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서민을 울렸던 주택난과 토막집
최병택(근대사분과)
1920년대 이후 식민지 조선의 도시들은 주택난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 시기 집 한 채 장만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고율 소작료를 견디다 못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항간에는 시골 지주들이 도시 생활을 동경하여 다수 이주하고 있다는 풍문도 나돌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운동가들을 피하여 돈많은 재산가들이 제법 ‘치안’이 잘 잡힌 도시로 들어온 것이라고도 했다. 이유가 어떻든 이 시기 도시로 유입하는 인구가 제법 많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실제로 1921년에 경성부가 행한 가옥조사의 결과, 경성에 있는 가옥은 3만9천호이고 한 호에 월세, 전세의 형태로 거주하는 가구를 모두 합해 5만4천호가 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가구 수에 비할 때 1만5천호 정도의 집이 부족했던 것이다. 당시 경성 시내 초가 한 칸의 월세는 예전의 1~2원에서 대략 5원 정도로 올랐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많았던 이 당시에 5원이라는 돈은 그리 만만한 액수가 아니었다. 이러한 폭등세를 이용해 ‘있는 사람들’은 남의 집을 전월세로 빌린 뒤 다시 사글세로 놓는 경우도 많았다. 그 당시에는 전세나 월세보다 사글세(거주할 기간을 미리 정한 뒤 그 기간만큼의 월세를 미리 내는 것)가 훨씬 비쌌다. 이 때문에 돈 있는 사람들도 월세 쟁탈전에 뛰어들어 집을 확보한 후 이것을 다시 사글세로 놓았다고 한다. 아마 월세집이 그렇게 귀했던 것은 너 나 없이 월세집을 구해서 돈 좀 벌어보겠다는 부유층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소작료가 너무 높아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오랫동안 터를 잡아 온 고향과 땅을 버리고 무작정 상경한 농민들은 경성 시내 변두리나 청계천 일대에 움막 같은 허름한 집을 짓고 사는 토막민이 되어 그 처절한 삶을 이어나가야 했다. 이들은 인력거꾼, 지게꾼 등으로 행세하며 고단한 일상을 버텨나갔다. ‘토막(土幕)이란 집 없는 빈민들이 공터에 만들어 사는 움막이나 움집을 이르는 말이다. 일제시기 경성 주변에는 이러한 토막이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토막촌으로 유명했던 곳은 동부의 숭인동, 창신동, 신당리 일대와 마포의 도화동과 지금의 용산 청파동인 청엽정 일대였다.
그 중에서도 신당리의 토막촌은 오랫동안 언론에 오르내리며 세간의 화제를 뿌린 바 있다.
일본인 이와후치도 그러한 업자 중 하나였다. 그는 신당리 일대의 땅을 사들여 문화주택을 지어 분양하고자 했는데, 문제는 이 땅에 오래 전부터 5천 명에 이르는 토막민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후치는 이 땅을 매입한 후 토막민을 불러 "이 곳에 문화주택을 세우고자 하니 토지를 내어달라“고 통보했다. 와후치의 이 요구는 토막민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이사할 곳도 마땅치 않고 토막이나마 새로 집을 지을 만한 돈도 없었던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며 동정을 구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매정하게도 공사를 맡은 청부업자들은 지금 표현으로 치자면 ‘용역’들을 동원해 거침없이 사람이 잠들어 있는 토막들을 하나 둘씩 허물어 버렸다.
《동아일보》 1933년 8월 31일의 기사는 당시의 참경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묻어버린 집 속에는 그대로 가구가 산산히 부서지고 가족들은 언덕으로 올라서서 인부들을 향하야 고함을 치고 울고 있다. 五十여 명 가족 중 十세 미만의 어린애들이 十九명이나 되는데 철모르는 어린애들은 문어진 정든 집을 내려다보면서 어른들을 따라 울어 곡성이 높아졌다. 그 중 최월식(63세)이란 노인은 분함을 견디지못하야 일시 혼도하기까지 하야 말도 통치 못하엿다. ······ 양편에는 살기가 등등하야 잇엇으며 집을 잃고 가구를 잃은 부인들이 땅을 치고 울며 하소연하는 참상은 측은하기 짝이 없어 보엿으며 문어진 집과 깨어진 그릇이 널려잇는 현장은 참담하기 짝이 없이 보혓다. 《동아일보》, 1933년 8월 31일
억울함을 이기지 못한 주민대표는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들어 있고 가구가 그대로 있는 집을 마구 헐어버렸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어린애들하고 오늘 잘 곳이 문제입니다. 못 벌어먹을지언정 이 집은 헐지 못하겠다고 하니까 인부들이 마구 욕을 하고 헐어버렸습니다. 인정도 없고 눈물도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라고 호소했다. 1931년 5월 경성부는 신당리 251번지 일대 땅을 주택건축업자들에게 매각하기로 했는데 마침 이 곳에 토막민들이 다수 살고 있었다. 토막민촌을 철거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업자들은 선뜻 계약을 하고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경성부는 사전 경고 없이 경찰을 동원해 스물일곱 호에 이르는 토막을 강제로 철거했다. ‘용역’인부들을 동원한 경찰이 허름한 집 안에 누워 있던 병자와 노인네 및 아이들을 사정없이 끌어낸 후 순식간에 집을 부순 것이다. 이 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일거리를 찾아 하루 종일 경성시내를 헤매다가 해질녘에 집에 돌아와 그 참상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졸지에 집을 잃은 토막민들은 신당리 공동묘지 터에서 하루를 노숙한 후에 이튿날 모두 경성부청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이들의 항의는 허공에 소리를 지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빈민대중의 목소리는 식민 당국자들에게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마치 지금의 재개발지역 철거현장을 방불케 하는 당시 토막민 철거사건은 신당리의 경우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일이었다. 소외된 자들에게 냉혹했던 식민지 시기 일제 당국자들의 오만한 태도를 돌아볼 때 지금 우리 사회는 그 때보다 얼마나 더 나아졌는지 의문이다.
- 2010-01-17 한국역사연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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