇄는 비능률적이었다.

이를 위해 구리와 철을 재료로 한 금속활자가 나타났다.

진흙을 이용한 활자인쇄술의 초기 기록은 중국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금속활자는 고려에서 처음 개발된다.

중국에서는 주로 목판인쇄가 성행했으며, 금속활자는 15세기 말에 되어야 등장한다.

금속활자는 공정이 목활자에 비해 좀 복잡하지만 목활자의 마모되는 단점을 줄일 수 있었다.

   

 

고려 금속활자의 우수성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흔히 ‘직지(直指)’라고 부름)≫은

현존하는 금속활자본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공인받았다.

1377년(고려 우왕 3)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했음을 발문에 밝혀놓았다.

독일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인쇄보다 78년 앞선 것이다.

 

세계의 공인은 아직 받지 못했지만,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따르면

1234년(고려 고종 21) 금속활자로 ≪상정예문(詳定禮文)≫ 28부를 찍어 해당관청에 나눠주고

보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비록 책은 전하지 않더라도

문헌상으로 직지보다 앞선 13세기 초 이미 금속활자 인쇄가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1239년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證道歌)≫가 금속활자로 인쇄됐다는 기록이 전한다.

발문에 ‘증도가(證道歌)는 참선하는데 매우 요긴한 책이지만 전래되지 않아

기존에 금속활자로 간행된 이 책을 1239년에 다시 목판으로 새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근 세계최초의 금속활자가 새로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이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즉 ‘증도가’를 인쇄한 금속활자가 나타났다는 주장이다.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세종 때 활자의 꽃 ‘갑인자(甲寅字)’ 세계 첫 납활자 ‘병진자(丙辰字)’

 

조선시대에 활자주조 관청인 ‘주자소’를 설치해 만든 활자가 40여 종이나 된다.

새 임금이 즉위하면 기존의 활자를 녹여 새 활자를 만들어냈다.

세종은 인쇄문화를 꽃피우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세종 때 만든 ‘갑인자(甲寅字)’는 금속활자의 꽃으로 평가받는다.

한글창제 직후인 1447년 한글 금속활자까지 만들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인쇄했다.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는 1403년(태종 2)에 만든 계미자(癸未字)로,

경연(經筵)에 소장되어 있던 ≪시경(詩經)≫의 글자체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갑인자는 1434년(세종 16) 활자의 네 면이 반듯하고 평평하며,

크기는 큰 글자(가로 1.6×세로 1.4㎝), 작은 글자(가로 0.8×세로 1.4㎝), 높이는 0.6~0.8㎝이다.

글자체가 부드럽고 아름다워 조선 후기까지 여러 차례 다시 만들어졌다.

 

이밖에 세종 때 1436년(세종 18) 세계최초의 납활자인 ‘병진자(丙辰字)’가 선보이기도 했다.

납활자는 19~20세기 근대적 인쇄양식을 대표하는데

이미 15세기에 조선에서 납활자가 선보인 것이지만 이후 계속 만들었다는 기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성종이 즉위하면서 유교서적이 대거 인쇄되기 시작하고(세조 때까지만 해도 불교서적인쇄가 많았다)

이때 주조된 활자가 ‘갑진자(甲辰字)’이다.

1484년(성종 15) 중국에서 간행된 ≪구양공집(歐陽公集)≫, ≪열녀전(烈女傳)≫의 글자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1493년(성종 24) 명나라 목판본 ≪자치통감강목≫의 글자체를 바탕으로 한

‘계축자(癸丑字)’가 주조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목판인쇄와 목활자>

 

임진왜란으로 금속활자 많이 잃어 목활자 성행

 

고려시대의 목판인쇄술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전래되어

중앙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판각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

경비와 인력을 줄이기 위한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많은 문집과 족보가 목활자로 간행됐다.

조선 초기 왕실불교의 성행은 불교경전의 간행에 영향을 끼쳐

세조 때는 간경도감에서 불교경전 등을 한글로 번역해 간행하기도 했다.

 

훈련도감이 교서관(校書館)을 대신해 목활자를 만들고 인쇄를 담당했는데

양난 후의 혼란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 활자들을 ‘훈련도감자(訓練都監字)’라고 부른다.

금속활자 인쇄가 복구된 뒤에도 금속활자 인쇄를 보완하면서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의 금속활자>

 

고종 때 도입한 일본 납활자가 득세

 

조선의 인쇄문화는 임진왜란(1592, 선조 25) 전과 후로 구분된다.

많은 활자와 전적들이 전쟁으로 소실되었다.

또 일부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가기도 한 것은 일본의 인쇄문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617년(광해군 9)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던 기존의 금속활자 기술을 복귀하고자

다시 주자도감(鑄字都監)이 설치되고 갑인자를 닮은 금속활자를 만들기 시작,

다음해 1618년 ‘무오자(戊午字)’가 주조되어 영조 말기까지 약 100여 년 동안 사용되었다.

 

정조가 즉위하고 1777년 평안감사 서명응에게 명령해서

갑인자를 글자체로 하는 크고 작은 활자 15만여 자를 만들게 했다.

이 활자는 ‘정유자(丁酉字)’로 규장각의 본원인 내각(內閣)에 보관하면서 사용했다.

국립도서관격인 규장각은 도서의 정리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인쇄정책의 총본산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16년(순조 16) ‘전사자(全史字)’

1858년(철종 9) ‘삼주한구자(三鑄韓構字)’ ‘재주정리자(再鑄整理字)’ 등이 주조되었으나

한국 전통 금속활자는 1880년(고종 17) 일본에서 만든 납활자가 도입되면서 점차 사용이 줄었다.

 

일본은 1590년 이탈리아의 선교사로부터 납활자를 도입한 이래

19세기에 이미 납활자 인쇄가 활성화되었다.

납활자는 금속활자보다 열처리 공정이 쉽고 가격도 쌌기 때문에 근대의 인쇄문화는 납활자의 시대였다.

- 이승철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의 인쇄 문화>

- 2010.09.09  중앙 

 

 

 

 

시대

활자명

연도

활자 구분

특징

고려

증도가자(證道歌字)

13세기 초

금속활자

현재 전하지 않음

남명천화상송증도가

(南明泉和尙頌證道歌) 보물 758호

고종 26년

(1239)

증도가자(證道歌字)로 찍어낸 금속활자본을 최이(崔怡=최우崔瑀: 최충헌의 아들)가 나중에 목판으로 다시 만들어 새로 찍은 번각본(목각본)

문헌상 最古 금속활자본

(현재 전하지 않음)

 

상정고금예문

(詳定古今禮文)

고종 21년

(1234)

금속활자

 

<직지(直指)>

또는 <직지심체요절>

(直指心體要節)

 

정식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우왕 3년

(1377)

금속활자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파리 국립도서관소장, 고려의 <직지심체요절>은 독일의 구텐베르크의 ‘42행 성경’ 금속활자판보다 78년 앞선 것으로 알려짐)

조선

계미자(癸未字)

태종 3년

(1403)

동(銅)활자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

경자자(庚子字)

세종 2년

(1420)

동활자

 

갑인자(甲寅字)

①초주갑인자

(初鑄甲寅字)

세종 16년

(1434)

동활자

 

②재주갑인자

(再鑄甲寅字)

일명 경진자(庚辰字)

선조 13년

(1580)

동활자

 

③삼주갑인자

(三鑄甲寅字)

일명 무오자(戊午字)

광해군 10년

(1618)

동활자

 

④사주갑인자

(四鑄甲寅字)

일명 무신자(戊申字)

현종 9년

(1668)

동활자

병용(倂用) 한글활자

⑤오주갑인자

(五鑄甲寅字)

일명 임진자(壬辰字)

영조 48년

(1772)

동활자

 

⑥육주갑인자

(六鑄甲寅字)

일명 정유자(丁酉字)

정조 1년

(1777)

동활자

 

병진자(丙辰字)

일명

강목대자(綱目大字)

세종 18년

(1436)

연(鉛, 납)활자

세계 최초의 납활자(鉛活字)

정운대자(正韻大字)

세종 30년

(1448)

동활자

병용(倂用) 한글활자

석보상절(釋譜詳節)

세종 31년

(1449)

한글금속활자

최초의 한글 금속활자본

경오자(庚午字)

세종 32년

(1450)

동활자

 

홍무정운역훈

(洪武正韻譯訓)

단종 3년

(1455)

갑인 동활자

(小字)

한글 木활자

(大字)

병용(倂用) 한글활자

을해자(乙亥字)

일명 임신자(壬申字)

세조 1년

(1455)

동활자

병용(倂用) 한글활자

정축자(丁丑字)

일명 금강경정문대자

(金剛經正文大字)

세조 3년

(1457)

동활자

 

무인자(戊寅字)

일명 교식자(交食字)

세조 4년

(1458)

동활자

 

훈사대자(訓辭大字)

세조 7년

(1461)

동활자

 

을유자(乙酉字)

세조 11년

(1465)

동활자

을유자체 목활자(15세기 후반)는 세조 때의 호불정책과 불서간행사업의 영향으로 불교서적을 편찬

갑진자(甲辰字)

성종 15년

(1484)

동활자

 

계축자(癸丑字)

성종 24년

(1493)

동활자

 

인경자(印經字)

연산군 1년

(1495)

목활자

병용(倂用) 한글활자

병자자(丙子字)

중종 11년

(1516)

동활자

 

개주갑진자

(改鑄甲辰字)

중종 11년

(1516)

동활자

 

계유자(癸酉字)

선조 6년

(1573)

동활자

 

경진자(庚辰字)

선조 13년

(1580)

동활자

 

관상감활자

(觀象監活字)

일명 인력자(印曆字)

16세기

무쇠(철)활자

 

▲훈련도감자(訓練都監字)

<기효신서절요>

(紀效新書節要)

선조 28년

(1595)

木활자

훈련도감 교재를 출판

木활자 소자(小字)

<기효신서>

(紀效新書)

선조 29년

(1596)

木활자

갑진자체 훈련도감자

선조 36년

(1603)

木활자

<소재선생문집(蘇齋先生文集)>

경오자체 훈련도감자

- 안평대군 글씨체

선조 36년

(1603)

木활자

<주문공교창려선생집

  (朱文公校昌黎先生集)>

을해자체 훈련도감자

선조 36년

(1603)

木활자

<동의보감(東醫寶鑑)>

병자자체 훈련도감자

선조 36년

(1603)

木활자

병용(倂用) 한글활자

<황화집(皇華集)>

갑인자체 훈련도감자

광해 10년

(1618)

木활자

<신기비결(神器秘訣)>

소자(小字)

             훈련도감자

인조 5년

(1627)

木활자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훈련도감은 임진왜란중인 선조 26년(1593) 군사훈련을 위해 설치되어 훈련교재책을 찍었는데, 이때 쓰인 활자가 훈련도감자의 시초이다.

<주문공교창려선생집> 이항복(李恒福)의 발문에 의하면, 훈련도감은 간간이 책을 찍어 팔아서 군자금으로 충당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는 전쟁중 또는 전쟁직후여서 책을 찍는데 금속활자는 주조하지 못하고, 급한 대로 나무로 활자를 만들었다.

훈련도감자는 광해 10년(1618) 갑인자체의 동활자가 주조된 다음부터는 쓰이지 않고 그 이후 지방에서 이 훈련도감자들과 비슷한 활자로 찍은 책이 더러 있으나 훈련도감자로 찍은 책은 아니다.

내의원자(內醫院字)

선조 41년

(1608)

동활자

병용(倂用) 한글활자

무오자(戊午字)

광해군 10년

(1618)

동활자

병용(倂用) 한글활자

무신자(戊申字)

현종 9년

(1668)

동활자

 

낙동계활자

(洛東契活字)

현종 14년

(1673년경)

동활자

뒤에 현종실록자로 흡수됨

한구자(韓構字)

숙종 5년

(1679)

동활자

 

인서체철자

(印書體鐵字)

숙종 10년

(1684년경)

무쇠(철)활자

병용(倂用) 한글활자

원종자(元宗字)

숙종 19년

(1693)

동활자

 

숙종자(肅宗字)

숙종 19년

(1693)

동활자

 

홍계희자(洪啓禧字)

영조 25년

(1749)

동활자

 

임진자(壬辰字)

영조 48년

(1772)

동활자

 

정유자(丁酉字)

정조 1년

(1777)

동활자

 

재주한구자

(再鑄韓構字)

정조 6년

(1782)

동활자

 

생생자(生生字)

정조 16년

(1792)

木활자

 

정리자(整理字)

정조 20년

(1796)

동활자

 

희현당철자

(希顯堂鐵字)

정조 22년

(1798)

 

 

춘추관자(春秋館字)

정조 21년

(1797)

무쇠(철)활자

 

돈암자(敦岩字)

순조 15년

(1815)

동활자

 

전사자(全史字)

순조 16년

(1816)

동활자

병용(倂用) 한글활자

교서관필서체

(校書館筆書體鐵字)

헌종 3년

(1837)

무쇠(철)활자

 

삼주한구자

(三鑄韓構字)

철종 9년

(1858)

동활자

 

재주정리자

(再鑄整理字)

철종 9년

(1858)

동활자

병용(倂用) 한글활자

보광사인서체자

(寶光社印書體字)

고종 6년

(1869)

동활자

 

신연활자(新鉛活字)

고종 17년

(1880)

연(鉛, 납)활자

일본에서 만든 납활자 도입

광인사활자

(廣印社活字)

고종 21년

(1884)

동활자

 

실록자(實錄字)

태백산본

태조~명종실록자

선조 36년

(1603)

木활자

(갑인 동활자, 을해자체 木활자)

선조실록자

광해군 9년

(1617)

木활자

(갑인 동활자, 을해자체 木활자)

인조실록자

효종 3년

(1652)

木활자

(경오자체)

효종실록자

현종 원년

(1659)

木활자

(필서체)

현종실록자

숙종 3년

(1677)

동활자

 

헌종실록자

철종 2년

(1851)

동활자

 

木활자

황양목(黃陽木)을 주로 썼으나 벚나무, 배나무, 자작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고염나무, 박달나무 등도 사용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목판인쇄가 성행해서 목판을 새길 때 잘못 새긴 판목이 있으면 그 글자만을 도려내고 바른 글자를 새겨서 박는 상감(象嵌) 방법이 있었는데 이때 상감한 글자를 새긴 나무 조각이 바로 목활자이다. 그때의 판목과 상감자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 전통은 이후까지 이어왔다.

오늘날 남아있는 금속활자로 찍은 책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1377년의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보면 거의 목활자로 찍은 듯한 인상이 깊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활자에 관한 기록은 1395년 2월1일에 인쇄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서문의 “백주지사 서찬(徐贊)의 각자(刻字)로 서적원(書籍院)에서 100여 본을 찍었다”라는 글에 나타난다. 1395년 10월에 찍은 <개국원종공신녹권>을 보면 간혹 금속활자도 몇 자 섞여있지만 거의가 목활자로 인쇄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흥성했던 금속활자는 주조할 때 우선 목활자를 먼저 새겨서 그것을 부형으로 하여 주조작업을 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주조되었고 이후로도 그 기술이 전해져왔다. 목활자만을 새겨서 인쇄한 경우도 많지만 금속활자가 부족하거나 일그러져 못쓰게 되었을 때 그 대책으로 목활자를 보자(補字)로 많이 만들어 썼다. 조선시대를 통해 중앙이나 지방 관아에서 새긴 목활자, 민간의 사찰 · 서원 · 문중 · 개인이 새겨서 쓴 목활자도 많았다. 특히 민간에서는 새긴 목활자로 달구지나 지게로 지고 이동하면서 족보 · 문집 · 전기 등의 책을 영업적으로 인쇄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일제시대까지 계속되어 연활자(鉛活字)로 찍은 책을 보면 목활자를 간혹 섞어서 만든 것을 찾아볼 수 있다. 해방직후에도 목활자가 사용된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금속

활자

재료에 따라 놋쇠활자(靑銅活字), 구리활자(銅活字), 납활자(鉛活字), 쇠활자(鐵活字), 아연활자(亞鉛活字)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합금이 아닌 순수한 금속만으로 활자를 만들면 녹이 자주 나거나 오래 견디지 못하므로 오래 견딜 수 있도록 합금으로 만든다. 활자를 주조할 때 글자 획을 제대로 내게 하거나 끓여서 녹인 다음 식혀서 뒷마무리를 제대로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도 합금으로 활자를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금속활자라 하면 어느 성분이 많은가에 따라 명칭이 정하여지지만 주성분 이외의 다른 금속의 성분도 어느 정도는 섞여 있기 마련이다.

 

금속활자가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쓰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금속활자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려시대 기원설과 조선시대 기원설로 크게 나누어진다.

고려시대 기원설은 문종(1047-1083 재위) 때, 숙종 7년(1102), 고종 6-16년(1219-1229)의 세 가지 설로 나눌 수 있고, 조선시대 기원설은 1403년(태종 3)을 주장하는 안춘근(安春根)의 설이 있다. 이중 1403년의 설을 따른다고 해도 독일의 J. 구텐베르크가 마인츠에서 1435-1445년 사이에 활자를 주조했던 때보다도 40여 년이나 앞선다. 더구나 고려 때의 활자 실물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개성박물관에 1과씩 남아 있어, 앞서서 제작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1. 목판인쇄의 역사

 

1)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신라의 목판 인쇄물 중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것은,

1966년 10월 13일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을 수리하던 중 탑신부에 안치된 사리함 속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비록 소형의 목판 권자본이긴 하나

다라니 경문의 전부를 완전하게 새겨 글자 면을 위로 놓고 먹물을 칠한 다음,

그 위에 종이를 놓고 부드러운 헝겊 뭉치로 문질러서 찍어냈다.

장정(裝訂) 또한 낱장이 아닌 도서의 초기 형태인 권자본으로 되어 있고

판각술도 매우 정교하며 글자체도 필력이 한결 약동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목판 인쇄술의 성격과 특징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인쇄물 중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이라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의 말엽에 이르러서는 목판 인쇄술이 더욱 발전하여

우리 산수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문(詩文)을 모아 인쇄물로 편찬해 내기까지 했다.

   

2) 고려시대

고려는 국가의 기본 이념과 내세관을 불교에 두어 국교로서 우대하였지만

치세(治世)의 현실은 유교가 바탕이었다. 과거를 거쳐 많은 문사들이 잇따라 배출되었기 때문에

비록 문인들이 소외되었던 무신 집정기라 하더라도 저술이 끊이지 않았으며,

학문의 범위도 넓고 분야도 다양했다.

 

고려시대에는 사찰에서 많은 불경을 간행하였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1007년 총지사에서 찍어낸 <보협인다라니경>으로 불탑에 봉안하였던 두루마리이다.

그 후 현종 2년(1022) 거란이 침입하자 불력으로 막고자 송악 내흥왕사에서

1087년 까지 대장경판을 새겨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였는데

이 경판이 <초조대장경>이며 의천이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새긴 대장경이 <속장경>이다.

 

두 경판은 1232년 몽고란 때 불타고 없어졌지만 불타기 전에 찍어낸 책은 일부 전한다.

강화도 천도이후에는 강화도에 대장도감, 남해도에 분사도감을 설치하고

1236년부터 16년 동안 다시 새긴 대장경이 <재조대장경>이며 현존하는 해인사 팔만대장경이다.

오랜 기간 원형이 잘 보존되고 그 많은 경판에 오자가 없고

글씨와 새김이 명필명공(名筆名工)의 한 사람 솜씨 같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큰 자랑으로 여기는 세계적인 문화재이다.

   

3) 조선시대

조선왕조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대장경 판의 인쇄나 각 사찰의 간경사업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태종 3년(1403) 계미자가 동활자로 주조되기 전의 조선 건국 초기에는 주로 목판이나 목활자를 만들어

서적을 인출했다.

이 무렵에 간행된 목판본으로는 태조 4년에 찍은 <개국원종공신록권(開國原從功臣錄券)> 등이 있으며,

목활자본으로는 태조 4년에 간행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태조 6년에 목판본을 목활자본으로 다시 찍은 <개국원종공신공록권> 등이 있다.

 

유교가 번성했던 조선시대에는 <사서오경>과 <성리대전>이 가장 많이 읽혔다.

주자소(鑄字所)에 보관된 목각판으로 서책을 인출하여 각 지역의 향교 등에 배포하였고,

개인적으로 책을 가지려는 사람은 종이를 가지고 가기만 하면 책을 인쇄해 올 수 있었다.

그만큼 중앙 정부가 유교 경전의 인쇄 및 보급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2. 목활자의 종류

고려 우왕 3년(1377)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直指心經)>을 면밀히 조사해 보면,

금속활자에서 부족한 글자를 목활자로 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미 그 이전부터 목활자가 인쇄에 쓰였다는 증거가 된다.

목활자본이란 인본에 사용된 활자가 모두 목활자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나라에 현재 전해지고 있는 최초의 목활자 인쇄물로는

조선 태조 4년(1395), 태조 6년(1397)에 인출한 <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券)> 이라는 문서이다.

 

현재 전해오는 목활자 인본은 모두 조선시대 것들이다.

이 중에는 관서에서 목활자를 만들어 인쇄한 것이 많지만

민간에서 직접 목활자를 만들어 찍어낸 인본들도 많다.

목활자인쇄는 1895년(고종 32) 학부(學部)에서 목활자로 <국민소학독본(國民小學讀本)> 등

교과서를 인쇄한 후에는 납활자 인쇄로 대체되었으나,

특히 영남 · 호남 지방 등의 민간에서는 8 ·15광복 무렵까지 사용되었다.

 

1) 서적원자(書籍院字)

조선 초 왕조 교체의 혼란기인 태조 4년(1395) 백주 지사인 서찬(徐贊)이 목활자를 만들어

서적원에 바침으로써 건국 초기에 절실히 필요했던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100여 부 찍어서 반포했다. 이 목활자를 ‘서적원자’라 일컫는데,

서찬이 만들어 바친 활자라는 점에서 ‘서찬자’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태조는 개국 후 즉위하자 개국 공신과 원종공신들에게 녹권(錄券)과 교서(敎書)를 내려

논공행상을 했는데, 이들 녹권과 교서가 처음에는 모두 필서(筆書)였다.

그러나 필서에 의한 녹권은 본문 내용이 동일함에도 필서자에 따라 글씨체가 각각 다르고

오탈자가 적지 않아 이를 보충하는 등 조잡한 면을 보였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태조 4년(1395) 목활자와 목판인쇄를 병행하였는데, 이때 사용된 목활자를 ‘녹권자’로 부르고 있다.

   

2) 동국정운자(東國正韻字)

<동국정운(東國正韻)>은 세종이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르게 잡기 위해 편찬한 책으로,

신숙주 등 집현전의 여러 학자들이 왕명을 받들어 완성하자

세종 29년(1447) 목활자를 만들어 찍어 낸 다음 각 도와 성균관 등에 배포하였다.

이 책을 찍은 목활자 중 한자 큰 자를 ‘동국정운자’, 한글 큰 자를 ‘동국정운 한글자’로 부르고 있다.

 

한편,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 잡고자

동왕 29년(1447)에 <동국정운>을 완성하고 또 다시 한자의 중국음을 정확히 나타내기 위해

당시 명나라에서 새로 엮은<홍무정운>의 음을 한글로 표기하는 작업을 착수하였다.

이 작업은 사람을 요동에 보내 정확한 음운을 결정하게 하는 등 오랜 시일이 걸린 탓에

세종 때 작업이 완성되지 못하고 문종 때의 교열을 거쳐

단종 3년(1455)에야 비로소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이 인출되었다.

이 책을 인출하기 위해 쓰인 목활자 중 한자의 큰 자를 ‘홍무정운자’라 하고,

한글의 큰 자와 작은 자를 ‘홍무정운 한글자’라고 부른다.

   

3) 을유자체자(乙酉字體字)

세조 때의 호불정책과 불서 간행사업의 촉진은 사찰에 큰 영향을 주어

많은 불교서적을 목활자로 찍어내게 했다. 이때의 목활자는 제작한 사찰과 시기,

그리고 인출 경위 등에 관해서는 전해오는 바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글자체가 을유자와 닮아 ‘을유자체 목활자’로 불리고 있으며,

제작 연대는 15세기 후반 무렵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목활자는 하나하나 손으로 새겼기 때문에 금속활자인 을유자에 비하면

글자의 크기와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글자 획도 가지런하지 않지만,

활자를 만들어 바로 찍어낸 책들을 보면 먹색의 진함과 인쇄의 선명도는

금속활자인 을유자보다 오히려 나은 편이다.

 

한편, 성종이 승하하자 대비들이 명복을 빌기 위해

연산군 원년(1495) 원각사에서 대대적으로 불경을 찍고 동일한 내용의 단일 발문을 작성한 다음

목활자를 만들어 찍어 모든 책 끝에 똑같이 붙였다.

이듬해에는 임금이 개인 경비로 불경의 간행사업을 직접 도와줌으로써

성종의 계비인 정현대비(貞顯大妃)와 덕종의 비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주관하여

정성껏 목활자를 더 만들고 불경을 잇따라 찍어냈는데,

이때 만든 한자 목활자를 ‘인경자’라 하고, 한글 목활자를 ‘인경 한글자’라고 한다.

   

4) 훈련도감자(訓練都監字)

임진왜란으로 인해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는 양병(養兵)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1594년 훈련도감을 설치했다. 그러나 전란 직후의 혼란과 물자의 결핍으로 세태가 흉흉해지면서

훈련도감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 대신 훈련도감에서는 놀고 있는 병력을 이용하여 활자를 만들고

교서관을 대신하여 실비를 받아 책을 찍어주어 경비의 부족 부분을 충당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훈련도감의 인쇄 사업은 선조 말기부터 시작하여 인조 후기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인쇄하려는 책이 늘어나자 옛 금속활자의 글자체를 본뜬 각종 목활자를 만들어

다양하게 책을 찍어냈는데, 이들 활자를 총칭하여 ‘훈련도감자’라 부른다.

구체적으로 표현할 때는 ‘갑인자체 훈련도감자’, ‘경오자체 훈련도감자’, ‘을해자체 훈련도감자’ 등으로

글자체별 활자 명을 붙여 부른다.

본 활자로 찍은 인본들은 다양한 글자체에 따라 현재 적지 않게 전해 오고 있다.

   

5) 실록자(實錄字)

실록자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각 사고에 보관해 오던 왕조실록이

전주사고 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실되자, 전란 직후 실록청에서

태조에서 명종까지의 13대 실록을 전주사고 본에 의해 새로 찍기 위해 사용한 목활자이다.

실록처럼 귀중한 문적은 통상 금속활자로 찍어야 했음에도

전란으로 대부분의 금속활자가 소실되어 버린 탓에 옛 갑인자와 을해자를 수집하는 한편,

부족한 많은 활자들은 훈련도감 병사들을 데려 와 목활자로 만들어 보충하였던 것이다.

 

이 때 찍은 태백산사고 본을 살펴보면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은 기존의 금속활자에다

새로 만든 목활자를 보충하여 갑인자와 목활자 또는 을해자와 목활자로 찍었으며,

선조부터 효종까지의 실록은 목활자를 주로 하여 찍었는데,

이때 사용된 목활자를 총칭하여 ‘실록자’라고 일컫고 있다.

   

6) 교서관(校書館) 필서체자(筆書體字)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인조 말기에 이르러

비로소 국가의 인쇄 업무가 옛날과 같이 교서관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자

훈련도감에서 활자 만들기와 판짜기 등의 인쇄 기법을 경험한 장인들이

교서관으로 옮겨와서 인쇄 업무를 재개하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현종 때 무신자(戊申字)가 주조되어

중앙 관서의 금속활자 인쇄 업무가 다시 원활하게 수행되기까지의 사이에

교서관이 갑인자와 을해자의 필서체를 답습한 목활자로 책을 찍어 공급하였는데,

이때 사용된 목활자를 '교서관 필서체자'라고 한다.

교서관 필서체자는 또한 숙종 대에 들어와 만들어진 목활자도 있는데,

이는 초기의 활자보다 크기가 작고 단정한 모양을 띄고 있다.

무신자 초기 인본인 <잠곡선생유고(潛谷先生遺稿)>는 후기 인본에 비해 인쇄가 정교하다.

   

7) 생생자(生生字)

생생자는 정조 16년(1792) 청나라의 사고전서(四庫全書)에 들어 있는

취진판 <강희자전(康熙字典)>의 글자를 글자본으로 삼고

황양목을 사용하여 만든 목활자로 크고 작은 활자가 32만 여자에 이른다.

이 활자는 조선 시대 때 만들어진 목활자 중 가장 대규모로 관서에서 제조한 목활자인데,

철종 8년(1857)의 주자소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8) 학부(學部) 인서체자(印書體字)

고종 31년(1894)의 갑오경장으로 관제 개혁으로 생긴 부서 중 하나가 교육을 담당하는 학부(學部)였다.

학부 편집국에서는 당시의 새로운 문물과 근대화 의식을 수용하기 위해 교과서의 개편 작업이 시급했는데,

그 결과 무쇠로 만들어 쓰다가 마모되어 방치해 둔 후기 교서관 인서체자와 이를 바탕으로

인서체 목활자를 만들어 개편된 교과서를 다량으로 찍어냈다.

이 때 사용한 목활자를 ‘학부 인서체자’라 부르며,

특히 한글을 찍기 위해 만든 활자를 ‘학부 인서체자 병용 한글자’ 또는 ‘학부 한글자’라 일컫는다.

 

'야소삼자경자'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기독교 선교를 위해

어린이용 <훈몽삼자경>의 체제를 본떠서 만든<야소삼자경>을 찍기 위해 만든 목활자이다.

인본은 한자로 번역한 기독교 교리의 중요 대목을 큰 한자 밑에 작은 한글자로 훈과 음을 표시하고

에는 한글로 토를 달아 인쇄해 냈다. 이를 총칭하여 ‘야소삼자경자’라 하며,

구체적으로는 한자 큰 자를 ‘야소삼자경 대자’, 한글 작은 자를 ‘야소삼경 한글자’로 일컫는다.

   

9) 기타 목활자

그 외 임진왜란 이전 목활자로 현재 전해오는 것에는 중종 때 나주목에서 만든 ‘금성자(錦城字)’,

명종 때 대제학을 지낸 정사룡(鄭士龍)이 만든 ‘호음자(湖陰字)’,

광해군 때 평양에서 만든 ‘추향당자(秋香堂字)’,

선조 18년(1585)에 교정청에서 <효경대의>를 찍기 위해 만든 ‘효경대자(孝經大字)’의 인본 등이 있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민 · 관에서 다양한 목활자를 만들어

각종 서책이나 문집, 족보 등을 인출하는데 사용하였다.

선조 41년(1608)부터 광해군 7년(1615)까지

내의원의 의관(醫官)들이 의서를 찍어내기 위해 만든 '내의원자(內醫院字)',

광해군 13년(1621)에

경상도 관찰사였던 정조(鄭造)가 그의 친구인 문계박에게 의뢰해 만든 ‘문계박자(文繼朴字)’,

17세기 후반에 나주목에서 만든 ‘나주자(羅州字)’,

정조 21년(1797)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인출하면서 사용한 ‘춘추강자(春秋綱字)’,

정조 22년(1798) 김한동(金翰東)이 조상의 문집을 찍기 위해 평남 성천에서 만든 ‘성천자(成川字)’ 이 있다.

 

이후에도 많은 목활자가 개인들에 의해 사사로이 만들어졌는데,

순조 10년(1810)에 장훈이 사적으로 책을 찍기 위해 소형 목활자로 만든 ‘장혼자(張混字)’,

순조 15년(1815)에 예조판서 등을 지낸 남공철(南公轍)이 자신의 저서를 찍기 위해 만든

중간 자와 작은 자의 ‘금릉취진자(金陵聚珍字)’,

순조 25년(1825)에 박병은(朴秉殷) 이 <증주삼자경>을 인출하기 위해 만든 ‘훈몽삼자경자(訓蒙三字經字)’,

그리고 고종 6년(1869)에 양주의 보광사에서 불서를 찍어내기 위해 만든 ‘보광사자(寶光寺字)’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목활자가 있었으며, 이들의 인본 또한 다양하게 전해 오고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