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고의 '지록위마(指鹿爲馬)' |
호해와 조고의 ‘합작품’ 지록위마(指鹿爲馬)는 어디서 왔을까.
“쾌락이란 쾌락은 다 모아놓고 즐기고파”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년) 550년의 분열기를 수습하고 부귀영화의 극치를 누렸던 진시황(秦始皇 · 기원전 259∼210년)도 인간의 수명을 이길 수는 없었다. 영원히 늙지 않는 불로초를 찾아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지방 순행 도중에 임종을 맞게 되자 유언으로 태자 부소(扶蘇)를 보위에 오르도록 했으나, 승상 이사(李斯)와 측근인 환관 조고(趙高) 등이 시황의 유언을 거짓으로 꾸며 어린 호해(胡亥)를 세워 2세 황제로 삼았다.
그 이면에는 부소가 똑똑한 데 비해 호해는 아직 철부지인 데다 천치라 할 만큼 아둔해 조종하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당서(唐書)’ 원진전(元傳)에는 “호해는 시서(詩書)를 읽을 줄 몰랐으며 옛 성현의 말도 귀찮게 여겨 물리쳐버렸다. 그런가 하면 조고와 같은 환관을 통해 잔인하고 가혹한 정치술을 배웠다. 호해는 사슴과 말을 놓고서 어느 것이 사슴이고 어느 것이 말이라는 것을 단정할 줄조차 몰랐다” 라고 기술돼 있다.
결국 호해를 황위에 앉힌 다음 세력을 확대해 진(秦)나라의 실권을 잡은 사람은 조고였다. 호해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무섭게 “짐은 천하의 쾌락이란 쾌락은 모두 모아놓고 그 속에서 일생을 보내고 싶다”라고 지껄였다.
간교한 조고는 때를 만난 듯 “정말로 훌륭한 생각이옵니다. 그러려면 먼저 나라의 법률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해서 백성이 벌을 무서워하게끔 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그 다음으로 선제(先帝) 이래의 묵은 신하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제거해야 합니다. 폐하의 말씀이라면 소금 섬을 끌고 물에 들어가라 해도 서슴지 않고 들어갈 만큼 절대 복종하는 신인(新人)을 등용해야 합니다. 이들은 폐하를 위해 몸이 가루가 되도록 헌신할 것입니다. 그런 연후라야 비로소 폐하는 마음을 놓으시고 즐거움을 누리실 수가 있습니다” 라며 호해를 꼬드겼다.
이에 호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조고는 시황제 때부터 세력을 놓고 경쟁해오던 이사를 살해하고 선제 이래의 충신과 장군, 나아가 왕자까지 암살해버린 다음 승상의 감투를 차지함으로써 실권을 장악했다.
간악한 인간의 욕심에는 한이 없다. 조고는 권세를 누리게 되자 황제 자리까지 넘보았다. 그러나 출신 성분이 미천해 조정 대신들이 따르지 않을까 우려한 조고는 은근히 궁중 관리들이 호해와 자신 중 누구를 지지하는지 확인하려 했다. 우선 그것부터 판가름하되, 만일 자기를 따르지 않으면 제거하리라는 암시를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조고는 어느 날 기괴한 ‘데먼스트레이션’을 획책했다.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 주간동아, 2010.01.05 718호(p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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