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에 보이는 물고기의 표정
회색의 태토에 옅은 푸른색 유약을 바르고 겉면을 하얗게 꾸민 도자기가 있다.
이 도자기는 청자, 백자와는 다른 것으로,
제작되었을 당시에도 그리고 그 이후 한동안 특별한 이름 없이,
‘자기(磁器 · 瓷器)’ 혹은 ‘사기(沙器 · 砂器)’등의 보통명사로 불렸다.
일본인들은 이 도자기를 부를 때, ‘미시마테(三島手)’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 연유에는 몇 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다.
첫째, 이 도자기를 장식하고 있는 인화(印花)문양 등이
일본 시즈오카현의 미시마신사(三島神社)의 달력 그림과 비슷하여 三島手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
둘째,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의 거문도를 三島라 하였는데,
일본선박이 이곳에 정박했을 때 매매되던 도자기에 섬의 이름이 차용되었다는 것.
셋째, 이것을 처음 사용한 사람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을 것 등이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미시마테(三島手)는 이 도자기의 본질과는 관계없는 명칭이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사학자 故 고유섭(高裕燮, 1905~1944) 선생은
분장한 회청색 사기 같다 하여 ‘분장회청사기(粉裝灰靑沙器)’ 즉, ‘분청사기(粉靑沙器)’라는
애정어린 이름을 지어주었다. 시인 김춘수가 「꽃」이라는 시에서 말한 것과 같이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꽃이 된’ 것이다.
분청사기는 14세기 말쯤 시작되어, 16세기 중엽에는 제작을 중단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200년이 채 못 되는 기간은 도자기의 나이로 치자면 단명(短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청사기가 청자, 백자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도자기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
까닭은 다른 도자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면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분청사기는 만든 곳에 따라 기법과 문양의 형태가 각양각색이라는 점으로,
이는 분청사기에 장식된 물고기 문양을 통해서 쉽게 엿볼 수 있다.
충청남도 의당면 중흥리 가마에서 제작된 분청사기는
상감기법과 인화기법을 각각 사용하여 물고기 문양을 장식하였다.[사진 1]
상감(象嵌)기법은 음각으로 문양을 새긴 후, 그 안에 백토(白土) 혹은 흑토(黑土)를 넣은 것이다.
인화기법은 도장을 이용한 것으로, 동일한 문양을 여러 개 표현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용례가 대체로 작은 꽃이나 점에 집중되어 있어, ‘인화(印花)’라고 부른다.
중흥리 분청사기의 물고기 문양은 아담한 크기에 비늘, 아가미, 지느러미 등 세부사항이 흐트러짐 없이
침착하게 묘사되었으나, 전반적으로 딱딱하고 형식적이다.
이러한 물고기 문양은 두 마리가 배를 맞대어 한 쌍으로 표현된 예가 많다.[사진 2]
전라남도 부안군 우동리 가마의 분청사기는
하나의 문양에 상감기법과 인화기법을 절충하여 보다 세련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물고기의 머리는 상감기법의 흑선과 백선을 번갈아 다소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으며,
몸통에는 인화(印花)기법으로 흰 점을 촘촘하고 질서 있게 메웠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건장한 체구의 물고기는 방금 그물에 걸려 올라온 것처럼 싱싱하고 풍요롭다.[사진 3]
우동리 분청사기의 물고기 문양에서 활기찬 기운을 느낄 수 있다면,
다음에 볼 물고기는 초연한 분위기마저 감돈다.
동그랗고 작은 눈에 숨을 쉬고 있는 듯이 약간 벌린 입, 세모꼴 지느러미, 격자무늬로 처리한 비늘의
물고기는 거칠 것 없이 넓은 기면(器面)을 평온하면서도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듯하다.[사진 4]
이러한 물고기 문양은 전라남도 고흥군 운대리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수습된 도편과 유사하여
이곳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사진 5]
운대리 가마에서는 상감기법과 함께 박지기법도 사용하였다.
박지(剝地)기법은 그릇의 표면을 하얗게 분장한 후 문양의 바깥부분만을 긁어내어,
문양은 흰색을 띠고 바탕은 어두운 색을 띠는 것으로,
고려시대의 역(逆)상감기법을 분청사기 방식으로 응용한 것이다.
물고기를 의인화하여 바라본다면,
전라남도 고창군 용산리 가마의 분청사기 물고기는 마치 해맑게 웃고 있는 것 같다.[사진 6][사진 7]
용산리 가마에서는 대체로 분청사기를 장식하기 위해 조화기법을 사용하였다.
조화(彫花)기법은 그릇의 표면을 하얗게 분장한 후, 끝이 날카로운 도구로 문양의 외곽선을 표현한 것인데,
전라도에서 특히 성행하고 발전하였다.
묘사에 있어서 정교하고 세밀함은 떨어지나, 가는 선으로 인하여 전반적으로 경쾌하며 생동감이 넘친다.
충청남도 공주 계룡산에 위치한 학봉리 가마에서는
붓 힘이 좋은 도공의 필력이 물고기 문양에까지 미쳤다.[사진 8][사진 9]
학봉리 가마에서는 철화기법을 사용하여 문양을 장식하였는데,
기법의 표현력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어 주목된다.
철화(鐵花)기법은
그릇의 겉면을 하얗게 분장 한 후, 철(Fe) 성분이 다량 포함된 안료를 붓에 묻혀 그린 것이다.
붓이라는 도구로 인하여 묘사는 한층 자연스러우며 속도감을 주고 있다.
머리에는 주름이 있고, 끝이 뾰족한 지느러미는 넓게 펼쳐져 있으며,
몸통의 비늘은 대체로 점이나 당초문양 등으로 처리되었다.
공격적인 표정과 화려하고 과장된 몸짓은 오히려 해학적이고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인 물고기가 기물(器物) 위에서 이처럼 다양한 표정을 지닐 수 있게 된 데에는
분청사기의 제작 배경 및 성격과 관련한다.
분청사기는 고려시대 말 강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청자의 제작이
점차 전국으로 흩어지는 과정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세워짐에 따라 점차 고려청자와는 구별되는 도자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전국에 분포한 가마에서 제작된 분청사기는
생산량의 일정부분을 왕실에 진상(進上)하거나 정부에 공납(貢納)하였으나,
비교적 자유로운 생산 체제를 지니면서 다양한 수요층을 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분청사기의 물고기문양이 상징하는 것은
생물학적 특성에서 비롯된 다산(多産)과 풍요(豊饒)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이나,
민화의 <잉어도>와 같이 신분상승의 염원일 수도,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수행자로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제작에 있어서 어느 정도 자율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된 도공은
인근의 강가나 하천에 서식하는 물고기를 직접 보고 그릇에 담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비록 분청사기에 나타나는 다양한 물고기가 그 지역의 토산물을 표현한 것인지,
혹은 비슷한 외형의 물고기를 묘사한 것인지는 명확히 밝혀낼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의도는 우리에게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려청자에서는 강진의 바다 빛을 볼 수 있고,
조선백자에서는 꼿꼿하면서 여유로운 선비의 아우라(Aura)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분청사기에서는 고향의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그것은 어느 누구의 혹은 어느 특정한 곳이 아닌, 모두의 고향 山川에 펼쳐진 친근한 것이겠다.
- 문화재청 인천항 국제여객터미널 문화재감정관실 안세진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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