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통의 배, 한선(韓船)
한선(韓船)
명칭은 1811년 통신사 김이교 일행이 타고 갔던 조선통신사선을 보고
일본의 한 화원이 그린 <한선양면도>에서 비롯되었다.
한선(韓船=韓排=가라바이)은
뗏바이(뗏배)와 통나무바이(퉁궁이)가 서로 결합하여 차츰 발달해온 벌평저선(筏平底船)이다.
한선(韓船)의 기본구조는,
선저(船底, 배의 밑바닥)는 통나무를 연결하여 편평하고 넓다.
현판(舷版, 뱃전)은 두꺼운 널판을 여러 장 올려 묶었다.
선두(船頭, 뱃머리)의 노판 선수판(船首板, 배의 이물바우)은
평직판을 선두 위에서부터 선저까지 가로로 대어 막아 넓고 편평하다.
닻은 나무로 만들었는데 물에 가라앉게 하기 위하여 닻채에 돌을 매어 달았다.
배의 진화
뗏배(RAFT)→쪽배(=퉁궁이=매생이, DUGOUT)→조립선(DUILD UP SHIP)
우리나라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그린 바위그림(울주군 언양면 태화강상류의 반구대 암각화)에는
모두 3척의 배가 보이는데 가야시대의 배 모양 토용과 신라시대의 배 모양 제사용토기의 모양과 비슷하다.
둥근 통나무 여러개를 옆으로 엮어서 만든 뗏목배와
둥근 통나무의 속을 파내서 만든 통나무쪽배(퉁궁이)가
해상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사람의 이동과 하물 운반에 이용하였다.
강에서는 짐을 나르는 짐배로 쓰이기도 하고, 강을 건너는 나룻배로도 이용되었다.
뗏목배와 통나무 쪽배(퉁궁이)는 어로활동을 할 때에는 어선으로 사용되고,
어염(魚鹽)을 실어나를 때에는 운반선으로 사용되었다.
뗏목배
옛날에 우리나라에서 뗏목배를 ‘뗏바이’라고 하였는데 ‘뗏’이란 뗏목배의 재료인 대나무를 뜻하고 있다.
압록강가 두만강, 한강에서는 소나무로 만든 뗏목이 발달하였지만
이름은 그전과 같이 ‘뗏’을 붙여서 뗏목으로 불렀다.
강의 상류에서 소나무 목재 자체를 운반하기 위하여 만든 것은 ‘뗏목’이라 하고,
고기잡이를 하거나 물건을 운반하거나 사람을 실어 나르는 것은 ‘뗏목배’라고 하였다.
바이=[Ba i]=배=북경어: 빠이[Pai]
바이=[Ba i]라는 말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고증된 바는 없으나,
배의 중국어 배(排)[빠이=Pai]에서 [바이]로 음운변화한 것으로 추정한다.
‘바이(排)’가 ‘퉁궁이’와 결합하고 발전하여
'준 구조선(準構造線)'이 만들어지고 '구조선'으로 발달되어가는 동안에도 바이=[Ba i]라고 하였는데,
옛말(古語)에서 바이를 한글로 [Ba i]라고 썼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배를 한글로 ‘=바이’라고 쓰고 [바이]라고 발음하였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뗏배[Ddet Ba i]라는 말은 뗏바이[Ddet Ba i]]의 준말이고
배[Ba i]라는 말은 바이[Ba i]의 준말이다.
밑이 편평한 뗏바이(筏, 木排)는 통나무(丸木) 몸통 옆구리에 구멍을 뚫고
긴 나무창을 옆으로 길게 때려 박아 연결한 ‘뗏바이(排)’를 만들었다.
그 위에 타고 강이나 호수 위를 타고 다녔다.
통나무 쪽배(퉁궁이)의 발달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굵은 통나무 가운데 속을 불로 태운 다음
돌도끼를 이용하여 속을 파내어 마치 소 구유와 같은 쪽배를 만들었다.
쪽배(Dugout)는 우리나라에서 '퉁궁이, 매생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타고 호수나 강을 건너거나, 그 위에 짐을 싣고 운반하기도 하고 고기잡이도 하였다.
우리나라 삼한시대에는
뗏목배가 발달하여 고물에 노를 설치하고 노를 저어서 가까운 거리를 내왕하기도 하고
돛풀(부들풀-香蒲)로 짠 자리를 돛대에 매어달고 바람을 받아 먼 곳을 내왕하기도 하였다.
통나무배(퉁궁이=쪽배)는 양쪽 뱃전의 노걸개에 노를 매어달고 노를 저어 이동하였으며
배 한가운데에 돛대를 세우고 돛을 달아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어로활동도 하였다.
삼한의 사람들은 돛을 단 통나무 쪽배나 뗏목배를 이용하여 왜국으로 도해(渡海, 원양항해)도 하였다.
가야지방에서 출토한 통나무 쪽배모양의 토용과 같이 생긴 통나무배를 이용하여
왜국과 일찍부터 왕래를 하였다.
백제는 372년 서해를 건너 동진(東晋)과 해상을 통한 조공무역을 시작하였으며
중국의 서해안 일대에 진출하여 영역을 넓혔다.
백제는 흑산도를 지나는 해상남로를 개척하였고, 양진(兩晋) 남북조, 수, 당과 교역을 하였다.
왜국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왜국을 경영하며 선박을 이용하여 왕래하였다.
왜국에서는 650년 백제인으로 하여금 백제석 '견당사선(遣唐使船)'을 건조하게 하였다.
준 구조선(準 構造線, 봉합선)
통나무 쪽배 다음으로 준 구조선인 봉합선이 발명되었다.
통나무 쪽배의 제6발달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외쪽 통나무 쪽배를 바닥판으로 하고 쪽배의 양현 쪽에 판자를 덧붙인다.
이때 판자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가죽끈이나 칡넝쿨로 엮은 동아줄을 꿰어서 조립한 배를
'조립봉합선(Stitched Boat)'이라고 한다.
구조선(構造線, 도구를 이용하여 만든 배)
인간은 불을 발견하여 활용하게 되고 또 쇠붙이(동, 청동, 철)를 발명하여 도구를 만들게 되었다.
불, 청동, 철물 등을 활용하여 도구, 즉 칼(刀) 끌(錯) 도끼(斧) 자귀(佐耳) 쇠못(鐵釘) 쇠띠(鐵帶) 등을
만들고 이것을 활용하여 나무를 자유자재로 제재(製材)하여 얇은 판자와 각목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러한 목재를 이용하여 지금까지 쓰던 뗏바이나 쪽바이 보다 더 나은 탈것을 창안하고
조립하여 만들었는데 이를 '구조선(構造線)'이라 한다.
민간선의 구조와 용도
거루(소소선, 小小船, 크기 4m)
만(灣) 내에서 돌아다니는 배.
작은 화물을 운반하거나 해안에서 해조류 등을 채취하고, 낚시배로도 사용한다.
야거리(소선, 小船, 크기 7m)
가까운 바다를 왕래하며 화물이나 어장의 고기를 실어나르는 운반선,
돛대 하나를 세우고 사각형의 조선식 돛을 매어 단다. 연해안에서 어망으로 어로활동도 한다.
당두리(唐道里, 中船, 크기 15m)
돛대 두 개를 세우고 사각형의 조선식 돛을 각각 매어 단다.
상고선(무역선)은 연안을 따라 왕래하며 많은 화물을 싣고 장사(무역)를 한다.
어선은 인근해로 나아가 어망이나 낚시로 직업적인 어로활동을 한다.
한선(韓船)의 장점
평저선인 한선(韓船)은
독특한 사각범(범포의 상연 하연 사이에 죽봉을 횡으로 3척 간격으로 매어달아 바람을 범포의 전면에
받을 수 있게 만든 것)을 달아 올려 바람을 받아 행선하는데,
순풍(順風, 배의 등 뒤에서 받는 바람)을 받게 되면 돛을 좌우로 활짝 펴서 최고 속력으로 달리게 된다.
한선은 옆쪽에서 불어오는 바람(側風)이나 앞쪽에서 불어오는 바람(逆風)을 받아도
갈지(之 )자로 사행하여 행선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거북배(龜船)에 대하여
명나라의 <해방의(海防議)>라는 책에서 아래와 같이 평가를 하였다.
[구선지제(龜船之制)]에「황명화옥해방의(皇明華鈺海防議)」云
“조선구선포범수면유의풍역조락역하행(朝鮮龜船布忛竪眠惟意風逆潮落亦可行)”
즉지공소창지선야(卽指公所創之船也).
[귀선의 제도]에「명나라 화옥이 지은 해방의」라는 책에
“조선 거북배는 돛대를 세웠다뉘기를 마음대로 하고 역풍이 불거나 썰물에도 갈 수 있다”하였다.
즉 이는 公(이순신)이 창제한 거북배를 가리키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한선(韓船)은 이물비우(板=船頭板)가 횡으로는 편평하지만
선두판 상부에서 선저까지는 스키(Ski)의 앞부리와 같이 원형으로 완만한 유선형을 이루고 있어서
바닷물 위를 미끄러지듯 파도를 타고 앞으로 나아간다. 마치 해병대 상륙정의 선두와 같은 기능을 한다.
한선은 이물(=선두, 船頭)이 평판상 모양이기 때문에
물의 저항을 받아 파도를 가르고 나아가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최근에 대형 상선, 유조선, 전함들이 선수(船首)에 커다란 철구(鐵球)를 매단 것 같은 구조를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반대로 파도가 높을 때 한선은 파도 위를 타고 나아가기 때문에 바닷물 속으로 처박히지 않는다.
큰 파도가 치면 선수가 뾰족한 화선(和船, 선수재 구조로 된 배)은
선수가 파도를 가르고 간다는 것이 오히려 파도 속으로 들어가 물속으로 처박히게 된다.
선저가 편평하기 때문에 배의 복원력은 좋지 않으나(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무거운 화물을 선창 바닥에
싣거나 화강암 같은 바윗돌을 선저에 설치하고 고정시킨다. 배의 중심을 낮추기 위하여 설치하는 것)
편평하고 넓은 갯벌에서는 배의 운용이 유리하고 편리하다.
진행방향을 돌려 행선하고자 할 때,
흘수(吃水: 배의 물속에 잠긴 부분)가 비교적 얕기 때문에 회전반경이 짧다.
180°를 회전할 때 멀리 돌지 않고 짧은 거리에서 회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회전속도가 빠르다.
따라서 기동성이 우수하다.
한선은 선재(船材)가 두텁고 무거우며 선체가 길고 크기 때문에
고대에 있어서 수전(水戰)을 하는 함선 즉 전함의 경우에는 유리한 점이 많았다.
선재가 두텁기 때문에 높은 파도나 웬만한 충격에 능히 견디고 적탄에 맞아도 쉽게 파손이 되지 않는다.
전선(戰船)인 판옥선(板屋船)은 현(舷)이 높고 선체가 장대하여 적병이 배에 기어오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선체가 육중하기 때문에 배의 운용이 힘들고 어려웠고
조선비용(선재와 인력)이 많이 들어가는 단점이 있다.
이와 반대로 일본의 배는 선재가 얇고 가벼우며 짧고 작기 때문에
조선 비용이 적게 들고 곧은 재료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공작이 용이하며 배의 운용이 쉽다.
그러나 선체가 단소(短小)하고 경박하기 때문에
전쟁을 하는 함선의 경우는 포탄에 맞으면 판재가 파열되고
풍파나 가벼운 충격에도 배가 파손되며 심할 경우에는 파선(破船)이 된다.
비교적 좁은 평저판에 너비가 넓고 두께가 얇은 현판(下棚 中棚 上棚의 三板으로 됨)을
철정(鐵釘)으로 봉합하기 때문에 쉽게 배가 부서지게 된다.
- 한선의 발달
한선(韓船)은
①처음에 통나무배(獨木舟)로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②첫 단계로 통나무배를 길게 두 쪽으로 분할하여
그 중간에 판자 한 장을 넣어 '안압지배'와 같은 배를 산출하고,
③다음으로 너비를 더 넓히기 위하여 좌우현 L자형 만곡종통재 사이에 판자를 여러 장 더 넣어
평탄한 저판을 꾸미고 현측에도 외판을 여러 장 세워 붙여 깊이를 증대하여 '완도선'같은 배를 만들며,
④더욱 그것이 발달하여 세곡을 운반하는 대형 운곡선(運穀船)인 '초마선(哨馬船)'이나,
일본에 원정한 대형 '군선(軍船)' 등 완전한 한선이 고려시대에 이미 나타나고,
⑤선박사(船舶史)에서는 나무배(木船)의 발달이
통나무배나 뗏목배 같은 나무로 된 원시형태의 배로부터 출발하여
처음에는 여러가지 형태의 '반구조선(半構造船, semi-constructed ship)'으로 진화하였다가
점차로 완전한 목구조선(木構造船)으로 발달한다는 것이 정설인데,
'달리도배'는 우리나라 선박발달사에서 등장하는 '반구조선' 중에서도
최종단계에 처해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곧, 한선의 발달은
'안압지배'에서 출발하여 '완도선'과 '달리도배'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⑥그것이 그대로 조선왕조에 계승되어
'판옥선(板屋船)'이나 '거북선' 같은 훌륭한 선박이 개발되기에 이르렀다.
한선(韓船)이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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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韓船)의 구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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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 배그림 거울(고려) |
고려시대는 우리나라의 바닷길을 운송로로 활용하는 조운제도가 확립되었다. 또한 멀리 서역까지 이름을 알릴 정도로 국제적인 나라였으며, 중국의 송(宋)나라와 교류가 매우 활발하였다.
1123년 송나라 사절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은 『고려도경』에서 당시의 고려 무역선 또는 사송선(使宋船)중 관선(官船), 순선, 송방(松舫), 막선 등을 소개하였다.
완도선은 11~12세기 경의 연안 상선이며, 달리도선은 완도선보다 늦은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에 항해인 배로서 완전한 구조선(構造船)으로 발달된 형태이다. 이외에도 고려시대 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로는 거친 파도를 헤치고 항해하는 배 그림의 청동거울(銅鏡)이 있다. |
조선시대의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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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배의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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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선조사보고서, 1930년대) |
조선 후기에 나라의 문호를 개방한 후 동력의 힘으로 움직이는 기선(汽船)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고유의 배는 점차 사라진다.
전통적인 배는 규모가 작은 고깃배, 짐배, 장삿배 등 어염상선(漁鹽商船)과 같은 작은 규모의 배들만이 남는다. 현재 남아 있는 가거도(可居島) 멸치잡이배, 강화도 곳배, 낙월도 멍텅구리배 등은 전통 한선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마지막 배라 할 수 있다. |
▲ 관매도 어선 |
▲ 강화도 어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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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배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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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달리도배
전남 목포시 충무동 달리도(達里島) 앞바다에서 고선박(古船舶)
달리도는 목포시에서 서쪽으로 6.5㎞ 지점에 위치하는 곳으로,
남쪽으로는 해남군 화원면과 마주하며 북쪽으로는 신안군 압해면, 서쪽으로는 팔금면과 접하고 있다.
또 주위로는 눌도, 고하도, 외달도, 장좌도가 나란히 위치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남 목포시 충무동에 속한다.
달리도는 영산강 하구와 근접하고 압해도 및 해남 화원반도와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어
예전부터 서남해안 해상교통의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남해안 도서지역은 선사시대부터 해상을 통한 문화의 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흑산도, 가거도, 하태도, 우이도 등에 신석기시대의 조개무지(貝塚)유적이 형성되어 분포하고 있다.
이들 조개무지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빗살무늬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남해안의 신석기문화와 관련이 깊고
연대도 중기 내지 전기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후 청동기시대 유적은 모든 도서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하며 유적 또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과 유물로는 고인돌과 석기류가 있다.
특히 석기류는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남 내륙지방에서 조사된 유물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전남 서해안지역에서 도서지역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철기시대 유적으로는 임자도, 압해도, 하의도 등지의 패총유적을 들 수 있다.
前 시기에 비해 많은 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이 지역이 해양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어 유적의 분포가 높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마한 諸小國의 지배층이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옹관고분의 경우 조사된 예는 없으나
옹관 片이나 옹관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개배(蓋杯)와 유공광구소호(有孔壙口小壺) 등이
조사되고 있다.
달리도 매몰선은
1989년 6월경 섬 북쪽에 위치한 속칭 ‘지픈골’ 앞 해변에서 낙지잡이를 하던 마을주민들에 의해
개펄에 노출된 매몰선체 및 유물 일부가 발견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1994년 2월경 같은 마을주민들에 의해 매몰선 주변에서
접시 2점, 청동숟가락 1점을 포함한 다량의 도자기 片이 수습되어 신고되었다.
1994년 2월28일 현지조사 결과 노출된 선체는 고식(古式)의 전통 한선(傳統 韓船) 구조로 확인되었으며,
1995년 6월28일-7월29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달리도 매몰선체에 대한 발굴조사는
섬의 북서쪽에 자리한 달리2구의 일명 ‘지픈골’ 앞 개펄에서 수행되었다.
이 해안은 평평한 해안퇴적층이 비교적 넓게 발달된 곳이었으나,
1981년 영산강 하구둑의 축조이후부터 유입되는 토사양의 감소와 함께
섬 주위 바닷물의 흐름이 변하기 시작하여 해안퇴적물이 점차 씻겨 내려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안지형의 변화에 기인하여 개펄 속에 묻혀있던 달리도 매몰선이
점차 노출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마을주민들에 의해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이 침몰 선체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만조 시에는 잠기고,
간조 시에 물이 빠지면 선체의 일부가 드러날 정도로 개펄에 얕게 묻혀있었다.
선체 내에는 어떤 적하물(積荷物)도 남아있지 않았다.
달리도 매몰 선체는 뱃머리(船首)를 서서남 방향으로 두고,
우현(右舷)쪽으로 18˚정도 기울어진 채 매몰되어 있었다.
선체는 船首와 船尾의 일부가 좌현의 선재와 함께 노출되어 있었다.
잔존 선체는 저판 3열과 우현 외판재 4단, 좌현 외판재 2단 및 선미판의 일부가 온전히 결구된 채
매몰되어 있었다.
선체 내부에는 뱃몸에서 분리된 좌현 제3단 외판재의 일부가
횡강력재인 각재(角材) ‘멍에형 게롱(가룡목, 加龍木)’ 1점과 함께 우현에 얹혀 출토되었다.
조사된 달리도선의 잔존 규모는
全長 10.50m. 잔존 폭 2.72m, 잔존 깊이 0.80m 정도이다.
달리도선의 발견 의의는 1982년 발굴된 11세기 중후반경의 고려시대 완도선(莞島船)과 더불어
지금까지 알려진 초기 한선(韓船)의 구조 및 그 발달과정을 재조명할 수 있는 선박자료로서
한선사(韓船史)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잔존 船體片을 통해 초기 복원한 달리도선의 주요 척도
전장(全長, Length over all) : 약 12m
선폭(船幅, Breadth) : 약 3.6m
선심(船深, Depth) : 약 1.6m (저판 하면에서 최상단 외판까지의 깊이)
- 달리도선의 발굴 의의
달리도선의 발굴은 한선(韓船)연구에 있어서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공백으로 둘 수밖에 없었던
초기 한선의 구조와 발달단계 연구 등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선박으로는 경주 안압지 통나무배(1974년 발굴), 신안선(1976~1984년 발굴),
진도 통나무배(1992년 발굴) 및 완도선(1982년 발굴), 목포 달리도선 발굴 등 5건이 있으나,
이중 신안선과 진도 통나무배는 중국계 선박으로 확인되었으므로 우리 배는 3척에 해당한다.
경주 안압지 통나무배는
통일신라기에 속해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되었으나 원시적 단계의 통나무배이며,
완도선과 달리도선은 구조선(構造船)으로 분류된다.
11세기 중후반경의 선박으로 파악되고 있는 완도선과
그보다 후대인 13~14세기경에 활동한 것으로 파악되는 달리도선은
상호 유사한 특징과 형태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
세부 구조적인 면에서 달리도선이 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완도선의 경우는 선저부에 만곡종통재의 구조를 지니고 있어
아직 반구조선(半構造船)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달리도선에서는 이 부재가 생략되고 외판과 저판이 직결(直結)되는 등 진보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가룡목 설치의 정형성과 부재(部材)의 형태, 고착방법 등에 있어서
보다 발달된 구조선(構造船)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완도선은 한국의 전통적인 재래식 한선(韓船)의 구조와 그 한선 발달의 역사를 풀이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이다.
완도선이 발굴되기까지는 한국의 독특한 한선의 구조가 과연 어느 때부터 생성되기 시작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는 아주 묘연했다.
그런데 완도선은 통나무배를 둘로 쪼개어 그 중간에 5장의 저판재를 넣어서 선저(船底)를 넓히고
양 측면에 4~5장의 외판재를 붙여올라가서 배의 깊이를 늘리는 등,
통나무배로부터 완전한 목구조선(木構造船)으로 발달하는 중간단계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달리도선은 우리나라 선박발달사에서 등장하는 반구조선(半構造船) 중에서도
최종단계에 처해있는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달리도선의 발굴은 참으로 값진 성과라 할 수 있다.
1982년 발굴된 11세기 중후반경의 고려시대 완도선과 더불어
지금까지 알려진 초기 한선(韓船)의 구조 및 그 발달과정을 재조명할 수 있는 선박자료로서
한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기대한다.
달리도선은 중앙단면의 구조 형식만으로도
이 배는 전형적인 평저선형(平底船型)의 한선(韓船)임을 알 수 있다.
달리도선의 횡단면 구조는 3재의 저판재를 가쇠(長槊)로 결합해서 평탄한 저판(底板, 배밑)을 만들고
좌우 양현에 외판재(外板, 杉板)를 홈붙이 겹이음으로 붙여 올리고,
피쇠(皮槊)로 고정하여 선현(船舷, 뱃전)을 이루고 있다.
또한 좌우현의 외판재는 각각 가룡목(加龍木, 게롱)을 꿰거나 걸어서 지지하고 있다.
- 달리도선의 연대
달리도선을 구성하고 있는 선재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C14) 측정결과에 의하면
AD 1210~1400년간(확률 95%)인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달리도선은 13~14세기경에 활동한 선박으로 간주된다.
또한 선박의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11세기 중후반경의 선박으로 파악되고 있는 완도선과 달리도선은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구조적 측면에서는 이보다 발달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완도선에서는 반구조선(半構造線)의 흔적인 만곡종통재의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달리도선에서는 생략되고 외판과 저판이 직결되는 구조로 발달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양된 선체(古船)의 연대는 배의 구조 및 제작기술을 살핀다든지
혹은 공반 유물의 종류와 성격을 규명함으로써 연대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도에서 인양된 한선(韓船)의 선체구조 및 제작기술의 규명으로는
제작시기를 판정할 만한 자료가 축적되어 있지 않고
또 편년을 제시할 만한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선체를 구성하는 목판을 사용하여 연대를 밝힐 수 있는 자연과학적 방법이 요구되었다.
자연과학적 연대측정법에는 탄소를 함유하고 있는 목재 시료의 경우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이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다.
- 달리도선의 수종(樹種) : 선재(船材)
선박용재는 선체의 구성 및 흡수(吸水)특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선(韓船)의 구성수종은 거의 대부분이 소나무(해송 포함).
그리고 상수리나무와 졸참나무로 대표되는 참나무류가 주류를 이룬다.
특히 선체 주요부위인 외판이나 저판은 모두 소나무를 이용하였으며
상수리나무나 졸참나무와 같은 참나무류는 강도 보강용으로 부분적으로 사용하였다.
소나무는 비중은 약간 낮으나 가볍고 가공하기 쉬우며 상당한 내수성(耐水性)을 가져서
외판이나 갑판용재에 주로 쓰이고,
산뽕나무는 휨 강도와 전단강도가 높은,
즉 잘 부러지지 않는 목재여서 멍에형 가룡재에 선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997년 '가거도'의 복원에서 배 목수들이 장삭이나 쇠부분에 산뽕나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예로부터의 전통이 이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사용중 선체를 보수할 때는 보판(補板)용재로서 비자나무, 굴피나무, 참나무류 등
소나무보다 단단하고 내구성이 강한 수종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관행을 기준으로 보면
달리도배에서는 저판부에서 이들 보판용 수종이 없는 것으로 보아
건조후 한 번도 보수하지 않은 채로 침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달리도선은 13세기 고려시대의 한선(韓船)으로
선재에서 취한 시료를 통하여 수종을 판별하고 원목 사용량을 조사한 결과,
배의 기본골격을 이루는 외판재와 저판재는 소나무이고,
횡강력부재인 가룡목은 참나무과 상수리나무 인 것으로 밝혀졌다.
달리도 선재의 가공단면부 나이테를 측정해본 결과
저판 및 외판에 사용된 소나무는 수령 50~70년의 것으로 나타났다.
또 사용재가 대부분 하나의 원목에서 한 재(材)만을 절취한 것으로 학인되었다.
- 구조특성
선저(船底)
: 달리도선은 3材의 배밑 구조를 지닌 평저형(平底型) 선박으로서 전형적인 한선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저판의 폭은 선수 쪽이 선미보다 약간 넓게 시설되어 있다.
저판의 횡단면은 선수와 선미 양쪽이 위로 솟는 만곡(彎曲)된 형상을 지니고 있어서
완도선과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및 근세 한선의 경우는 거의 평직(平直)한 형태를 나타낸다.
시대 |
선종(船種) |
저판 길이 (底板 長) |
저판 폭(底板 幅) |
두께 (厚) |
장폭 비(帳幅 比) | |
허리부위 (腰廣) |
이물-고물 (船首-船尾廣) | |||||
고려 |
완도선 |
6.50m |
1.65m |
1.10 ~1.05m |
18~20㎝ |
3.94 |
달리도선 |
9.50m |
1.15m |
0.65 ~0.52m |
15~20㎝ |
8.26 | |
조선 |
복물선=짐배 (卜物船) |
9.29m |
2.79m |
1.55m |
18.6㎝ |
3.33 |
사후선 (伺候船) |
7.43m |
2.17m |
1.24m |
17.0㎝ |
3.42 | |
사선=낚시배 (梭船) |
4.64m |
1.39m |
0.93m |
15.5㎝ |
3.34 |
- 한선(韓船)의 저판(底板) 비교 -
외판(外板)
: 외판(삼, 杉)은 좌우 모두 4단까지 남아있지만
4단 외판의 상부에도 ‘ㄴ’자형의 홈이 가공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5단 이상의 외판이 시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수(船首)와 선미(船尾)
: 선수 부분이 완전히 유실되어 정확한 구조를 밝힐 수는 없지만
한선의 특징인 평판형 선수구조를 지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미 구조는 선미쪽 외판 안쪽에 ‘凹’형의 홈을 시설하고
선미판재(고물비우)를 끼워 넣어 구조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횡강력재(橫强力材)
: 달리도선에서는 횡강력재로서의 가룡목이 4구간에 걸쳐 시설된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선수쪽 유실 부분을 포함하면 5구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룡은 각 단에 따라 구조방법을 달리하고 있다.
즉 일반형태의 가룡과 일명 ‘멍에형 게롱’을 혼용하고 있다.
완도선과 비교해볼 때 가룡 시설 위치가 보다 정형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선체 상단부의 유실로 인해 가목(駕木, 멍에)의 구조는 확인할 수 없었다.
고착법(固着法)
: 달리도선의 각종 고착(固着)은 나무못(木釘)에 의해 이뤄졌으며 철못(鐵釘)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쇠붙이를 즐겨 쓰지 않고 배를 짓는 한선(韓船)의 특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선체의 고착에 사용된 나무못으로는
저판재(底板材)를 연결하는 장삭(長槊, 가쇠)과 외판(外板)을 붙이는데 사용되는 피삭(皮槊, 피쇠)
그리고 장삭, 피삭 및 가룡 등의 고정 핀(Pin)으로 사용된 ‘산지(고정용 나무 핀)’ 등이 있다.
외판의 고착은 완도선과 같은 형태의 구형(矩形) 피삭이 사용되었으며,
저판재의 고착은 3材의 저판재 측면에 각각 장삭구멍(가로10×세로4~5㎝)을 내고,
저판의 폭에 따라 사각 단면(길이 53.5~115㎝)의 장삭으로 11구간에 걸쳐 삽입함으로서 고착하였다.
추진구(推進具)
: 달리도선의 추진구와 관련한 시설물로는
돛대뿌리 홈이 중앙 저판재의 중심부에 시설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나
돛대를 하나 장착한 단범섬(單帆船)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돛대의 고정을 위해 가룡에 설치된 ‘당아뿔’ 부재도 확인되었다.
키(舵), 닻, 노(櫓) 등의 부속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선형(船型)과 주요 척도
: 구조적 특성 즉, 평저형의 횡단면 구조, 턱따기가 된 외판 구조, 평평한 선수와 선미 형태,
횡강력재로서 채용된 가룡목, 선재의 고착에 쇠붙이를 쓰지 않고 장삭, 피삭을 사용한 점 등과
달리도 선재의 수종 등 여러 특성을 종합해 보면,
달리도선은 13~14세기경에 활동한 우리 고유의 전통 한선(韓船)이라 결론지을 수 있다.
- 국립해양유물전시관 펴냄,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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