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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며(자료)

한일병합 100주년(2010년) - 황제의 서명까지 위조했다

Gijuzzang Dream 2010. 6. 4. 01:43



 

 

 

 

 

 

 올해 2010년은 한·일 병합 100주년이 되는 해 
 

 황제의 서명까지 위조했다

 

 

 


 

지난 1910년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이후 36년간 치욕스러운 식민 통치를 받아야 했다.

1945년 광복이 되었지만 식민 지배가 남긴 상처는 여전히 한·일 양국에 깊은 앙금으로 남아 있다.

지난 5월11일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교수 등 한·일 양국의 지식인 2백14명은

'한·일 병합 조약은 무효이다'라는 내용의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 가운데도 '왜 조약이 무효인가'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시사저널> 은 지난호에 이어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기고를 통해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조약이 왜 무효인지를 알아본다.


 

 

① 보호조약 강제의 현장, 일본이 남긴 강제 증거

'제2차 일한협약(을사륵약)'은 가장 중요한 주권인 외교권을 빼앗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측의 저항은 어느 때보다 컸고, 일본측의 강압도 가장 난폭했다.

일본은 총리대신을 네 번 지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보내

현장을 지휘하게 했다.

1905년 11월15일 이토가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이 자리에서 세 시간이 넘도록 쟁론이 벌어졌다.

일본의 요청을 들은 고종 황제는,

그렇다면 한국은 아프리카의 토인국이나 오스트리아에 병합된 헝가리 신세가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절대로 이에 응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토는 외부대신에게 협상에 임하라고 지시해주기를 협박조로 거듭 말했지만,

황제는 이런 중대사는 정부에서도 절차가 있고 중추원과 일반 신민의 의견까지 들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거부했다.

이토는 전제국가에서 황제의 뜻 외에 다른 무슨 절차가 필요하냐고 폭언하면서

협상 지시를 거듭 촉구하고 물러났다.

대한제국의 '의정부회의 규정'(최종 규정, 1904년 3월4일자)에 따르면,

조약은 외부대신이 상대국의 제안을 접수해 의정부 회의에 회부해

의정(또는 참정)이 토론을 주재해 다수 의견으로 회의록을 작성해 황제에게 재가를 구하는 한편,

중추원에도 동의를 구하도록 되어 있었다.

 

11월16일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겐죠(林權助)는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협상안을 제출했다.

고종 황제와 대신들은 곧 회동해 이 안건은 회의에 아예 회부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11월17일 아침부터 일본 공사는 한국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으로 초치해 제안을 수락할 것을 회유·압박했다.

대신들이 응하지 않자 하야시 공사는 황제와 직접 의논할 것을 제안하면서

황제의 거처인 중명전(重明殿)으로 이동했다.

황제와 대신들은 간담회 형식으로 다시 만나 계속 거부할 것을 다짐했다.

오후 6시께 하야시 공사는 이토 특사가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 대사가 직접 나설 것을 요청했다.

이토는 종일 한국주차군 사령부(현 웨스틴조선호텔 건너편에 있던 대한제국의 영빈관 대관정을

무단 점거해 사용)에서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쯔(長谷川好道)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이토는 이 전갈을 받고 하세가와와 함께 헌병들을 거느리고 중명전으로 갔다.

좁은 입구와 마당은 일본군 헌병들로 가득 차다시피 했다.

이토는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했지만, 황제는 대사와는 더 할 얘기가 없다고 거절했다.

이토는 퇴궐하려는 한국 대신들을 불러 세워놓고 한 사람씩 심문조로 찬반 의견을 물었다.

이토는 반대 의견에 대해서도 엉뚱한 토를 달아 찬성으로 간주해 찬성자를 다수로 만들었다.

 

이완용이 조약의 시한을 '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라고 명시하고,

'한국 황실의 안녕을 보장한다'라는 구절을 넣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전날 이토와 짠 각본이었다.

이토는 반대자는 참정(한규설)과 탁지대신(민영기) 두 사람뿐이라고 선언하면서

이완용의 제안을 반영해 조약문을 새로 쓰게 했다.

 

통역관 마에마 교오사쿠로 해금 헌병들을 데리고 한국 외부에 가서 외부대신의 직인을 가져오게 했다.

새로 쓴 조약에 날인을 마쳤을 때는 11월18일 새벽 1시 30분께였다.

외교권 이양이라면 '조일 수호 조규'처럼 한국 황제의 비준서가 반드시 첨부되어야 하는데도

이 조약에는 외부대신 직인만 찍혀 있을 뿐이다.

일본측은 억지를 부리던 중에 결정적인 강제의 물증을 스스로 남기고 있는 것을 몰랐다.

한국측의 손으로 작성되고 철해져야 할 한국어본의 조약문이

일본공사관측에 의해 처리된 증거가 남겨졌다.

1년여 전의 '의정서'만 해도 조약문은 각기 외교 업무를 주관하는 양측의 기관이 주관해 처리되었다.

즉, 한국은 '韓國外部', 일본은 '在韓國日本公使館'이라는 글자가 인쇄된 용지를 사용하고,

각기 서로 다른 끈으로 그 문건들을 철해 교환했다. <사진 1> <사진 2>

 

- <사진 1, 2> '제2차 일한협약'(보호조약)의 한·일 양국어본 비교(왼쪽).

한국어본의 끈이 일본어본과 같은 청색이다.

일본어본은 '의정서'처럼 '재한국일본공사관' 용지를 사용했지만,

한국어본은 '한국 외부' 표시가 없는 적색 괘지이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한국측은 황색, 일본측은 청색의 끈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때는 일본어본은 '의정서' 때와 같은 용지와 끈을 사용했지만,

한국어본은 기관명이 인쇄되지 않은 적색 괘지에 일본측이 사용한 청색 끈으로 철해져 있다. 

이것은 일본공사관측이 한국어본까지 직접 챙겼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귀국 후 천황에게 올리는 보고서의 내용까지 조작했다.

추밀원 비서실장(都築馨六)이 작성한 보고서의 초고(일본 국회 헌정 자료실 소장)에는

이토 특사가 한국 황제를 알현했을 때의 분위기를 '한국 황제는 이번 조약에 찬성하지 않아'라고 적었다.

그런데 '찬성하지 않아'의 구절 위에 흑색 선을 긋고 '찬성하지 않을 수 없어'라고 고치고

한국 황제가 처음부터 협조적으로 임한 것으로 내용을 바꾸었다.

이런 조작 후에 '황제 협상 지시'를 정론처럼 삼아

한국 정부의 <官報>에 이 조약을 '한일 협상 조약'으로 게재하게 하는 한편,

한·일 양측의 공식 기록들을 모두 이 각도에서 작성하도록 했다.


 

 

② 고종 황제 퇴위 강제, 뒤이은 순종 황제 친필 서명 위조

고종 황제는 '제2차 일한협약'이 강제되자

곧바로 독일, 러시아, 미국, 프랑스 등 수교국의 국가 원수들을 상대로 조약 무효화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1906년 1월 말에 외교권 실행 기구로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이토는 고종 황제가 1907년 6월에 비밀리에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3인을 파견하자,

이를 구실로 퇴위를 강제했다. 황제는 이를 거부했지만,

일본 정부는 7월20일에 환관 두 명을 신·구 황제의 대역으로 동원해 양위식을 거행했다. <사진 3>

 

이토는 7월24일에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통감이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직접 관여하는 체제를 만들기 위한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퇴위 강제와 함께 추진된 것이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절차를 밟는 것이 될 수 없었다.

한국 황제가 퇴위를 거부하고 황태자가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전권 위임과 같은 절차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이 조약은 말미에 두 사람이 '각기 본국 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기명 조인한다'라고

밝히고 있지만, 신·구 황제 어느 쪽도 위임을 허락해준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이 조약은

통감이 나서 대한제국의 통치 체제를 통감부의 것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황제와 황태자는 이토의 강압에 오래 맞섰다.

8월2일에 통감부가 융희(隆熙)라는 새 연호를 공표했지만, 황태자는 나서지 않았다.

일본은 황태자의 이복동생인 10세의 영친왕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그를 인질로 삼는 계략으로 황제를 압박했다.

일본의 황태자가 먼저 서울을 방문하는 것으로 계략이 가시화되자 고종 황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 일본 황태자 마중 나가는 순종 황제 마차. ⓒ연합뉴스

 

황제는 11월15일 종묘를 방문한 다음 경운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황태자(순종)가 있는 창덕궁을 들렸다.

3일 뒤 황태자가 종묘를 찾고 선대왕들의 신위 앞에서 황제의 위에 오르겠다는 서고(誓告)를 올렸다.

이때 통감부는 다시 기묘한 계략을 부렸다.

황제의 서고문에 이름자를 친필로 기입하는 난을 만들었다.

새 황제가 '李拓'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여기에 써넣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이날부터 황제의 결재 방식을 황제가 이름자를 직접 쓰는 친서(親署) 제도로 바꾸었다.

이 방식은 일본에서 명치유신 이래 해 오던 것이었다.

서고가 끝나자마자 통감부의 직원들은 서고문을 넘겨받아

이날부터 1910년 1월18일까지 2개월간 61건의 문서에 황제의 이름자 서명을 흉내 내어 안건들을 처리했다.

<사진 4>


- <사진 3> (왼쪽) 이탈리아의 사진 잡지(1907년 8월4일자)의 표지 사진.

'신황제' 대역의 젊은 환관이 '구황제' 대역 환관으로부터 양위를 받고 막 용상에 올라앉아 있다.

앞쪽에 일본 장교 복장의 인물이 보인다.

- <사진 4> (오른쪽) 순종 황제 이름자 서명 위조 상태. 하나여야 할 필체가 여섯 가지 정도 된다.

통감부 직원들이 각기 소관별로 위조 처리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이 문건들은 대한제국의 정부 조직과 재판소, 감옥 제도 등을 통감부 감독 체제로 바꾸는 것들이었다.

공문서 위조 행위가 내정권 탈취에서도 대규모로 행해졌다.

 

 

 

③ 병합 조약에 순종 황제는 서명하지 않았다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한 후 무력 투쟁을 벌이는 의병들의 기세는 국내외에서 날로 높아갔다.

1909년 6월에 이토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통감 자리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10월에 일본의 만주 진출에 한몫하고자 하얼빈으로 갔다가

거기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본거를 둔 대한의군의 참모중장 안중근이 이끄는 특파대에 의해 처단되었다.

 

일본 군부는 이토가 통감에서 물러나기 직전에 한국 병합에 대해 이토도 찬성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본 군부는 하얼빈 사건 후 배후 조직에 대한 철저한 탐문 조사를 마치고

1910년 3월에 안중근을 극형에 처한 뒤, 6월에 '한국병합준비윈회'를 발족시켰다.

병합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검토하고 문건들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안중근 사건에 대한 조사를 주관한 육군대신 데라우찌 마사다케(寺內正毅)가 7월 하순 통감으로 부임해

병합 집행에 나섰다.

일본은 병합 조약만은 정식 조약의 요건을 다 갖추려고 했다.

준비위윈회는 한국측의 이름으로 낼 문건들도 모두 준비했다.

데라우찌는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사전에 협조를 당부한 뒤,

8월22일에 위임장부터 내놓고 이것을 순종 황제에게 가져가서 서명과 날인을 받아오라고 했다.

황제는 이완용 외에 친일 분자 윤덕영, 민병석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시간 이상 버텼다.

그것은 침묵 시위였다.

창덕궁 낙선재에 갇힌 몸이 된 그에게는 이미 저항할 아무런 수단이 없었다.

'大韓國璽'라고 새겨진 국새를 찍고 그 위에 자신의 이름자를 직접 썼다. <사진 5>

 


- <사진 5> '한국 병합 조약'의 한국측 전권위임장.

국새가 날인되어 있고 그 위에 순종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보인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이완용은 이를 받아들고 남산 아래 통감 관저로 달려갔다.

데라우찌가 내놓은 조약 본문에 기명 날인했다. <사진 6>

 

- <사진 6> '한국 병합 조약' 전권위원들의 기명 날인 상태.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그런데 데라우찌는 다시 각서 하나를 내놓았다.

병합의 사실을 알리는 양국 황제의 조칙을 언제든지 발표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조약은 체결과 동시에 한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 비준 절차를 밟을 시간이 없으므로

병합을 알리는 조칙의 공포로 대신하기 위한 것이었다.

양국 황제들의 조칙은 8월29일에 반포되었다.

그런데 한국 황제의 조칙은 '칙유'로 이름이 바뀌고,

위임장과는 달리 국새가 아니라 '勅命之寶'라고 새겨진 어새가 찍혔다.

그 위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황제의 이름자 서명도 없다. <사진 7>

- <사진 7> '한국 병합 조약'의 한국 황제 '칙유'(조선총독부 홍보용).

국새가 아닌 것이 찍히고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없다.

 

 

이 어새는 황제의 행정 결재용으로서 통감부가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킬 때 빼앗아간 것이었다.

따라서 이 날인은 순종 황제의 의사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순종 황제는 1926년 4월26일에 운명하기 직전에 곁을 지키고 있던 조정구(趙鼎九)에게

유언을 구술로 남겼다. 자신은 나라를 내주는 조약의 조칙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이 구술 유언 조칙은 멀리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이 발행하던 신한민보에 실렸다. <사진 8>

- <사진 8>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신한민보(新韓民報) 1926년 7월18일자에 실린

순종 황제의 유조. '병합 인준은 일본이 제멋대로 한 것이요 내가 한 바가 아니다'라고 밝히고

"여러분들이여 노력해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라고 끝맺었다.

 

이 진술은 '칙유'의 상태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한국 병합 조약'만은 정식 조약의 구비 조건을 다 갖추려 했던 일본측의 계획과는 달리

비준서를 대신할 한국 황제의 조칙은 발부되지 않은 것이 되었다.

 

 

일본측은 병합 조약에서도 결정적인 강제의 흔적을 남겼다.  

<사진 9>에서 보듯이 이 조약은

한·일 양국어본이 똑같은 용지에 똑같은 필체로 작성되고 똑같은 끈으로 묶여져 있다.

- <사진 9>  '한국 병합 조약'의 한·일 양국어본 재질 비교.

앞표지, 첫 페이지 그리고 뒤표지(왼쪽부터).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조약이 한쪽 의사로 강제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세계 조약사상 이런 예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 이태진 / 서울대 명예교수 · 한국사
- 2010.06.04  ⓒ 시사저널(http://www.sisapress.com).

 

 

 

 

 

 [경술국치 100년]

“15년전 순종황제 날인 날조확인 순간 日人들도 탄식”

 

1995년 어느 여름날. 일본 주오대(中央大) 강당에서 열린 을사늑약 90주년 학술대회장이었다.

연단에 자리한 수십명의 한 · 일 양국 학자들과 강당을 가득 메운 수백명의 일본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일본 통감부 직원 마에마 교사쿠가 남긴 글에서 따와 합자한 '척(坧)'자가 제시됐다.

조금 뒤 순종 황제가 일본과의 외교문서에 서명한 '척(坧)'자를 겹쳐 보였다. 딱 맞아떨어졌다.

 

대한제국 문서에 있는 순종 황제의 날인 서명이 실은 일본인 통감부 직원의 날조였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강당은 '아~' 하는 낮고도 무거운 탄식으로 가득 찼다.

학술대회 뒷자리를 떠나는 학자와 청중은 물론 신문 · 방송 기자들까지 훌륭한 연구성과라며

악수를 청해 왔다. 건네받은 명함만 수백장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어느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이 얘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경술국치 100년(8월29일)을 맞아 서울 의주로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당시 기억을 이렇게 더듬었다.

이때의 주장은 차츰차츰 불어나 15년 만인 2010년 한 · 일병합 조약은 원천무효라는

'한 · 일 지식인 공동선언'을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 어떻게 마에마 교사쿠의 필체라고 확신했습니까.
- 말하자면 '표적 수사'였어요(웃음). 근거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마에마가 쓰시마 출신으로 한국어에 능통했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그가 일본의 한국사 연구 1세대라는 점이었습니다.

마침 제가 학부 시절에 마에마가 남긴 서얼 제도나 훈민정음 연구논문을 많이 봤어요.

때문에 순종 황제의 위조된 친필 서명을 봤을 때 마에마 글씨 같다는 감이 확 오더라고요.

그래서 넌지시 마에마 유품을 볼 수 있는 곳이 어디냐고 일본인들에게 수소문해 보니

규슈대학에 있다는 거예요. 바로 날아가서 척(坧)자를 합자해 만들어본 뒤 비교했지요.

그 뒤 수사결과를 발표한 겁니다.

 


→ 일본 반응에 변화가 있었나요.
- 주오대 때 반응이 워낙 열광적이었는데 다음날 언론보도가 하나도 없어서 이게 뭔가 했습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우익 테러 같은 걸 두려워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요즘에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난해 10월 시민단체 초청으로 교토에 가서 설명했더니

모두들 "어떻게 이렇게 억지 조약을 맺을 수 있나. 부끄럽다."고 하더군요

 

→ 그런 변화의 기미가 언제 감지됐나요.
- 2000년대 들어 8년 동안 을사늑약 원천무효 주장을 펼쳤습니다.

관련해서 국제학술대회를 열고 그 결과를 2008년 '한국병합과 현대'라는 책으로 일본에 내놨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나왔고요.

일본어판이 나오면서부터 일본 학자들 사이에

"이제 우리도 양심적으로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들이 나왔다고들 합니다.

학문적 사실만큼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본 학계의 높은 수준을 볼 수 있었습니다.

 


→ 변화 원인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탈아론(脫亞論)에 대한 반성이지요. 일본은 뭔가 특별한 존재니까 아시아를 벗어났고,

미개한 한국과 중국은 우리가 이끌어 줘야 한다는 게 탈아론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과 중국이 눈부시게 성장하면서

일본만 특별히 우월하다는 얘기를 하기 어렵게 된 것이지요.

결국 예전 탈아론은 침략주의에 불과하지 않았느냐는 반성이 나오게 된 겁니다.

이 같은 반성은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특히 광범위하게 공감대를 얻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논쟁을 하다 보면 지식인들이 더 답답해서 뭔가 큰 정치적 계기가 없으면

일본의 변화가 힘든 게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지금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더 앞장서 주고 있습니다.

 


→ 선생님의 연구가 고종 황제를 지나치게 미화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고종이 결국은 전제군주 아니었냐는 것이지요.
- 그건 지금이 민주주의 시대다 보니 군주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가령 민중사학적 시각에서는 고종의 근대화 계획보다는 동학혁명이 더 중요합니다.

동학혁명이 있었는데 고종 황제가 탄압했다, 그러니 전제군주는 나쁜 것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은 머릿속으로 생각한 틀을 가지고 있을 뿐 구체적 사료를 세심히 보지 않았기에

나오는 겁니다. 당시 동학의 주장을 보면 고종을 비난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고종 역시 일본이 동학혁명을 핑계삼아 개혁을 하라고 강요하자 농민군과 충분히 협상할 수 있으니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반박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사료를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나도 한때 고종이 무능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료를 보면서 인식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일제가 자신의 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채색했던 논리가 너무 상식처럼 퍼져 있다는 말이지요.

 

→ 탈민족론은 어떻게 보십니까.

그들 입장에서는 선생님의 연구가 결국 '강도' 일본과 '피해자' 조선이라는 이분법을

더 강화하는 것처럼 보일 텐데요. 얼마 전 내놓은 선생님 논문도

일본 정한론(征韓論)의 기원을 조슈(長州) 지역 파벌,

그러니까 결국 임진왜란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내용인데요.

- 메이지유신을 추진한 조슈 세력은 한마디로 천황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서는

천황에게 조공을 바치는 국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조선이라는 논리입니다. 정한론이지요.

사실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들인 엄청난 노력과 어쨌든 그걸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정한론과 친근할 수밖에 없는 메이지유신의 근본적인 한계도 지적해 줘야 합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굳이 남들을 침략할 필요까지 있느냐는 소일본주의가 나옴에도 이걸 무시해 버립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피해자라서 더 정확하게 지적해 줄 수 있는 겁니다.

 


→ 고종 시대사 연구가 얼마나 더 진행될 수 있을까요.
-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이후 (한국 강제병합에 관한) 사료 공개 작업을 추진 중인데

국립공문서보관소의 목록상태가 아주 나빠요.

(일본에) 장기체류하면서 눌러앉아 뒤져보지 않으면 뭐가 들었는지 잘 모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좀 더 정리가 되면 차근차근 둘러볼 여유가 더 많을 거예요.

요즘 들어 자료가 많이 올라오고 있으니 고종 시대사는 앞으로 분명 크게 바뀔 겁니다.

 


→ 고종이 독살됐다고 보는 소신에도 변화가 없으신 거지요.
- 물론입니다. 얼마 전 (독살설 근거)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1905년의 을사늑약 유효성을 인정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고종이 거부하자 독살한 겁니다.

 


→ 간도협약에 대해서도 기대와 우려가 교차합니다.

(일본이 간도를 청나라에 넘긴 간도협약은 1909년 체결됐다.

이 협약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제국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을사늑약 때문이다.

따라서 을사늑약이 원천무효라면 간도협약도 원천무효가 된다.

때문에 한쪽에서는 이번 기회에 간도까지 되찾자고 하는 반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는

우려도 나온다)
- 논리적으로는 무효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책임을 묻는 것도 힘겨운 싸움인데 중국과 또 싸울 수 있을까요.

힘을 분산하지 않았으면 해요. 조선과 중국은 간도협약 이전부터 영토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래서 맺은 게 1899년 한·청조약인데 이때 간도 문제를 빼버립니다.

고종은 중국과의 조공관계에서 벗어나는 것, 그래서 중국과 협상을 통해 대등하게 조약을 체결하는 것

자체를 독립국에 대한 하나의 징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간도 문제를 비워두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런 원칙이 원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 마지막으로 다른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일본 일각에서는 한국도 베트남전에 대해 털어낼 것은 털어내라고 요구합니다.
- 그쪽 연구자가 아니라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다만, 일제의 한국 병합과 같은 수준의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체였느냐, 어느 정도 피해를 끼쳤느냐는 문제도 있고요.

그런데 그런 주장은 일본 쪽에서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 내놓는 성격이 짙습니다.

그런 부분은 조심해야겠지요.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2010.08.29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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