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이 포도청’ : 조선 경찰 이야기
지금부터 정확히 이십 년 전인 1990년에 당시 대통령 노태우는 10․13 특별선언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소위 ‘범죄와의 전쟁’이다. 이 선언의 주요 골자는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무질서를 추방하고 이른바 건전한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범죄와 폭력을 근절시키겠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치안을 담당했던 포도청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당시 정권에서 유난을 떨었던 범죄와의 전쟁은 엄청난 성과를 가져왔을까? 실제로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후 강력 범죄가 감소되었을 뿐 아니라, 폭력조직이 사실상 와해되었다는 것이 검찰이나 경찰의 설명이다. 그렇지만 부정적 견해도 적지 않다. 조직폭력배라는 말이 여전히 낯설지 않다는 점에서 폭력 조직의 소탕을 운운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있을 뿐 아니라, 이 선언이 당시 분출되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한 것이라는 혐의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정책의 성패는 좀 더 따져볼 일이지만, 아무튼 분명한 것은 당시 범죄와의 전쟁은 혈기 왕성한, 다른 말로 하면 폭음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는 참 불편한 조치였음은 분명하다. 조선시대에 한성부는 행정기관인 동시에, 핵심 사법기관인 삼법사(三法司)의 하나였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속) : 생활과 풍속』(서문당, 1996), 134쪽 수록.
그런데 포도청은 단순히 도둑을 잡는 기관일 뿐만은 아니었다. 더 나아가 서울 도시민의 삶을 통제하는 역할도 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국왕의 사적인 물리적 수단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왕권의 정통성이 취약했던 광해군은 포도청을 적극 활용하여 각종 역모, 조직사건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단성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관으로 1907년에 개관하였다. 조선시대 좌포도청 청사는 이 단성사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후기 포도청의 단속 대상 중에는 ‘검계(劍契)’ 조직도 있었다. 검계는 지금의 조직폭력 조직과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 영조 때의 『승정원일기』를 보면 검계라는 이름은 칼로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고, 주로 양반가의 사나운 종이나 머슴들이 가입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의 학자 이규상(李奎象)의『일몽선생문집(一夢先生文集)』에는 영조 때 포도대장을 역임한 장붕익(張鵬翼)이란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장대장전(張大將傳)」이 실려 있다. 글 속에서 장붕익은 ‘검계(劍契)’ 조직원을 일망타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실제로 장붕익은 실존 인물이었다. 「장대장전」에서 검계 조직원들은 몸에 모두 칼자국이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요즘 폭력배들이 몸에 문신을 새겨넣은 것과도 닮은꼴이라 흥미롭다. 한말에 찍은 사진으로 좌측이 포도대장(捕盜大將)의 모습이고, 우측이 신식 순검(巡檢)이다.
아무튼 검계를 예로 들었지만, 서울 도심을 배경으로 활동하는 각종 무뢰배, 치한, 강절도 등을 매일 상대하고 조사하는 일이 당시에도 지금과 별반 다름없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포도청에는 확실한 자백을 받기위해 가혹한 고문과 형장이 으레 등장하기 십상이었다. 그럼 실제 포도청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프랑스 선교사 리델(Ridel, 한국이름 李福明)의 글에서 이곳 광경을 유추할 수 있다. 1878년 1월 체포되어 6월 10일에 석방되기 까지 4개월 여에 걸쳐 포도청에 수감되었다. 처음 그는 우포도청에서 문초를 받고 이후 좌포도청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가 이곳 감옥에서의 생활을 적은 기록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1878년 조선의 포도청 감옥 생활을 체험한 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모습.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살림, 2008) 8쪽 수록. 1과 10은 포졸 숙소, 2는 리델 자신이 수감된 감방, 3은 채무죄수가 수감된 감방, 4는 도둑의 감방, 5는 교수형이 집행되고 시체를 두는 곳, 6은 물건 두는 방, 7이 변소, 8은 부엌, 9는 웅덩이, 11은 법정, 12가 감옥 출입문이라고 적고 있다.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살림, 2008), 114쪽 수록. 먼저 포도청 감옥 배치에 대해서이다. 조선시대 감옥이 죄수들을 위한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추었으리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렵지만, 리델의 묘사에 따르면 상황은 더 열악하였다. 그가 손수 그린 좌포도청 감옥 도면에 따르면 감옥의 가운데에는 썩은 물이 고여있는 웅덩이가 있고, 그 주변으로 죄의 유형에 따라 죄수들을 분산하여 수감하던 세 개의 감방이 있었다고 한다. 감방 옆에는 교수형 집행시 쓰던 형구를 보관하거나 시신을 임시로 보관하는 방, 그리고 재래식 화장실 하나도 있었다고 한다. 좌포도청의 평면도와 입면도. 입면도에는 교수형을 집행하는 곳이 보이며, 전체적으로 리델이 그린 도면과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한다. 『한국교정사』(법무부, 1987), 155쪽 수록 리델은 자신과 함께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포도청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은 크게 도둑, 채무 죄수, 천주교 신자 세 부류로 나뉘었다. 이들의 처지는 같은 죄수라 하기엔 상당히 큰 차이가 존재하였다. 그중 가장 비참한 대접을 받은 자들이 도둑들이었다. 이들은 밤낮이고 발에 차꼬를 차고 있어야 했으며, 밤에도 잠을 잘 수 없었다. 행여 이들이 졸기라도 하면 포졸들이 가차없이 몽둥이로 등과 다리, 머리 할 것 없이 후려쳐서 깨웠다고 한다. 리델은 열악한 처지의 도둑들이 대략 30여 명 있었는데, 하나같이 병에 걸려 가련한 몰골이었다고 전한다. 이들 중에는 공무상 뇌물이나 횡령 등으로 잡혀온 관원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연락할 수도 있었고, 감옥 내에서 지급하는 식사 대신 비교적 먹을 만한 사식(私食)을 받아먹었다고 한다. 심지어 굶주린 도둑들이 보는 앞에서 사식으로 잔치를 벌이기도 했을 정도이며 채무를 갚는 즉시 감옥을 빠져나올 수도 있었는데, 리델과 같은 천주교 신자는 앞서 소개한 도둑과 채무 죄수의 중간 정도의 대우를 받았다고 적고 있다. 이는 리델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포도청 관속들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에 따르면 좌포도청, 우포도청 각각 약 50여명의 포교들이 있었고, 그들 밑에 포졸 등 하급직원과 망나니 등이 있었다고 한다. 포졸들은 대개 8-10명 내지 20명씩 교대 근무를 하였는데, 아침 6-7시경에 와서 한밤중에 돌아갈 때까지 웃고 떠들고 말싸움하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심한 경우 웃으면서 형벌을 집행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들에 의해 죄수가 몽둥이로 맞아 죽어나가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수형도 포도청 안에서 간단하게 끝냈다고 한다. 리델은 밥 먹는 시간에 감방에서 붙들여나온 도둑 한 명이 옥졸 네 명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지는 비참한 광경도 목격하였다. 한말의 화가 김윤보가 그린 「형정도첩」의 한 장면. “나와! 목매러 가자.” 옥졸들이 저녁 식사 시간에 도둑 감방에 들이닥쳐 해당 죄수를 교수형을 집행하는 방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후 교수형이 집행되는데, 옥졸이 죄수의 목을 줄로 맨 다음 밖으로 나와 방문을 닫는다. 그리고 옥졸 네 명이 달려들어 마치 닻을 끌어올리듯 죄수의 목을 맨 올가미 줄을 잡아당긴 다음, 팽팽해진 줄을 묵직한 나무토막에 묶어 놓으면 형 집행이 완료된다. 리델은 교수형을 집행하는 옥졸들이 이 전 과정을 아무 표정없이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모습에 치를 떨었다. 고종 때인 1865년 만들어진 법전 『육전조례(六典條例)』에 나오는 포도청에 관한 규정. 이전 시기와 인원수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포도청 포교와 포졸의 활동과 관련한 생생한 이야기는『한국의 풍토와 인물』(을유문화사, 1973)이란 책자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한학자이자 민속 연구자인 김화진(金和鎭)이 썼는데, 김화진 집안은 구한말 왕가의 친척이고 아버지가 고관을 지냈기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궁중 나인 등을 통해 대궐 안이나 조선의 제도, 풍속과 관련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림의 가운데에는 두 명의 포졸이 등장한다. 포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변장을 하며 한성부 시내를 순찰하였다. 포교와 포졸들 사이에는 고유한 암호가 있어 매일매일 바꿔가며 사용하였으며, 그들만의 은어(隱語)를 썼다. 이는 지금의 경찰, 형사들도 예컨대 흉기를 ‘연장’이라 하듯이 자신들끼리의 은어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밥을 내라’(고문을 하라), ‘모양을 내라’(잔뜩 묶어라), ‘대장으로 모시어라’(칼을 채워두어라), ‘새벽녘이다’(단서를 얻었다), ‘미꾸리다’(새어 나갔다) 등이 있다. 범인과 관련한 은어로는 힘이 없는 놈을 뜻하는 ‘파리’, 억세고 무리를 이룬 자들인 경우에는 ‘참새’라고 했다. 포교와 포졸들이 밤마다 잠복했다가 범인을 발견하고 체포할 때에 이들 은어가 빛을 발하는데, 포교가 ‘파리!’ 혹은 ‘참새!’ 라고 외치는 것에 따라 출동하는 포졸들의 규모가 결정되었다. 지금 경찰을 ‘짭새’라고 부르는 것에 비하면 훨씬 점잖고 나은 것 같다.
이상 김화진의 기억이 얼마나 정확한지 장담할 수 없지만, 당시 포교, 포졸들이 암호나 은어를 사용했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한편, 포도청 관속들 중에는 편법이나 비리를 범하는 자들도 있었는데 샤를르 달레가 지은 『한국천주교회사』에 이에 관한 기록이 있다. 달레에 따르면 한성부 등 큰 도시에는 포도청의 포졸이 매수해둔 도둑이 있어서, 포졸들은 보수를 지급하여 이들 도둑을 꾸준히 관리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도둑에 대한 백성의 원성이 높아지고 수령이 범죄 단속에 대한 성과를 독촉할 때 포졸들은 미리 매수해둔 도적에게 가벼운 범죄 행위를 엮어서 체포하였다. 한마디로 편법으로 자신의 범인 체포 실적을 부풀리는 행위인 셈이다. 지금도 조직폭력배나 유흥업주들과 경찰과의 유착 내지 부적절한 관계가 종종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것을 고려할 때 이러한 유형의 부정부패는 예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인 것 같아 씁쓸하다. 몇 해전 MBC 사극 ‘다모’가 유행하여 조선시대 다모의 활약상이 기록으로 많이 전해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불행하게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포도청의 여형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다모! 다모는 신분이 천민(賤民)으로서, 포도청 뿐 아니라 여러 관청에 배속되어 식모와 같은 천한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법전 등 공식기록에서 포도청에 다모가 얼마나 있었고, 그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분명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을 추적해보면 다모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알 수 있다. 먼저 세조 9년에 혜민국(惠民局) 소속 의녀(醫女) 가운데 성적이 좋지 않은 자는 다모(茶母)의 일을 시켰다가 다시 성적이 올라야만 의녀로 복귀시켰다는 기사가 있다. 다음, 중앙의 여러 관청뿐 아니라 정조 때 만든 군영인 장용영(壯勇營)에도 다모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지방 군현에도 다모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숙종 27년 10월 20일자 기사에는 포도청에 ‘다모간(茶母間)’이라 하여 다모들이 거처하는 처소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19세기 초에 관리를 지낸 송지양(宋持養, 1782-?)이 쓴 소설 <다모전(茶母傳)>에 한성부 소속 다모 김조이(金召史)의 금주령(禁酒令) 위반 범인 체포에 관한 활약상도 당시 다모의 활동과 전혀 동떨어진 내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 2010-07-12, 한국역사연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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