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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배, 한선(韓船)

Gijuzzang Dream 2010. 9. 18. 20:24

 

 

 

 

 

 

 

 우리나라 전통의 배, 한선(韓船)

 

 

 

 한선(韓船) 

 

명칭은 1811년 통신사 김이교 일행이 타고 갔던 조선통신사선을 보고

일본의 한 화원이 그린 <한선양면도>에서 비롯되었다.

 

한선(韓船=韓排=가라바이)은

뗏바이(뗏배)와 통나무바이(퉁궁이)가 서로 결합하여 차츰 발달해온 벌평저선(筏平底船)이다.

 

한선(韓船)의 기본구조는,

선저(船底, 배의 밑바닥)는 통나무를 연결하여 편평하고 넓다.

현판(舷版, 뱃전)은 두꺼운 널판을 여러 장 올려 묶었다.

선두(船頭, 뱃머리)의 노판 선수판(船首板, 배의 이물바우)은

평직판을 선두 위에서부터 선저까지 가로로 대어 막아 넓고 편평하다.

닻은 나무로 만들었는데 물에 가라앉게 하기 위하여 닻채에 돌을 매어 달았다.

 

 

배의 진화

 

뗏배(RAFT)→쪽배(=퉁궁이=매생이, DUGOUT)→조립선(DUILD UP SHIP)

   

우리나라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그린 바위그림(울주군 언양면 태화강상류의 반구대 암각화)에는

모두 3척의 배가 보이는데 가야시대의 배 모양 토용과 신라시대의 배 모양 제사용토기의 모양과 비슷하다.

 

둥근 통나무 여러개를 옆으로 엮어서 만든 뗏목배와

둥근 통나무의 속을 파내서 만든 통나무쪽배(퉁궁이)가

해상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사람의 이동과 하물 운반에 이용하였다.

강에서는 짐을 나르는 짐배로 쓰이기도 하고, 강을 건너는 나룻배로도 이용되었다.

뗏목배와 통나무 쪽배(퉁궁이)는 어로활동을 할 때에는 어선으로 사용되고,

어염(魚鹽)을 실어나를 때에는 운반선으로 사용되었다.

 

 

뗏목배

 

옛날에 우리나라에서 뗏목배를 ‘뗏바이’라고 하였는데 ‘뗏’이란 뗏목배의 재료인 대나무를 뜻하고 있다.

압록강가 두만강, 한강에서는 소나무로 만든 뗏목이 발달하였지만

이름은 그전과 같이 ‘뗏’을 붙여서 뗏목으로 불렀다.

강의 상류에서 소나무 목재 자체를 운반하기 위하여 만든 것은 ‘뗏목’이라 하고,

고기잡이를 하거나 물건을 운반하거나 사람을 실어 나르는 것은 ‘뗏목배’라고 하였다.

 

바이=[Ba i]=배=북경어: 빠이[Pai]

 

바이=[Ba i]라는 말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고증된 바는 없으나,

배의 중국어 배(排)[빠이=Pai]에서 [바이]로 음운변화한 것으로 추정한다.

 

‘바이(排)’가 ‘퉁궁이’와 결합하고 발전하여

'준 구조선(準構造線)'이 만들어지고 '구조선'으로 발달되어가는 동안에도 바이=[Ba i]라고 하였는데,

옛말(古語)에서 바이를 한글로 [Ba i]라고 썼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배를 한글로 ‘=바이’라고 쓰고 [바이]라고 발음하였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뗏배[Ddet Ba i]라는 말은 뗏바이[Ddet Ba i]]의 준말이고

배[Ba i]라는 말은 바이[Ba i]의 준말이다.

 

밑이 편평한 뗏바이(筏, 木排)는 통나무(丸木) 몸통 옆구리에 구멍을 뚫고

긴 나무창을 옆으로 길게 때려 박아 연결한 ‘뗏바이(排)’를 만들었다.

그 위에 타고 강이나 호수 위를 타고 다녔다.

     

 

통나무 쪽배(퉁궁이)의 발달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굵은 통나무 가운데 속을 불로 태운 다음

돌도끼를 이용하여 속을 파내어 마치 소 구유와 같은 쪽배를 만들었다.

쪽배(Dugout)는 우리나라에서 '퉁궁이, 매생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타고 호수나 강을 건너거나, 그 위에 짐을 싣고 운반하기도 하고 고기잡이도 하였다.

 

우리나라 삼한시대에는

뗏목배가 발달하여 고물에 노를 설치하고 노를 저어서 가까운 거리를 내왕하기도 하고

돛풀(부들풀-香蒲)로 짠 자리를 돛대에 매어달고 바람을 받아 먼 곳을 내왕하기도 하였다.

 

통나무배(퉁궁이=쪽배)는 양쪽 뱃전의 노걸개에 노를 매어달고 노를 저어 이동하였으며

배 한가운데에 돛대를 세우고 돛을 달아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어로활동도 하였다.

삼한의 사람들은 돛을 단 통나무 쪽배나 뗏목배를 이용하여 왜국으로 도해(渡海, 원양항해)도 하였다.

 

가야지방에서 출토한 통나무 쪽배모양의 토용과 같이 생긴 통나무배를 이용하여

왜국과 일찍부터 왕래를 하였다.

 

백제는 372년 서해를 건너 동진(東晋)과 해상을 통한 조공무역을 시작하였으며

중국의 서해안 일대에 진출하여 영역을 넓혔다.

백제는 흑산도를 지나는 해상남로를 개척하였고, 양진(兩晋) 남북조, 수, 당과 교역을 하였다.

왜국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왜국을 경영하며 선박을 이용하여 왕래하였다.

왜국에서는 650년 백제인으로 하여금 백제석 '견당사선(遣唐使船)'을 건조하게 하였다.

      

 

준 구조선(準 構造線, 봉합선)

 

통나무 쪽배 다음으로 준 구조선인 봉합선이 발명되었다.

통나무 쪽배의 제6발달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외쪽 통나무 쪽배를 바닥판으로 하고 쪽배의 양현 쪽에 판자를 덧붙인다.

이때 판자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가죽끈이나 칡넝쿨로 엮은 동아줄을 꿰어서 조립한 배를

'조립봉합선(Stitched Boat)'이라고 한다.

 

 

구조선(構造線, 도구를 이용하여 만든 배)

 

인간은 불을 발견하여 활용하게 되고 또 쇠붙이(동, 청동, 철)를 발명하여 도구를 만들게 되었다.

불, 청동, 철물 등을 활용하여 도구, 즉 칼(刀) 끌(錯) 도끼(斧) 자귀(佐耳) 쇠못(鐵釘) 쇠띠(鐵帶) 등을

만들고 이것을 활용하여 나무를 자유자재로 제재(製材)하여 얇은 판자와 각목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러한 목재를 이용하여 지금까지 쓰던 뗏바이나 쪽바이 보다 더 나은 탈것을 창안하고

조립하여 만들었는데 이를 '구조선(構造線)'이라 한다.

 

 

민간선의 구조와 용도

 

거루(소소선, 小小船, 크기 4m)

만(灣) 내에서 돌아다니는 배.

작은 화물을 운반하거나 해안에서 해조류 등을 채취하고, 낚시배로도 사용한다.

 

야거리(소선, 小船, 크기 7m)

가까운 바다를 왕래하며 화물이나 어장의 고기를 실어나르는 운반선,

돛대 하나를 세우고 사각형의 조선식 돛을 매어 단다. 연해안에서 어망으로 어로활동도 한다.

 

당두리(唐道里, 中船, 크기 15m)

돛대 두 개를 세우고 사각형의 조선식 돛을 각각 매어 단다.

상고선(무역선)은 연안을 따라 왕래하며 많은 화물을 싣고 장사(무역)를 한다.

어선은 인근해로 나아가 어망이나 낚시로 직업적인 어로활동을 한다.

 

 

 

한선(韓船)의 장점

 

평저선인 한선(韓船)은

독특한 사각범(범포의 상연 하연 사이에 죽봉을 횡으로 3척 간격으로 매어달아 바람을 범포의 전면에

받을 수 있게 만든 것)을 달아 올려 바람을 받아 행선하는데,

순풍(順風, 배의 등 뒤에서 받는 바람)을 받게 되면 돛을 좌우로 활짝 펴서 최고 속력으로 달리게 된다.

한선은 옆쪽에서 불어오는 바람(側風)이나 앞쪽에서 불어오는 바람(逆風)을 받아도

갈지(之 )자로 사행하여 행선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거북배(龜船)에 대하여

명나라의 <해방의(海防議)>라는 책에서 아래와 같이 평가를 하였다.

 

[구선지제(龜船之制)]에「황명화옥해방의(皇明華鈺海防議)」云

“조선구선포범수면유의풍역조락역하행(朝鮮龜船布忛竪眠惟意風逆潮落亦可行)”

즉지공소창지선야(卽指公所創之船也).

 

[귀선의 제도]에「명나라 화옥이 지은 해방의」라는 책에

“조선 거북배는 돛대를 세웠다뉘기를 마음대로 하고 역풍이 불거나 썰물에도 갈 수 있다”하였다.

즉 이는 公(이순신)이 창제한 거북배를 가리키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한선(韓船)은 이물비우(板=船頭板)가 횡으로는 편평하지만

선두판 상부에서 선저까지는 스키(Ski)의 앞부리와 같이 원형으로 완만한 유선형을 이루고 있어서

바닷물 위를 미끄러지듯 파도를 타고 앞으로 나아간다. 마치 해병대 상륙정의 선두와 같은 기능을 한다.

 

한선은 이물(=선두, 船頭)이 평판상 모양이기 때문에

물의 저항을 받아 파도를 가르고 나아가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최근에 대형 상선, 유조선, 전함들이 선수(船首)에 커다란 철구(鐵球)를 매단 것 같은 구조를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반대로 파도가 높을 때 한선은 파도 위를 타고 나아가기 때문에 바닷물 속으로 처박히지 않는다.

큰 파도가 치면 선수가 뾰족한 화선(和船, 선수재 구조로 된 배)은

선수가 파도를 가르고 간다는 것이 오히려 파도 속으로 들어가 물속으로 처박히게 된다.

 

선저가 편평하기 때문에 배의 복원력은 좋지 않으나(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무거운 화물을 선창 바닥에

싣거나 화강암 같은 바윗돌을 선저에 설치하고 고정시킨다. 배의 중심을 낮추기 위하여 설치하는 것)

편평하고 넓은 갯벌에서는 배의 운용이 유리하고 편리하다.

진행방향을 돌려 행선하고자 할 때,

흘수(吃水: 배의 물속에 잠긴 부분)가 비교적 얕기 때문에 회전반경이 짧다.

180°를 회전할 때 멀리 돌지 않고 짧은 거리에서 회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회전속도가 빠르다.

따라서 기동성이 우수하다.

 

한선은 선재(船材)가 두텁고 무거우며 선체가 길고 크기 때문에

고대에 있어서 수전(水戰)을 하는 함선 즉 전함의 경우에는 유리한 점이 많았다.

선재가 두텁기 때문에 높은 파도나 웬만한 충격에 능히 견디고 적탄에 맞아도 쉽게 파손이 되지 않는다.

 

전선(戰船)인 판옥선(板屋船)은 현(舷)이 높고 선체가 장대하여 적병이 배에 기어오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선체가 육중하기 때문에 배의 운용이 힘들고 어려웠고

조선비용(선재와 인력)이 많이 들어가는 단점이 있다.

 

이와 반대로 일본의 배는 선재가 얇고 가벼우며 짧고 작기 때문에

조선 비용이 적게 들고 곧은 재료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공작이 용이하며 배의 운용이 쉽다.

그러나 선체가 단소(短小)하고 경박하기 때문에

전쟁을 하는 함선의 경우는 포탄에 맞으면 판재가 파열되고

풍파나 가벼운 충격에도 배가 파손되며 심할 경우에는 파선(破船)이 된다.

비교적 좁은 평저판에 너비가 넓고 두께가 얇은 현판(下棚 中棚 上棚의 三板으로 됨)을

철정(鐵釘)으로 봉합하기 때문에 쉽게 배가 부서지게 된다.

 

- 한선의 발달

한선(韓船)은

처음에 통나무배(獨木舟)로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②첫 단계로 통나무배를 길게 두 쪽으로 분할하여

그 중간에 판자 한 장을 넣어 '안압지배'와 같은 배를 산출하고,

③다음으로 너비를 더 넓히기 위하여 좌우현 L자형 만곡종통재 사이에 판자를 여러 장 더 넣어

평탄한 저판을 꾸미고 현측에도 외판을 여러 장 세워 붙여 깊이를 증대하여 '완도선'같은 배를 만들며,

④더욱 그것이 발달하여 세곡을 운반하는 대형 운곡선(運穀船)인 '초마선(哨馬船)'이나,

일본에 원정한 대형 '군선(軍船)' 등 완전한 한선이 고려시대에 이미 나타나고,

선박사(船舶史)에서는 나무배(木船)의 발달이

통나무배나 뗏목배 같은 나무로 된 원시형태의 배로부터 출발하여

처음에는 여러가지 형태의 '반구조선(半構造船, semi-constructed ship)'으로 진화하였다가

점차로 완전한 목구조선(木構造船)으로 발달한다는 것이 정설인데,

'달리도배'는 우리나라 선박발달사에서 등장하는 '반구조선' 중에서도

최종단계에 처해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곧, 한선의 발달은

'안압지배'에서 출발하여 '완도선'과 '달리도배'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⑥그것이 그대로 조선왕조에 계승되어

'판옥선(板屋船)'이나 '거북선' 같은 훌륭한 선박이 개발되기에 이르렀다. 

 

 

 

 
한선(韓船)이란
어촌민속실

우리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땅에 살고 있으므로

먼 옛날부터 강과 바다에 삶의 터전을 일궜으며,

고유한 해양문화를 갖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정착하여 수 천년 동안 바다를 개척하고 강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땅과 바다 조건에 맞는 배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류가 배를 만들어 사용한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의

일일 테지만, 구체적인 역사는 알지 못하고 있다.

선사인들은 처음엔 쉽게 구할 수 있는 통나무에 올라타고 손으로 물을 젓거나,

뼈나 나무로 노를 만들어 물을 저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여러 개의 통나무를 엮어 뗏목을 만들어 타기도 했다.

차츰 더 편리하고 안전하며, 쓰임새 있는 배를 갈망하여 온 결과

교통, 화물 운반, 고기잡이, 먼 항해, 전쟁 등 쓰임새에 맞는 갖가지 배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어떤 형태의 배를 만들어 사용하였을까?'

아직 그 내용에 대하여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는 단계지만,

몇몇 고고학 유적과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는 있다.

 

한선(韓船)이란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 환경에 알맞도록 발전하고 이어져 내려온

고유한 우리 배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특히 우리 한선은 배밑이 평평한 평저형선(平底型船) 구조를 고집한다.

이는 수심이 비교적 낮은 우리 해안의 환경 특성을 고려하여

배가 안전한 항해와 정박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선조들의 지혜라 할 수 있다.

 
 한선(韓船)의 구조

한선(韓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평저형선 구조라는 점이다.

배의 종류나 사용된 시기에 관계없이 이러한 전통을 줄곧 유지해 왔다.


한선의 기본 구조를 살펴 보면,

배밑(底板)은 평평하고, 이물(船首)과 고물(船尾)이 뭉툭하여 비교적 둔중한 모습을 한

평저형선(平底型船)으로서, 이러한 구조는 흘수(吃水)가 낮아 조석(潮汐)의 변화가 많고

수심이 얕은 우리 연안에서 활동하는데 적합하다.
또 배의 양현을(兩舷) 지탱하는 횡강도부재로서 가룡(加龍木)과 멍에(駕木)라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며, 삼(外板)을 비롯한 모든 선재(船材)는 나무못(長 , 皮)으로 고정하는 등

공통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배밑(底板)
배밑은 배의 바탕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구조이다.

그래서 배밑을 '본판(本板)' 또는 '저판'이라 부른다.

 

배밑의 만듬새는 여러 개의 길고 두터운 재목을 평행하게 놓고 양 옆에서 구멍을 뚫어 가쇠(長)라 부르는 긴 나무못을 끼워 맞춘다.

밑판의 두께는 삼판의 두께에 비해 훨씬 두텁다. 이처럼 배밑을 평탄하고 두껍게 구조한 것은 지형적인 조건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우리 배는 주로 연안을 따라 운항하므로 흘수(吃水 ; 배가 물에 잠기는 깊이)가 낮은 배가 유리하다.

 

서해와 남해안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관계로 만조 때에는 배가 물에 떠있으나 간조 때에는 개펄에 평탄하게 내려앉을 수 있고 풍랑을 피해 배를 육지로 끌어올릴 때에도 배밑이 평탄하고 튼튼할수록 이동이 편하다는 것 등이 평저선형을 고집하게된 배경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선의 구조

 삼판(外板)
삼판은 외판(外板), 삼(杉)이라고도 부른다.

삼판을 무으는 방법은 밑에 오는 삼의 윗면에 'L'자형의 홈을 판재 두께의 2/3정도로 깊게 파고,

그 자리에 윗 삼을 올리고 나무못을 박아서 고정시킨다.

이런 만듦새는 독특한 삼판 연결방법으로 '턱붙이 겹이음(rabbetted clinker-built)'이라고 한다.

나무못은 피삭(皮), 피쇠라고 부르며,

나무질이 단단한 박달나무, 전나무, 뽕나무, 가시나무 등으로 만든다.

 

 

 이물비우(船首)
선수는 비우(鼻羽, 比牙, 飛荷, 非雨) 또는 이물비우라 부른다.

이물비우의 모양새는 평판선수로서 뭉툭한 모양이며 비우 폭은 배밑의 폭과 비례한다.

만듦새는 판자를 가로방향으로 붙이는 가로붙이법과

세로방향으로 붙이는 세로붙이법 두 가지가 있는데,

특히 군선(軍船)의 경우에는 세로붙이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고물비우(船尾)
선미는 고물비우라 부른다.

한선의 고물비우는 그 형식에 있어 각형선미(角形船尾 ; Transom Stern)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양과 경사도는 배에 따라 다르고 일정하지 않다.

 

 

 멍에(駕木)
멍에는 한선에서 대들보의 구실을 해주는 횡강력부재로 맨 위의 삼판을 걸어 설치한다.

멍에는 배의 종류와 용도 그리고 배의 크기에 따라 설치되는 수량이 달라진다.

즉, 일반 어염상선(漁鹽商船)이나 조운선과 같이 갑판을 올릴 필요가 없을 때는 그 숫자가 적고,

전선이나 거북선과 같이 상부에 구조물을 시설해야 하는 경우에는 멍에의 숫자가 많아진다.

 

 

 게롱(駕龍木)
게롱은 멍에 밑에 시설되는 횡강력재로서

각 단의 삼판을 꿰뚫어 좌우 양쪽 삼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서양 배에는 ‘늑골(肋骨)’이, 중국 배의 경우에는 ‘격벽(隔壁)’을 시설하지만

우리 배에는 ‘게롱’ 이라는 독특한 횡강력재를 사용한다.

 

  

 우리나라 배의 역사

배모양 토기
▲ 배모양 토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4전시실에서는 여러 출토품과 문헌자료를 통해 복원한 모형배를 중심으로 우리 배 '한선'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선조들은 오랜 옛날부터 바다와 강을 건너는 방법을 생각하였고, 점차보다 멀고 빨리 항해하는 배를 만들게 되었다. 또한 선사시대부터 이미 돛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유물과 유적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옛 배는 통일신라시대 안압지 통나무배, 고려시대 배 6척이 있으며, 대부분 저판과 외판 일부만 남아 있다.

배모양 토기, 장보고시대 무역선을 만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자료는 배그림 청동거울과 수중발굴 달리도선 모형이 있으며, 조선시대의 자료는 거북선과 판옥선 · 조운선 · 조선통신사선 모형 등이 있다.

현대 선박으로는 강화도선과 관매도어선이 전시되었다.

장보고 무역선 모형
▲ 장보고 무역선 모형
조선통선사선 모형
▲ 조선통선사선 모형


 

 

 한국 배의 시작

 

우리나라 배의 역사는 신석기시대에서 시작된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유적은

함경북도 서포항의 신석기시대 조개무지(기원전 3,000년)이며,

여기에서는 고래뼈로 만든 노(櫓)가 출토되었고, 

또한 최근 경상남도 창녕에서 신석기시대의 통나무배가 발굴되었다.

 

 

 

 사시대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배 관련 흔적으로는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함경북도 서포항 조개무지(貝塚;기원전 3,000년경)에서 출토된

고래뼈로 만든 노(櫓)를 들 수 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배를 만들어 사용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그 이전부터도 배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선사시대 통나무배 제작 풍경
▲ 선사시대 통나무배

제작 풍경

선사시대 고래잡이 풍경
▲ 선사시대 고래잡이 풍경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경상남도 울주군 반구대(盤龜臺) 바위그림(岩刻畵; 국보 285호)이 있다.

이 유적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문화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

선사시대의 배 모양을 살펴볼 수 있는데

호랑이를 비롯한 육지동물, 바다동물과 함께 4척의 배가 그려져 있다.

배의 형태는 초승달 모양으로 여러 사람이 타고 고래를 잡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 속의 다양한 그림
▲ 반구대 암각화 속의 다양한 그림

  

초기 철기 및 원삼국 시대 조개무지에서도 어로도구와 물고기뼈 등이 발견되었다.

선사인들이 배를 이용하여 해상활동을 전개하였음을 나타내는 흔적들이라 할 수 있다.

 

 

최근까지 남아 있던 원시적인 배의 형태로는 소형 통나무배와 뗏목배를 들 수 있다.

소형 통나무배는 대동강과 한강에서 주로 사용되던 '마상이'이라는 것으로

한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아주 조그마한 통나무배이다.

뗏목배의 경우 제주도에서는 현재까지도 어로작업 등에 이용되는데 '떼배'라 부르고 있다. 이런 뗏목배는 동해안의 정동진에도 남아 있으며

수십년전까지만 해도 서해안과 남해안 일부에서 어로작업에 사용되었다.

 
 고대의 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사신 파견과 수군(水軍) 활동이 활발히 이뤄짐에 따라

항해술과 조선술이 발달하였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6년(396년)에는 수 천리를 항해할 수 있는 군함과 수군이 조직되었으며, 백제는 삼국 중 가장 해상활동이 활발하여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라는 국초부터 왜구의 침입을 방어를 위해 수군을 정비하였다.

진평왕(眞平王)때에 병부 밑에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고,

문무왕(文武王) 18년(678)에는 선박의 사무를 담당하는 선부(船府)를 설치하였다.


이 시기 배의 형태를 알 수 있는 문화재는

신라와 가야의 무덤에서 발견된 배모양 토기(舟形土器)이다.

5세기 신라유적인 경주 금녕총에서 배모양 토기(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점,

5~6세기 가야지역에서도 배모양 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국립경주박물관, 호림미술관, 호암미술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배모양 토기
▲ 배모양 토기(보물 제555호, 5~6세기)
배모양 토기(5~6세기)
▲ 배모양 토기(5~6세기)
배모양 토기
▲ 배모양 토기(5~6세기)
배모양 토기(5~6세기)
▲ 배모양 토기(5~6세기)


 

 

 장보고시대의 배

 

통일신라시대에는

공무역에서는 사신선(遣使船), 사무역에서는 상선(商船)의 활약이 매우 활발하였다.

특히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신라인들의 해외 진출이 증가하여

중국 산동성 등지에 신라방(新羅坊)과 신라소(新羅所)가 설치되었다.

중국에 진출한 신라인들은 바다를 주무대로 무역활동을 펼쳤으며,

장보고(張保皐)와 같은 역사적 인물을 만들어냈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활동하다 귀국하여

흥덕왕(興德王) 3년(828)에 청해진(淸海鎭 ; 현재의 완도)을 설치하고

중국 ·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전개하여 동북아의 해상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장보고의 이러한 활약은

바다를 다스릴 줄 알았던 신라인들의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으며,

이때 주로 사용한 배는 교관선(交關船)이다.

이 시기에 사용된 배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선박은 안압지 통나무배이다.

장보고 대사 표준영정
▲ 장보고 대사 표준영정
장보고 무역선 상상복원 그림
▲ 장보고 무역선 상상복원 그림

 

 

 

 

 통일신라시대 통나무배 "안압지선"

장보고 대사 표준영정

 

안압지선(雁鴨地船)은 3개의 통나무를 이어 만든 통나무배이다. 가장 오래된 실물배로서 우리배 구조의 기원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사용한 나무는 모두 소나무였으며 함께 출토된 노(櫓)도

같은 종류의 소나무였다.(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고려시대의 배

 

고려시대는 통일신라의 배 건조기술을 이어받아

우리 배의 구조와 선형(船型)이 완전하게 자리매김하는 시기이다.
고려시대의 배는 군선과 보조 병선, 대외 활동을 위한 무역선,

물품 운송을 위한 조운선(漕運船) 등 쓰임새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고려사』기록에 나타나는 태조 왕건(王建)의 대선(大船)과

북방의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과선(戈船),

그리고 원(元)나라 요구에 의해 만든 수 백 척의 일본 원정선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군선이다.

청동 배그림 거울(고려)
▲ 청동 배그림 거울(고려)

고려시대는 우리나라의 바닷길을 운송로로 활용하는 조운제도가 확립되었다. 또한 멀리 서역까지 이름을 알릴 정도로 국제적인 나라였으며, 중국의 송(宋)나라와 교류가 매우 활발하였다.

 

1123년 송나라 사절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은 『고려도경』에서 당시의 고려 무역선 또는 사송선(使宋船)중 관선(官船), 순선, 송방(松舫), 막선 등을 소개하였다.


수중발굴 고려시대 배는 완도와 목포시 달리도 앞바다에서 인양된 두 척의 고선박이 있다.

완도선은 11~12세기 경의 연안 상선이며,

달리도선은 완도선보다 늦은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에 항해인 배로서 완전한 구조선(構造船)으로 발달된 형태이다. 이외에도 고려시대 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로는 거친 파도를 헤치고 항해하는 배 그림의 청동거울(銅鏡)이 있다.

 

 

 

 

 조선시대의 배

조선시대에는 민간 해양활동은 통제된 반면

고려 말부터 해안지역과 섬, 바다를 침입했던 왜구들을 막기 위해 수군제도를 확립하였으며, 조선 초기부터 군선을 정비하였다.
세종 1년(1419년)에 상왕(上王)으로서 병권을 쥐고 있던 태종(太宗)은

군선 227척과 17,285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세종(世宗)대에는 829척이나 되는 군선을 보유하였다.

세조(世祖)때에는 군용과 조운 겸용의 병조선(兵漕船)이 만들었고,

『경국대전』의 반포와 더불어 대맹선(大孟船)과 소맹선등으로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군선인 판옥선(板屋船)이 개발되었으며

임진왜란에서 우리 수군의 주력함으로서 여러 해전에서 활약하였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상갑판 대신 둥근 개판(蓋板)을 설치하였으며

배의 앞부분에 용의 머리를 달아 그 형상을 거북이와 비슷하게 만든 배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 수군은 체제를 강화하여 군선의 종류가 가장 다양해진다.


조운제도는 고려시대의 제도를 계승하여

전국의 주요 바닷길에 조창(漕倉)을 설치하고 20~63척의 조운선을 배치하였다.

 

조선시대의 대외활동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의 활동이다.

임란이후 일본의 거듭되는 요청을 받아들여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년 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통신사의 선단(船團)은 모두 6척으로 구성되었다.

조선통신사선(축소모형)
▲ 조선통신사선(축소모형)

 

 

일반 선박으로는 조선 후기에 고깃배, 소금배, 장삿배 등 어염상선(漁鹽商船 또는 地土船)이

연안을 따라 활발한 상업 활동을 하였다.

시기
종류
조선 전기
『세종실록지리지』
조선 중기 조선 후기
군선 대선 귀선 전선
중대선 방선
중선 병선
병선 판옥선 귀선
쾌선 사후선
맹선 협선 거도선
중맹선 급수선
별선 포작선 협선
무군선 추포선
기타 기타
병조선 병조선    
사신선     사신선
조운선 병조선 조운선 조운선
기타 거도선   해선
검선 강선

 

 

 조선시대 배의 변화

 
판옥전선 / 각선도본 중에서
▲ 판옥전선 / 각선도본 중에서
판옥선(축소모형)
▲ 판옥선(축소모형)
거북선(축소모형)
▲ 거북선(축소모형)

조운선 / 각선도본 중에서
▲ 조운선 / 각선도본 중에서

조운선(축소모형)
▲ 조운선(축소모형)

조선시대 바닷배
▲ 조선시대 바닷배

 

 

 

   근대의 배

근대 고기잡이배 분포도(어선조사보고서, 1930년대)
▲ 근대 고기잡이배 분포도

(어선조사보고서, 1930년대)

조선 후기에 나라의 문호를 개방한 후 동력의 힘으로 움직이는 기선(汽船)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고유의 배는 점차 사라진다.


수군이 해체되고 세곡 운송에 기선이 쓰여지기 시작한 이후로 수백 년간 내려온 전통적인 군선과 조운선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전통적인 배는 규모가 작은 고깃배, 짐배, 장삿배 등 어염상선(漁鹽商船)과 같은 작은 규모의 배들만이 남는다.
이 배들의 구조는 전통적인 평저형 구조를 이어 받았지만 갑판 부분만 쓰임새에 맞게 변형하였다. 이들 어염상선도 점차 서양식 구조법이 더해져 개량되었으며, 1930년 이후 순수한 우리 배(韓船)는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가거도(可居島) 멸치잡이배, 강화도 곳배, 낙월도 멍텅구리배 등은 전통 한선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마지막 배라 할 수 있다.

 
관매도 어선
▲ 관매도 어선
강화도 어선
▲ 강화도 어선

  

 

 

 

 전통배의 종류

 

 목배

통나무 하나로 물을 건널 때는 '부목(浮木)'이라 하고,

여러 개의 통나무를 엮어서 만든 것을 '뗏목이'라 한다.

 

인간이 최초로 만든 배는 뗏목과 갈대배이다.

뗏목배는 여러 개의 통나무를 엮어 물에 띄워 이동하며 주로 해안지방에서 사용한다.

 

제주도나 동해안 일부 지방에서는 아직도 떼배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을 제주도에서는 태우, 티우라 하고, 동해안 지방에서는 떼, 토막배라 한다.

떼배를 이용하여 미역과 같은 해조류를 채취하거나, 돛을 달아 섬과 섬 사이를 왕래하였다.

떼 배
규모 : 길이 5.1m, 너비 2.3m

떼배(筏船)는 제주도 · 남해안 · 동해안 등의 해안가에서 해산물 채취와 소규모 고기잡이에 널리 사용된 한국 전통 배이다.

현재는 제주도와 동해안 일부 지역에만 남아 있으며, 뗏목배 · 벌선(筏船) · 테우 · 터우 · 티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통나무배

통나무배는 여러 개의 통나무를 엮어서 만들기 때문에

뗏목배보다 편하고 빠른 점이 특징이다.

통나무배는 큰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 속을 파내어 마치 구유처럼 만든다.

외쪽 통나무배는 길이에 비해 너비가 좁기 때문에 쉽게 뒤집힐 염려가 높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쌍 쪽배와 두 쪽배였다.

쌍 쪽배는 외쪽으로 된 통나무 두 개를 짝지어 붙인 것이고,

두 쪽배는 두 토막의 통나무 속을 L자형으로 파내어 배밑을 이어붙인 것.

이러한 통나무배에 돛을 단 배가 동남아 지역의 아우트리커 카누이다.

 

 

 나룻배

나룻배는 돛을 달지 않고 노나 삿대 그리고 강 건너에 줄을 연결하여 이동하였다.

톱이나 끌 · 자귀 등 연장들이 발달하면서 널판지를 이어 붙여 배를 만들었는데,

3쪽의 판재로 밑판으로 편평  뱃전은 2~3쪽의 판재를 겹쳐 쌓아 올리고

참나무 못을 촘촘히 박았다.

뱃전의 앞과 뒤는 활처럼 비스듬히 솟아오르는데

선수 쪽은 그 경사가 더 완만하고 선미는 급한 것이 특징이다

 

 

 야거리

늘배, 널빤지배와 비슷한 모양을 한 바닷배이다.

야거리는 돛대가 하나인 작은 배이며 고기를 잡거나 수산물을 싣고 근해를 이동하는 배이다.

『경국대전』에 나오는 야거리는 길이가 18자 6치, 너비가 13자 6치 정도이지만,

때로는 33자 6치 이상되는 배도 야거리에 속했다.

1984년 완도 앞바다에서 인양된 ‘완도선’이 야거리에 속하는 바닷배이다.

완도선은 통나무를 켜 두터운 판재로 저판과 뱃전을 두었으며,

게롱과 멍에를 가로로 걸고 갑판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야거리는 바닷배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거룻배에서 비롯되었다.

 

 

 늘배

늘배는 짐을 싣는 강배인데 나룻배와 비슷하다.

강을 따라 상류에서 하류로 하류에서 상류로 많은 짐을 싣고 오르내리는 배였다.

배 밑은 넓적하고 뱃전은 곧게 세워져 있다.

늘배는 배를 부리는데 많은 힘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돛을 세워 바람의 힘으로 배를 부렸다.

 

 

 당두리

당두리선은 돛을 두개 세운 큰 바닷배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길이가 42자, 너비18자 9치 이상이다.

보통 두개의 돛을 달아서 두 대박이라고도 한다.

양쪽의 돛대는 곧게 세우고 뒤쪽의 돛대는 비스듬하게 눕혀 바람의 힘을 자유로이 조종하였다.

 

배밑과 뱃전 등 배를 무으는 방법이나 게롱이나

멍에로 배의 내부를 꾸미는 조선건조 방법은 비슷하지만

내부의 칸을 막아 짐을 실을 수 있도록 공간을 넓히고

겻집과 같은 상부 구조물(사람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 등을 꾸미는 구조는 배마다 차이가 있다.

 

 

 

가거도배
가거도배
규모 : 길이 9.4m, 너비 3.2m

전남 신안군 가거도 지역의 멸치잡이 배.

450여 년 전에 제작되어 활용되다가 1960년 이후 동력선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사라졌다.

 

가거도에서는 목선이라 부르며 어로작업 이외에도 육지로 이동하는 장삿배이자 교통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멸치잡이 때는 외판을 5단, 운송할 때는 그 위에 2단을 덧붙여 뱃전을 높여 항해하였다.

 

 

통구마니배
통구마니배
규모 : 길이 6.75m, 너비 1.9m

경상남도 남해안 지역의 고기잡이배.
본래는 통나무 속을 파내어서 만들었으며, 이 때문에 ‘통선’, ‘통구마니’, ‘통구맹이’, ‘통구밍’이라고도 부른다. 1900년대 초반 새로운 목선기술이 들어오면서 구조가 많이 변형되었지만, 이물비우(선수)와 멍에 · 돛 · 노 등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멍텅구리배
멍텅구리배
규모 : 길이 15.5m, 너비 6m

멍텅구리배(醯船網漁船)는 서해안의 새우잡이배이며, 수 백 년 전부터 제작되었다.

‘멍텅구리’란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유래된 이름이며, 옛날에는 ‘중선’ 또는 ‘젓중선’(전라도), ‘곳배’(경기도), ‘젓배’라고 불렀다.

전남 신안 임자도 전장포, 영광 낙월도 지역에 많았으나 정부의 어업구조 조정으로 인해 1995년 6월 이후 섬사람들의 숱한 애환과 함께 사라졌다.

우리 배(한선)의 특징이 잘 남아 있으며, 전통 생업문화(어로풍습)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멍텅구리배 큰 닻
멍텅구리배 큰 닻
규모 : 길이 8.3m

목포 해양문화재연구소 바닷가에 떠있는 멍텅구리배의 닻이다.

닻은 바다에서 배를 고정(정박)하기 위한 도구이다. 옛날에는 무거운 돌을 닻으로 사용였으며, 이후 갈고리 모양의 동물뼈나 나무에 돌을 매달아 사용하기도 하였다.

2000년 6월, 전통 조선기술과 어로민속을 보존하기 위해 전남 신안군의 어민들과 함께 해변광장에서 제작하였다.

 

 

영산강 유역 강배 닻
영산강 유역 강배 닻
규모 : 길이 5.25m

전라도 영산강 일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소형 안강망어선의 닻.

물의 흐름이 빠른 곳에서 커다란 닻으로 배를 고정한 후, 좌우로 그물을 매단 수해(드릇)와 암해(질)를 펼쳐 숭어, 모치, 조기, 해파리 등을 잡는데 활용하였다.

 

 

서남해 최초 쾌속여객선 ‘남해호’
서남해 최초 쾌속여객선 ‘남해호’
규모 : 길이 25.6m, 너비 5.9m

남해 2호는 서남해안에 최초로 들어온 고속 여객선으로 서남해 현대 해운사에 기념되는 배이다.

1981년 8월 첫 취항하여 1991년까지 목포에서 신안군 비금, 도초, 흑산을 지나 홍도까지 왕래하였다.

당시 일반 여객선은 홍도까지 8시간 정도였으나, 이 배는 2시간 30분밖에 걸리지않아 섬사람들의 생활에 큰 변화를 주었다.

(정원 119명, 속도 35노트, 약 110톤)

 

 

 
베트남 배
베트남 배
규모 : 길이 14m, 너비 3.2m, 깊이 1.3m

2000년 베트남 젊은이 5명이 우리나라까지 타고 온 배이다. 이들은 약 40일 동안 수천 km의 바다를 항해하여 전라남도 신안군 가거도 부근에 도달하였다.

밀입국한 이들은 목포해양경찰에 의해 발견되었고 안타깝게도 본국으로 다시 보내졌는데 이 배는 동남아시아의 전통 선박의 이해와 고대 해상교류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전시하고 있다.

 

 

중국 배
중국 배
규모 : 길이 13m, 너비 3m

2008년 중국인 11명이 우리나라에 타고 온 배.

중국 강소성에서 왔으며 전라남도 신안군 가거도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밀입국을 위한 항해이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중국인들은 중국으로 다시 보내졌다. 이 선박은 중국의 사선형 평저선으로서 전통적인 선박 구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평저형 배로도 머나먼 항해가 가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목포 달리도배 

 

 

전남 목포시 충무동 달리도(達里島) 앞바다에서 고선박(古船舶)

달리도는 목포시에서 서쪽으로 6.5㎞ 지점에 위치하는 곳으로,

남쪽으로는 해남군 화원면과 마주하며 북쪽으로는 신안군 압해면, 서쪽으로는 팔금면과 접하고 있다.

또 주위로는 눌도, 고하도, 외달도, 장좌도가 나란히 위치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남 목포시 충무동에 속한다.

 

달리도는 영산강 하구와 근접하고 압해도 및 해남 화원반도와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어

예전부터 서남해안 해상교통의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남해안 도서지역은 선사시대부터 해상을 통한 문화의 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흑산도, 가거도, 하태도, 우이도 등에 신석기시대의 조개무지(貝塚)유적이 형성되어 분포하고 있다.

이들 조개무지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빗살무늬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남해안의 신석기문화와 관련이 깊고

연대도 중기 내지 전기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후 청동기시대 유적은 모든 도서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하며 유적 또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과 유물로는 고인돌과 석기류가 있다.

특히 석기류는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남 내륙지방에서 조사된 유물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전남 서해안지역에서 도서지역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철기시대 유적으로는 임자도, 압해도, 하의도 등지의 패총유적을 들 수 있다.

前 시기에 비해 많은 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이 지역이 해양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어 유적의 분포가 높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마한 諸小國의 지배층이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옹관고분의 경우 조사된 예는 없으나

옹관 片이나 옹관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개배(蓋杯)와 유공광구소호(有孔壙口小壺) 등이

조사되고 있다.

 

달리도 매몰선은

1989년 6월경 섬 북쪽에 위치한 속칭 ‘지픈골’ 앞 해변에서 낙지잡이를 하던 마을주민들에 의해

개펄에 노출된 매몰선체 및 유물 일부가 발견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1994년 2월경 같은 마을주민들에 의해 매몰선 주변에서

접시 2점, 청동숟가락 1점을 포함한 다량의 도자기 片이 수습되어 신고되었다.

1994년 2월28일 현지조사 결과 노출된 선체는 고식(古式)의 전통 한선(傳統 韓船) 구조로 확인되었으며,

1995년 6월28일-7월29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달리도 매몰선체에 대한 발굴조사는

섬의 북서쪽에 자리한 달리2구의 일명 ‘지픈골’ 앞 개펄에서 수행되었다.

이 해안은 평평한 해안퇴적층이 비교적 넓게 발달된 곳이었으나,

1981년 영산강 하구둑의 축조이후부터 유입되는 토사양의 감소와 함께

섬 주위 바닷물의 흐름이 변하기 시작하여 해안퇴적물이 점차 씻겨 내려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안지형의 변화에 기인하여 개펄 속에 묻혀있던 달리도 매몰선이

점차 노출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마을주민들에 의해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이 침몰 선체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만조 시에는 잠기고,

간조 시에 물이 빠지면 선체의 일부가 드러날 정도로 개펄에 얕게 묻혀있었다.

선체 내에는 어떤 적하물(積荷物)도 남아있지 않았다.

 

달리도 매몰 선체는 뱃머리(船首)를 서서남 방향으로 두고,

우현(右舷)쪽으로 18˚정도 기울어진 채 매몰되어 있었다.

선체는 船首와 船尾의 일부가 좌현의 선재와 함께 노출되어 있었다.

잔존 선체는 저판 3열과 우현 외판재 4단, 좌현 외판재 2단 및 선미판의 일부가 온전히 결구된 채

매몰되어 있었다.

선체 내부에는 뱃몸에서 분리된 좌현 제3단 외판재의 일부가

횡강력재인 각재(角材) ‘멍에형 게롱(가룡목, 加龍木)’ 1점과 함께 우현에 얹혀 출토되었다.

 

조사된 달리도선의 잔존 규모

全長 10.50m. 잔존 폭 2.72m, 잔존 깊이 0.80m 정도이다.

달리도선의 발견 의의는 1982년 발굴된 11세기 중후반경의 고려시대 완도선(莞島船)과 더불어

지금까지 알려진 초기 한선(韓船)의 구조 및 그 발달과정을 재조명할 수 있는 선박자료로서

한선사(韓船史)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잔존 船體片을 통해 초기 복원한 달리도선의 주요 척도

전장(全長, Length over all) : 약 12m

선폭(船幅, Breadth) : 약 3.6m

선심(船深, Depth) : 약 1.6m (저판 하면에서 최상단 외판까지의 깊이)

 

 

- 달리도선의 발굴 의의  

달리도선의 발굴은 한선(韓船)연구에 있어서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공백으로 둘 수밖에 없었던

초기 한선의 구조와 발달단계 연구 등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선박으로는 경주 안압지 통나무배(1974년 발굴), 신안선(1976~1984년 발굴),

진도 통나무배(1992년 발굴) 및 완도선(1982년 발굴), 목포 달리도선 발굴 등 5건이 있으나,

이중 신안선과 진도 통나무배는 중국계 선박으로 확인되었으므로 우리 배는 3척에 해당한다.

경주 안압지 통나무배는

통일신라기에 속해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되었으나 원시적 단계의 통나무배이며,

완도선과 달리도선은 구조선(構造船)으로 분류된다.

 

11세기 중후반경의 선박으로 파악되고 있는 완도선과

그보다 후대인 13~14세기경에 활동한 것으로 파악되는 달리도선은

상호 유사한 특징과 형태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

세부 구조적인 면에서 달리도선이 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완도선의 경우는 선저부에 만곡종통재의 구조를 지니고 있어

아직 반구조선(半構造船)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달리도선에서는 이 부재가 생략되고 외판과 저판이 직결(直結)되는 등 진보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가룡목 설치의 정형성과 부재(部材)의 형태, 고착방법 등에 있어서

보다 발달된 구조선(構造船)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완도선은 한국의 전통적인 재래식 한선(韓船)의 구조와 그 한선 발달의 역사를 풀이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이다.

완도선이 발굴되기까지는 한국의 독특한 한선의 구조가 과연 어느 때부터 생성되기 시작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는 아주 묘연했다.

그런데 완도선은 통나무배를 둘로 쪼개어 그 중간에 5장의 저판재를 넣어서 선저(船底)를 넓히고

양 측면에 4~5장의 외판재를 붙여올라가서 배의 깊이를 늘리는 등,

통나무배로부터 완전한 목구조선(木構造船)으로 발달하는 중간단계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달리도선은 우리나라 선박발달사에서 등장하는 반구조선(半構造船) 중에서도

최종단계에 처해있는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달리도선의 발굴은 참으로 값진 성과라 할 수 있다.

1982년 발굴된 11세기 중후반경의 고려시대 완도선과 더불어

지금까지 알려진 초기 한선(韓船)의 구조 및 그 발달과정을 재조명할 수 있는 선박자료로서

한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기대한다.

          

달리도선은 중앙단면의 구조 형식만으로도

이 배는 전형적인 평저선형(平底船型)의 한선(韓船)임을 알 수 있다. 

달리도선의 횡단면 구조는 3재의 저판재를 가쇠(長槊)로 결합해서 평탄한 저판(底板, 배밑)을 만들고

좌우 양현에 외판재(外板, 杉板)를 홈붙이 겹이음으로 붙여 올리고,

피쇠(皮槊)로 고정하여 선현(船舷, 뱃전)을 이루고 있다.

또한 좌우현의 외판재는 각각 가룡목(加龍木, 게롱)을 꿰거나 걸어서 지지하고 있다.

 

 

- 달리도선의 연대

달리도선을 구성하고 있는 선재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C14) 측정결과에 의하면

AD 1210~1400년간(확률 95%)인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달리도선은 13~14세기경에 활동한 선박으로 간주된다.

 

또한 선박의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11세기 중후반경의 선박으로 파악되고 있는 완도선과 달리도선은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구조적 측면에서는 이보다 발달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완도선에서는 반구조선(半構造線)의 흔적인 만곡종통재의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달리도선에서는 생략되고 외판과 저판이 직결되는 구조로 발달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양된 선체(古船)의 연대는 배의 구조 및 제작기술을 살핀다든지

혹은 공반 유물의 종류와 성격을 규명함으로써 연대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도에서 인양된 한선(韓船)의 선체구조 및 제작기술의 규명으로는

제작시기를 판정할 만한 자료가 축적되어 있지 않고

또 편년을 제시할 만한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선체를 구성하는 목판을 사용하여 연대를 밝힐 수 있는 자연과학적 방법이 요구되었다.

자연과학적 연대측정법에는 탄소를 함유하고 있는 목재 시료의 경우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이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다.

 

 

- 달리도선의 수종(樹種) : 선재(船材)

선박용재는 선체의 구성 및 흡수(吸水)특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선(韓船)의 구성수종은 거의 대부분이 소나무(해송 포함).

그리고 상수리나무와 졸참나무로 대표되는 참나무류가 주류를 이룬다.

특히 선체 주요부위인 외판이나 저판은 모두 소나무를 이용하였으며

상수리나무나 졸참나무와 같은 참나무류는 강도 보강용으로 부분적으로 사용하였다.

소나무는 비중은 약간 낮으나 가볍고 가공하기 쉬우며 상당한 내수성(耐水性)을 가져서

외판이나 갑판용재에 주로 쓰이고,

산뽕나무는 휨 강도와 전단강도가 높은,

즉 잘 부러지지 않는 목재여서 멍에형 가룡재에 선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997년 '가거도'의 복원에서 배 목수들이 장삭이나 쇠부분에 산뽕나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예로부터의 전통이 이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사용중 선체를 보수할 때는 보판(補板)용재로서 비자나무, 굴피나무, 참나무류 등

소나무보다 단단하고 내구성이 강한 수종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관행을 기준으로 보면

달리도배에서는 저판부에서 이들 보판용 수종이 없는 것으로 보아

건조후 한 번도 보수하지 않은 채로 침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달리도선은 13세기 고려시대의 한선(韓船)으로

선재에서 취한 시료를 통하여 수종을 판별하고 원목 사용량을 조사한 결과,

배의 기본골격을 이루는 외판재와 저판재는 소나무이고,

횡강력부재인 가룡목은 참나무과 상수리나무 인 것으로 밝혀졌다.

  

달리도 선재의 가공단면부 나이테를 측정해본 결과

저판 및 외판에 사용된 소나무는 수령 50~70년의 것으로 나타났다.

또 사용재가 대부분 하나의 원목에서 한 재(材)만을 절취한 것으로 학인되었다.

  

 

- 구조특성

  

 

 선저(船底)

: 달리도선은 3材의 배밑 구조를 지닌 평저형(平底型) 선박으로서 전형적인 한선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저판의 폭은 선수 쪽이 선미보다 약간 넓게 시설되어 있다.

저판의 횡단면은 선수와 선미 양쪽이 위로 솟는 만곡(彎曲)된 형상을 지니고 있어서

완도선과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다.

러나 조선시대 및 근세 한선의 경우는 거의 평직(平直)한 형태를 나타낸다.

 

시대

선종(船種)

저판 길이

(底板 長)

저판 폭(底板 幅)

두께

(厚)

 

장폭 비(帳幅 比)

허리부위

(腰廣)

이물-고물

(船首-船尾廣)

고려

완도선

6.50m

1.65m

1.10 ~1.05m

18~20㎝

3.94

달리도선

9.50m

1.15m

0.65 ~0.52m

15~20㎝

8.26

조선

복물선=짐배

(卜物船)

9.29m

2.79m

1.55m

18.6㎝

3.33

사후선

(伺候船)

7.43m

2.17m

1.24m

17.0㎝

3.42

사선=낚시배

(梭船)

4.64m

1.39m

0.93m

15.5㎝

3.34

- 한선(韓船)의 저판(底板) 비교 -

 

 

 

 

외판(外板)

: 외판(삼, 杉)은 좌우 모두 4단까지 남아있지만

4단 외판의 상부에도 ‘ㄴ’자형의 홈이 가공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5단 이상의 외판이 시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수(船首)와 선미(船尾)

: 선수 부분이 완전히 유실되어 정확한 구조를 밝힐 수는 없지만

한선의 특징인 평판형 선수구조를 지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미 구조는 선미쪽 외판 안쪽에 ‘凹’형의 홈을 시설하고

선미판재(고물비우)를 끼워 넣어 구조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횡강력재(橫强力材)

: 달리도선에서는 횡강력재로서의 가룡목이 4구간에 걸쳐 시설된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선수쪽 유실 부분을 포함하면 5구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룡은 각 단에 따라 구조방법을 달리하고 있다.

즉 일반형태의 가룡과 일명 ‘멍에형 게롱’을 혼용하고 있다.

완도선과 비교해볼 때 가룡 시설 위치가 보다 정형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선체 상단부의 유실로 인해 가목(駕木, 멍에)의 구조는 확인할 수 없었다.

 

고착법(固着法)

: 달리도선의 각종 고착(固着)은 나무못(木釘)에 의해 이뤄졌으며 철못(鐵釘)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쇠붙이를 즐겨 쓰지 않고 배를 짓는 한선(韓船)의 특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선체의 고착에 사용된 나무못으로는

저판재(底板材)를 연결하는 장삭(長槊, 가쇠)과 외판(外板)을 붙이는데 사용되는 피삭(皮槊, 피쇠)

그리고 장삭, 피삭 및 가룡 등의 고정 핀(Pin)으로 사용된 ‘산지(고정용 나무 핀)’ 등이 있다.

외판의 고착은 완도선과 같은 형태의 구형(矩形) 피삭이 사용되었으며,

저판재의 고착은 3材의 저판재 측면에 각각 장삭구멍(가로10×세로4~5㎝)을 내고,

저판의 폭에 따라 사각 단면(길이 53.5~115㎝)의 장삭으로 11구간에 걸쳐 삽입함으로서 고착하였다.

 

추진구(推進具)

: 달리도선의 추진구와 관련한 시설물로는

돛대뿌리 홈이 중앙 저판재의 중심부에 시설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나

돛대를 하나 장착한 단범섬(單帆船)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돛대의 고정을 위해 가룡에 설치된 ‘당아뿔’ 부재도 확인되었다.

키(舵), 닻, 노(櫓) 등의 부속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선형(船型)과 주요 척도

: 구조적 특성 즉, 평저형의 횡단면 구조, 턱따기가 된 외판 구조, 평평한 선수와 선미 형태,

횡강력재로서 채용된 가룡목, 선재의 고착에 쇠붙이를 쓰지 않고 장삭, 피삭을 사용한 점 등과

달리도 선재의 수종 등 여러 특성을 종합해 보면,

달리도선은 13~14세기경에 활동한 우리 고유의 전통 한선(韓船)이라 결론지을 수 있다.

 

- 국립해양유물전시관 펴냄, 1999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