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대탑(金銅大塔)
삼성미술관 리움에는 높이 155cm, 기단 63cm 크기의 금동대탑(金銅大塔)이 소장되어 있다.
1984년에 국보 제213호로 지정된 이 탑은 현존하는 가장 큰 금속탑으로
충남 논산 개태사 북쪽 500m 되는 곳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고려 10~1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대탑은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청동으로 각 부분을 따로 주조한 후 조립해서 실내에 봉안했던 오층탑이어서
우리나라 고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그림 1>
조성 배경을 보면,
통일신라시대 8~9세기에는『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에 의한 석제, 토제로 조성한
작은 탑들을 탑 속에 봉안하는 법식이 성행했는데,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 다음과 같이 조탑(造塔) 공덕에 대해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개장보살이여, 이것이 근본 다라니 주문이니라. ... 단을 만들어 위를 깨끗이 하고
이 다라니 칠십칠 벌을 쓰되, ... 쓴 주문은 탑 속에 넣고 그 탑에 공양하며,
혹은 진흙으로 작은 탑 칠십칠을 만들고 주문 한 벌씩을 탑 속에 넣어 공양할 것이니라.
이렇게 법대로 행하면 명이 짧아 죽을 이는 목숨을 증장하고,
모든 업장과 나쁜 갈래에 떨어질 업이 모두 소멸되어 지옥 아귀 축생을 아주 여의고,
태어나는 곳마다 숙명통을 얻고 모든 소원이 만족할 것이며
칠십칠억 여래에게 착한 뿌리를 심은 것과 같을 것이니, 여러 가지 질병과 모든 번뇌가 아주 소멸되리라.”
주 1)
즉 탑을 조성하면 수명장수(壽命長壽) 할 뿐 아니라 모든 질병과 번뇌가 소멸된다고 한다.
이 같은 전통은 고려시대에도 꾸준히 이어지면서 새로이 금동 또는 청동으로 제작한 금속제 소탑(小塔)을
탑 속에 사리장엄구로 봉안하거나 내불당에 의식용으로 안치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금동제 또는 청동제 탑은 대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인데,
일부는 풍탁과 상륜부까지 정교하게 표현하였다.
새로운 조탑 방식이 유행한 신앙적 배경으로는『무구정광대다라니경』외에도
『법화경』과 오대(五代)에 유행한『보협인다라니경(寶?印大陀羅尼經)』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특히『보협인다라니경』이 유행한 이후 북송대에는 금속제 탑을 탑 속에 봉안하는 법식이 성행하였는데,
이런 경향은 고려에도 유입되어 한층 더 금속탑의 유행을 가져 온 것으로 추정된다. 주 2)
<그림 2. 3>
『보협인다라니경』에서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써서 탑 속에 모시면 이 탑은 모든 여래의 금강장 솔도파가 되며...
나아가 아비지옥에 떨어졌다하더라도 만일 이 탑에 한번 절하고 한번 빙 돌면 반드시 해탈한다.
...이 법요와 다라니를 탑상 속에 안치하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은 그 방처를 항상 따라 다니면서
모든 때에 신통력과 서원력으로 가지하고 호념 할 것이다” 주 3)
라고 설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무구정경대다라니경』과 거의 같다.
고려시대 금동탑과 청동탑의 제작 방식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금동대탑이나 대구박물관 소장 청동다층탑처럼 탑 부재가 각각 별도로 주조되어 조립된
별주식(別鑄式)이고, <그림 4>
또 하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동탑 같이 전체 형태가 한 번에 주조된 통주식(通鑄式)이다.
규모가 커서 한 번에 주조되기 힘든 탑들은 별주식으로 제작되었으며,
20~30cm 정도 크기의 작은 청동탑은 통주식으로 네 모서리인 우주(隅柱)가 굵게 제작되었기 때문에
마치 투각기둥을 세운 것처럼 보인다. 또한 한번에 주조해야하므로 세부 표현이 정교하지 못한 점이 있다.
금동대탑은 5층까지만 남은 현재의 높이만도 155㎝로 가장 큰 금속탑이지만
기단에 비해 각 층의 체감율을 감안하면 원래는 7층 정도였을 것으로 지금보다도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정면의 계단을 오르면 문을 열고 전각 안으로 들어가는 목조건물 형태로 금도금은 거의 벗겨졌으나
각 부분은 장식성이 농후해 공예탑이라 볼 수 있다.
구성방식은 통일신라~고려시대 석탑의 기단형식인 2층 기단 위에
탑신과 옥개, 상륜부를 따로 제작해 올린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63cm 크기의 정사각형 기단부에는 아래층에 양 우주와 2개의 탱주(撑柱)를 조각하였으며,
투각 안상(眼象) 안에는 귀꽃이 서 있다.
위층 기단에는 우주와 탱주 사이의 면에 사격자문(斜格子文), 사행선문(斜行線文), 연주문 등을
가득 조각하였는데, 아래의 귀꽃과 함께 전형적인 금속제 공예탑의 장식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런 표현은 중국 절강성 혜광탑에서 나온 북송 은제도금칠층탑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초층 탑신에는 주심포와 무쇠장식이 붙은 목제문, 창살을 그대로 표현하였으며, 앞 뒤쪽에 계단을 두었다. <그림 5>
2~5층의 탑신에는 각 면마다 평주(平柱) 사이에 여래좌상을 배치했는데,
2층에는 4구씩, 3층과 4층에는 3구씩, 5층에는 2구씩이다. <그림 6>
특히 평주의 주두(柱頭)에 두공(頭工)을 표현해 마치 높은 전각에 존상들을 봉안한 것처럼 보인다.
옥개는 모서리 끝이 위로 날렵하게 들린 형태로 낙수면에는 기왓골을 깊게 조각했고,
합각(合角)의 추녀마루에는 보주와 용두(龍頭) 등을 조각해서 올려놓았다.
끝에는 풍탁을 달았으나 현재는 몇 개만 남아있다.
그 위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 앙화, 화염보주가 있는데 각 종 문양이 시문되어 있다.
이 금동대탑은 현존하는 금속탑으로는 가장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각 부분의 공예적 장식성, 신라~고려시대의 석탑양식을 보이는 이중기단, 각 층에 불상을 배치한 모습
등에서 목조건물 및 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물이다.
또한『무구정경대다라니경』및『보협인다라니경』등의 조탑 관련 경전에 의해
금속탑을 탑 속이나 내불당에 봉안하는 당시의 신행(信行) 및 의식(儀式)을 시사해주므로
공예사적, 불교사상사적으로 의의가 크다.
당시 이 탑 앞을 조성하기로 서원한 불교도와 장인들의 불심,
그리고 탑을 바라보며 무병장수와 모든 번뇌가 소멸되기를 기원했을 고려인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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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無垢淨光大陀羅尼經』,『大正藏』卷19, No.1024, p.718,
“除蓋障此是根本陀羅尼?. ...應當作壇於上護淨. 書寫此?滿七十七本. ...當持?本置於塔中供養此塔. 或作小泥塔滿足七十七. 各以一本置於塔中而興供養如法作已. 命欲盡者而更延壽. 一切宿障諸惡趣業悉皆滅盡. 永離地獄餓鬼畜生. 所生之處常憶宿命. 一切所願皆得滿足. 則爲已得七十七億諸如來所而種善根. 一切衆病及諸煩惱咸得消除.”
2) 김윤정,『高麗時代 金屬塔 硏究』, 홍익대학교석사학위청구논문, 2007. 참조
3) 不空 譯,『一切如來心?密全身舍利寶?印陀羅尼經』,『大正藏』卷19, №.1023, pp.715~717,
“若人書寫此經置塔中者. 是塔卽爲一切如來金剛藏?堵波. ...乃至應墮阿鼻地獄 若於此塔一禮拜一圍?必得解脫. ...安此法要. 安置此陀羅尼於塔像中者. 我等十方諸佛. 隨其方處恒常隨逐. 於一切時. 以神通力及誓願力加持護念.”
-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안귀숙 감정위원
- 2010-04-12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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