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의 무한변주
인간의 삶에서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는 원천적인 에너지를 제공하는 절대요소이다.
그러나 음식을 섭취하는 일, 즉 식사(食事)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되는 특성 때문에
사람들은 그 중요함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
특히 먹을 것의 재료가 되는 여러 가지 식재료의 인공적인 재배와 양식이 가능해지면서
‘한 끼의 음식’이 지닌 근원적인 소중함은 매우 희미해졌다.
반면에 요즈음에는 음식을 섭취하는 과정에 수반되는 부수적인 요소들이 현대인의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다양한 분야의 요소와 결합하여 산업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뿐인가!
‘샬롯 레드와인 소스에 적신 강낭콩을 깔고, 그 위에 올리브 오일에 익힌 농어 한 토막을
살포시 얹은 하얀색 접시에 담긴 음식’과 같은 요리의 세계는
그 자체로 예술의 차원으로 평가된 지 이미 오래다.
우리나라에서 자기(磁器 : 靑磁 · 白磁)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약 10세기 중엽 경인 고려시대이다.
이후 자기의 제작기술이 보편화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금속기인 동기(銅器)보다 흙으로 만든 자기를 음식을 닮는 그릇으로 사용하였다.(사진1, 2)
또 사용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그 품질도 다양해졌다.
상위계층의 사람들일수록 좋은 태토(흙)와 유약을 사용해 만든 우수한 품질의 자기를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그릇들은 모양과 빛깔이 고울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표현기법으로 아름다운 무늬를 수놓았다.
(사진3)
즉 그릇이 음식을 담는 본연의 덕목인 ‘쓰임새(用)’이외에,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의 취향인 ‘아름다움(美)’이라는 옷을 입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옷에 사용된 옷감과 색깔과 무늬와 종류는 사월에 피는 꽃처럼 많다.
고려인(高麗人)이 그릇에 피운 꽃, 청자의 변주곡을 꽃향기 난만한 시절에 들어보는 일 또한 그윽하리라.
청자, 분청사기, 백자를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도자기는
동일한 재료를 가지고 동일한 사람이 동일한 양식의 그릇을 만들었더라도
가마 안에서 번조(燔造, 그릇을 불에 익힘)하는 과정에서 불의 분위기에 따라 색상이 달라진다.
고려시대 청자의 경우 ‘비색(翡色)’으로 대표되는 푸른색의 옥빛 청자를 이상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사진4>의 경우처럼 미리 만들어진 문양틀(도범:陶范)을 이용하여 찍어내는 동일한 방법으로 제작한
청자라도 왼쪽의 갈색을 띤 것보다는 오른쪽의 비색청자가 고급청자로 이해된다.
또 <사진5>의 경우처럼
같은 문양인 앵무새를 표현하는 정도와 수준이 청자를 만드는 처음 단계에서부터 고급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팔백여 년이 넘는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아직도 오롯한 하나의 그릇으로 존재하는
차갑고 단단한 청자속의 앵무새는 말한다.
‘눈동자가 없어도, 유려한 깃털을 지니지 못하였어도 나는 앵무라오...!’
이처럼 고려시대의 청자는 만드는 사람과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문양의 표현정도와 만듬새, 그리고 유색 등 그 품질에 차이가 있었다.
특히 그릇에 무언가를 나타낸 문양은 시기에 따라서도 아주 다른 내용과 상태로 변화되었는데,
이러한 특징은 청자를 살펴보는 무한한 재미와 기쁨을 주는 요소로
고려시대 사람들의 꿈과 이상을 바람끝에 꽃잎이 떨리는 미세한 감각을 느끼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해준다.
고려에서 처음 자기를 만들 때에는 그릇의 표면을 장식하지 않았다.
물론 날카로운 도구로 꽃이나 새를 새긴 음각청자,
또 음각을 한 후에 검은색과 흰색의 선과 면을 통해 화려한 장식을 한 상감청자를 만들던 시대에도
늘 장식이 없는 무문청자(素文靑磁)는 일정한 양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고려 장인들의 청자제작 기술은 향상되어
문양이 없는 청자는 아름다운 선이 일품인 기형과 깊고 그윽한 비색의 진수를 보여주었고(사진6, 7),
금속공예의 입사기법이나 목칠공예의 나전기법에서 쓰인 장식기법을 자기에 접목시킨 상감청자를
만들 때에는 투명한 유약아래서 향기롭게 피어난 모란과 연꽃, 앙증맞은 원숭이, 개구리, 두꺼비
그리고 무리지어 춤을 추는 듯 한 새들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사진8, 9)
우리나라에서 10세기 중엽 경에 처음 자기를 만든 이래 조선 말기에 이르는 한국도자사(韓國陶磁史)의
긴 여정에서 하나의 그릇이 보여 줄 수 있는 무한한 존재양태는 고려시대의 청자에 잘 구현되었다.
소박하지만 격조가 높은 품격, 고요한 색, 살구빛 웃음, 비 그친 여름 날 오후의 맑음.... 등등의 미사여구는
오히려 그릇 하나가 보여주는 고전과 파격 앞에서 궁색하다.<사진10>
오래된 것과 현대적인 것 이 모두를 품고 있는 청자의 무한한 변주에서
지구상에 두 번째로 긴 자기(磁器)의 역사를 지닌 우리가 맞이할 미래의 그릇을 꿈꿔본다.
- 박경자, 문화재청 청주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2010-04-05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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