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 가득 싣고 바다로... 강진 옹기운반선 이야기
정겨운 고향집 풍경을 떠올리면 어느 집에서나 빠트릴 수 없는 풍경이 장독대일 것이다.
장독대를 가득채운 항아리들이 햇살에 반짝반짝 거리는 모습이나
한겨울 소복이 눈이 덮인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그림1) 윤증고택의 장독대
지금은 된장, 고추장을 슈퍼에서 사다먹고, 집집마다 김치냉장고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한옥에서 양옥으로 아파트로 사는 모습은 달라졌어도 집집마다 항아리가 없는 집이 없었었다.
필자의 어린 시절 기억에는 이따금 항아리를 잔뜩 실은 트럭이 동네에 오곤 했었다.
길가에 여러 크기의 항아리들을 펼쳐놓아 두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와 톡톡 두드려보기도 하고
요리조리 살피면서 집에 필요한 크기의 항아리들을 사가던 모습이 기억난다.
필자가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플라스틱, 스테인레스 그릇이 유행하기 전 시절에는
밥상위에 오르는 그릇도 옹기로 된 그릇을 사용하였었다.
우리에게 그처럼 친숙한 옹기는 우리민족만의 전통적인 음식 저장 용기인데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져 왔다.
청자 백자처럼 수려한 아름다움은 가지지 못했지만 투박하고 따스한 멋이 있는 옹기는
오랜시간 우리네 부엌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물건이었다.
그림 2) 평양옹기와 배 [출처 : 조선풍속- 일제강점기그림엽서]
그렇게 전국에서 소비되는 옹기는 여러 지역에서 옹기마을이 형성되어 생산되어졌는데,
강진 칠량면의 봉황마을 역시 그 중 한 곳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의 옹기는 봉황옹기로 불리지 않고 칠량옹기로 불리어 왔다.
이는 1914년에 조선 총독부가 행정구역 이름으로 봉황이라는 새 이름을 만들기 전에는
그곳이 '칠량 독점'이라고 불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래 이 마을은 보련, 독점, 덕동, 사부의 네 동네를 합해 마을 이름을 정하였는데
옛 동네 이름과는 별 상관이 없는 봉황으로 정해졌다.
네 동네를 합할 때에 중심을 이룬 동네는 독점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옹기를 만드는 동네는 비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여기던 풍습이 있었던 터라
새 이름을 독점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하지만 옛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 봉황마을은 오래전부터 옹기를 만들어 왔던 곳이었다.
칠량옹기는 만드는 기술도 좋지만 모래가 적당히 들어있는 흙 때문인지
옹기가 물을 빨아들이지 않고 오래두어도 이끼가 끼지 않아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림 3) 강진군 칠량면 봉황마을 위치[출처 : 네이버지도]
칠량면 봉황마을은 강진만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쪽 큰바다로 나가는 물목에 가우도라는 큰 섬이 있어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어 배를 대기에 좋은 지형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마을에서 만들어진 옹기는 배에 싣고나가 전국을 다니며 판매를 하였는데,
옹기배는 한번 출항을 하면 싣고 간 옹기는 다 팔고 돌아오는 게 원칙이어서
집을 나서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다고 한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남해안으로 몰리면서 새로 살림을 장만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칠량옹기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옹기장사는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몇 곱절은 남아 돌아오는 장사였기 때문에
그 당시 마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옹기를 만들거나 판매하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배는 옹기를 최대한 많이 실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했으며
사공과 선원들이 집을 떠나 긴 시간 생활할 수 있는 주거의 기능을 겸해야 했다.
또 옹기를 싣고 장사를 하러가는 배이니까 운항 중 옹기가 상하지 않으면서도 바람에 상관없이
원하는 방향으로 빨리 갈 수 있을수록 좋은 배였을 것이다.
그런 목적으로 강진 옹기운반선의 특징들이 생겨나게 된다.
먼저 근대선박 구조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해보면,
배는 배밑, 부자리삼, 삼, 멍에, 돛대로 기본 형태를 갖추고 있다.
‘배밑(저판)’은 배의 제일 하부에 설치되는 부재로 건물로 보면 기단 초석 같은 역할을 하는 부재이다. ‘삼’은 배의 외판을 칭하는 말인데 건물의 벽체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부부분의 삼은 따로 ‘부자리삼’으로 부르는데
‘부자리삼’은 수평인 ‘배밑’과 수직으로 서있는 ‘삼’을 자연스레 이어주는 부재이다.
강진 옹기운반선의 경우 부자리삼이 넓게 펼쳐져 있어 배의 내부 적재공간이 넓어
많은 양의 옹기를 실을 수 있으며, 또한 배의 길이에 비해 높이가 낮은 구조이다.
배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 설치하는 늑골은 조선후기의 배보다 2배정도 많이 설치되며,
돛대는 3개를 두었다.
배의 내부공간은 크게 밥을 해먹는 취사공간, 옹기를 싣는 공간, 그리고 잠을 자는 공간으로 나누는데,
옹기운반의 목적에 맞게 취사공간과 잠을 자는 공간은 최소한의 공간을 두고
나머지 공간은 모두 옹기 싣는 공간에 할애되었다.
배의 지붕이라 볼 수 있는 갑판부에서도 옹기운반선만의 특징을 갖게 되는데
취사공간과 잠을 자는 공간은 고정된 갑판을 사용하였고,
옹기 싣는 공간은 가동(可動)할 수 있게 양 측면으로 경사진 판자를 갑판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배 안에 물이 고이는 것을 방지하고 상부와 하부를 나누어 옹기를 적재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저판의 선수쪽은 깊게, 중앙부는 높게 제작하여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물을 퍼내기 용이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배의 전체적인 선형은 매우 넓으나
선수(배 앞부분)는 뾰족한 형태로 물을 가르고 나갈 수 있게 하여
물의 저항을 덜 받게 되고 치의 방향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림 4) 강진 옹기운반선 1/10 모형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소장]
지금까지 강진옹기운반선은 한두장의 사진과 함께 그 시절 사람들의 추억으로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옹기배 제작 유경험자인 고태랑(70세)옹과 옹기배 항해 유경험자인 신연호(80세)옹의 고증을 통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설계 · 복원되어 바다로 나가게 될 예정이다.
복원될 배의 규모는 길이 20m, 너비 5.9m, 깊이 1.9m 이며,
지금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앞마당에서 배는 예전 모습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복원된 옹기배는 9월 초순에 강진 봉황리 포구에서 옹기를 싣고 실제 무동력 옛 방법으로
여수까지 항해재현을 할 예정이다.
이번 작업을 통해 우리는 이미 사라져버린 근대선박에 대한 복원과 기록,
그리고 그 시절 항로와 운항방법, 옹기를 적재하는 방법 등 여러 연구를 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전세대의 문화야 말로 우리가 더 예전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자료가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잊혀져 가고, 없어져 버린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직 그 시절을 살았고 기억하는 분들이 살아계시므로
우리가 그 시대를 기록해두기에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번 강진 옹기운반선 복원을 통해 우리네 역사의 잃어버린 퍼즐하나를 맞출 수 있길 기대해본다.
- 최유리,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연구과 전문위원
- 2010-05-17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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