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창덕궁에서 만나는 세종과 정조

Gijuzzang Dream 2010. 7. 7. 14:33

 

 

 

  

 

 

 창덕궁에서 만난 세종과 정조

 

 

 

■ <서울의 위치와 궁궐자리>

 

- 고지도에 나와 있는 서울의 위치를 보면 한양을 감싸주는 8개의 산이 있다.

북한산과 관악산, 덕양산과 아차산(용마산)이 멀리서 서울을 감싸주는 큰 산(조산祖山 : 외사산外四山)

②청와대 뒷산인 백악과 서울의 안산(案山)인 목멱(남산), 좌청룡 타락산과 우백호 인왕산

가까이에서 서울을 품어주는 4개의 작은 산(주산主山 : 내사산內四山)이다.

 

- 이들 네 주산에서 발원한 물들이 각각 동서남북에서 흘러내려와

서울의 한복판에 모여 청계천(내수內水)을 이루며, 이 청계천 물줄기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달려나가

중량천과 합류한 뒤 한강으로 흘러들고, 한강은 서울을 휘감아 돌며 황해로 빠져나간다(외수外水).

“바람을 저장하고 물을 얻는다(장풍득수藏風得水)”는 풍수의 의미

 

- 한양 안의 궁궐은 시간이 지나면서 늘었는데

좌묘우사(左廟右祠)인 종묘와 사직단은 북궐이라 불린 경복궁을 기준으로 정해진 것이고,

1404년(태종 4) 한양 천도결정시 이궁으로 짓기 시작한 창덕궁(그 이듬해 창덕궁에 이어함),

1482년(성종 13)에 상왕 이방원이 머물던 수강궁을 수리하면서 다시 지은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동궐이라 불렸다.

그리고 광해군 때 지어진 경희궁(광해군 때는 경덕궁, 영조 때 경희궁으로 바뀜)을 서궐로 불렀다.

지금의 조선호텔 부근의 정릉동 일대의 ‘정릉동 행궁’이 고종에 의해 궁궐로 발전된 경운궁,

즉 덕수궁이 있는데 원래 경운궁은 아관파천(1896년) 이후 고종이 중건해 이어하면서

대한제국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주요 궁궐의 준공시기

경복궁 - 1395년(태조 4) 9월

창덕궁 - 1405년(태종 5) 10월

창경궁 - 1484년(성종 15) 9월

경희궁 - 1622년(광해군 14), 원래는 경덕궁→영조 때 경희궁으로 개명

경운궁 - 1897년(고종 34) 2월, 1907년부터 덕수궁으로 개명

 

** 궁궐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책

- 창덕궁을 포함한 궁궐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차 자료로는

<동궐도(국보 제249호)> <궁궐지> <동궐도형> <한경지략> 등이 있다.

그 외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한영우, 2006)> <우리 궁궐이야기(홍순민, 1999)>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동궐도>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때(1827-1830) 제작된 창덕궁과 창경궁의 그림으로

전각마다 건물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조감법을 이용해 총천연색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현재 고려대박물관과 동아대박물관에 소장).

 

<궁궐지>는 헌종 때와 순종 때 편찬된 전각의 쓰임과 역사를 볼 수 있는 책이다(작자 미상).

이 책은 특히 각 전당별 위치는 물론 관련된 중요한 정치 ㆍ 문화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각 전당의 상량문(上樑文: 집을 지을 때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은 다음 마룻대를 올리는 의식에서

사용하는 글)이라든가, 각 전당에서 태어났거나 죽은 사람 등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

 

 

■ <창덕의 의미와 역사>

 

- 창덕(昌德)은 ‘성(盛)한 덕’ 내지 ‘창성한 덕’으로, 1415년(태종 5) 10월에 작명되었는데,

이것은 <시경詩經>에서 그 이름을 딴 경복궁(景福宮)과 달리 사서삼경 등에 나오지 않는다.

성 건물의 이름 짓기에 있어서 정도전의 위상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태종 때 궁이 완성되고 이름까지 정했으나 아직 궁궐로서 시설들이 완비되지는 않아

계속해서 누각과 석교 등이 만들어졌고, 1412년(태종 12)에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이 만들어졌다.

 

- 태종이 1418년(태종 18) 좁은 인정전을 다시 지으려는데

신하들이 새로운 왕에게 그 일을 넘기자고 말하자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토목의 공사[역사役事]는 백성을 괴롭히는 중대한 일이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긴다.

그런데도 속히 지으려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백성을 부리는 책임은 내 자신에게 감당하기 위함이다.

세자가 즉위한 뒤에는 비록 한 줌의 흙이나 한 조각 나무의 역사(役事)라도

백성에게 더하지 못하게 하여 깊이 민심을 얻게 하라.

(土木之役 勞民之重事 民甚病之. 所以欲速營之者 無他, 要使小民之責 當我之身.

而世子卽位之後 勸拳土寸木之役 不加於民)”(태종실록 18/07/05)

 

- 창덕궁과 관련해 태종이 당대 최고의 건설책임자 박자청을 벌한 일이다.

박자청은 선초의 중요한 역사, 즉 송도(松都)의 경덕궁(敬德宮)과 개경사(開慶寺)와 연경사(衍慶寺),

한양의 창덕궁(昌德宮)과 모화루(慕華樓)와 경회루(慶會樓),

그리고 성균관(成均館) 및 궁궐의 행랑(行廊)공사를 주관한 사람이다.

그가 가혹하게 일을 독촉한 것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을 때

의정부에서 “박자청이 일을 알고 또 부지런하니 고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태종실록 12/06/01).

 

그런데 박자청이 태종의 지시 즉 “아무쪼록 단정하게 지으라”는 지시와 달리

“뜰의 넓고 좁은 것도 요량하지 않고 건성 짓기를 시작하여 이미 기둥을 세우고 상량까지 하여,

인정전에서 굽어보면 경사가 져서 바르지 못하게 지었다(自仁政殿俯視之則傾斜不直).”

그러자 상왕인 태종이 성내어 곧 헐어버리게 하고 박자청 등을 하옥시키게 했다(세종실록 1/04/12).

 

인정전 앞의 전경이 경복궁과 달리 사다리꼴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은

박자청의 ‘빨리빨리’ 공사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창덕궁의 돈화문이 정중앙이 아니고 서편으로 난 것은

창덕궁을 지을 당시 종묘가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문화재청. 2007. 26)

 

- 창덕궁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이곳에서 쫓겨났으며,

영조가 창덕궁 선정전에서 신하들과 <소학>을 토론하여 <선정전 훈의소학>을 간행하는가 하면,

선정문 밖에 직접 나와 궁궐에 물건들을 납품하던 공인이나 시전상인들을 만나

폐단을 물어보고 체납된 세금을 감해준 곳이기도 하다(영조실록 33/01/05).

 

또한 정조가 규장각을 세우고 개혁정치를 구상하고 토론하던 공간도 바로 창덕궁이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전투를 벌인 곳도 바로 이곳 창덕궁이다.

 

 

 

1. 세종대왕과 창덕궁

 

- 세종은 서울을 서울답게, 즉 재위 8년(1426) 도성대화재로 도성 중심부가 잿더미로 변한 것을

새로 도로를 정비하고 기와집으로 바꾸어 서울을 위풍당당한 수도로 거듭나게 한 임금이다.

 

세종은 재위 32년간 거처를 61번이나 이동(월평균 0.16회)했는데,

재위 전반기에 경복궁과 창덕궁을 바꿔가며 거처하다가,

재위 15년(1433) 이후부터는 경복궁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즉 세종은 경복궁에서 16년 7개월, 창덕궁에서 6년 5개월 동안 머물렀다.

 

이에 비해 조선후기의 정조는 궁궐 이동[이어移御]를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도성 밖 행차를 빈번히 했다.

정조는 주로 창덕궁(12년 7개월)과 창경궁(11년 1개월)에 거처했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되어 1868년(고종 5)에야 복구되었기 때문이다.

 

- 세종은 창덕궁에서 문종의 세자빈을 간택했다.

즉 재위 11년(1429) 세자빈을 뽑을 때

“세계(世系)와 부덕(婦德)은 본래부터 중요하나 혹시 인물이 아름답지 않다면 또한 안된다.”면서

창덕궁에 처녀들을 모이게 한 다음 효령대군 주관으로 세자빈을 간택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허조가 홀로 “불가하옵니다. 만약에 한 곳에 모이게 하여 가려 뽑는다면

오로지 얼굴 모양만을 취하고 덕(德)을 보고 뽑지 않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그러자 세종은 “잠깐 본 나머지 어찌 그 덕(德)을 알 수 있겠는가.

이미 덕으로서 뽑을 수 없다면 또한 용모(容貌)로서 뽑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처녀의 집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좋다고 생각되는 자를 예선(豫選)해서,

다시 창덕궁에 모아놓고 뽑는 것이 좋겠다.”하니, 모두가 좋다고 하였다(세종실록 11/08/04).

 

- 세종의 인재 보호와 관련된 이야기

집현전 학사 설순(偰循)이 이조참의로 발령 받았는데,

창덕궁문 동구(洞口)를 지나면서 말에서 내리지 않았으므로 사헌부에서 탄핵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그에게 벼슬에 나아가기를 명하고 사헌부로 하여금 탄핵하지 말라고 하였다.

실록에 의하면, 설순은 사람됨이 거칠고 차근차근하지 못하여 사리를 잘 분별하지 못하나,

서사(書史)의 기송(記誦)에 조금 능해서 세종에게 발탁되어 <통감훈의(通鑑訓義)>를 찬집(撰集)하였다.

(세종실록 16/07/27).

 

- 창덕궁은 또한 세종 말년의 이른바 ‘내불당사건’으로 시끄러웠던 곳이다.

즉 세종은 1448년(세종 30) 여름, 창덕궁 문소전(文昭殿) 서북쪽 공터에 불당을 건립할 것을 지시했다.

원래 창덕궁 중장(重墻, 안쪽 담) 밖의 문소전 동쪽에 불당이 하나 있었는데

1433년(세종 15)에 폐철된 후 여태 복구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시점에서 세종은

“국가에서 불교를 남김없이 끊어버린다면 모를까 그러지 못할 바에야

선왕이 세웠던 이 불당을 복구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이다.

이에 대해 신하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세종 역시 ‘국왕은 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등 대립하다가 결국 ‘선위파동’까지 간 상태에서

신하들이 항복한 사건이 바로 이곳 창덕궁 안 내불당 문제로 인해 발생했던 것이다.

 

 

2. 동궐도로 본 창덕궁

 

(1) 돈화문(敦化門)과 금호문(金虎門)

-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중용(中庸)> 30장의 “만물이 함께 길러져 서로 해치지 않으며, 도가 함께 이루어져

서로 어그러지지 않는다. 작은 덕은 냇물의 흐름이요, 큰 덕은 교화를 돈돈하게 하니[敦化],

이는 천지가 위대해지는 것이다.”에서 유래한 것이다.

 

돈화문의 문루에는 동종을 걸었는데 당대의 석학 변계량이 명문(銘文)을 지었다(태종실록 12/09/15).

 

- 창덕궁 서쪽 궁장에 금호문이 있는데

이 문으로 승지나 홍문관의 교서관 등 벼슬아치들이 다니는 문이었다.

다만 사헌부의 대관만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출입할 수 있게 했다(한경지략 창덕궁조).

 

(2) 진선문(進善門)과 정청(政廳), 호위청(扈衛廳)

- 진선문 앞에는 금천(錦川)이 있고 그 뒤에는 신문고가 있었다(태종, 영조 때).

진선(進善)은 ‘선한 말을 올리다’는 의미와 ‘훌륭한 인재를 천거한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본래는 15세기의 정난종 글씨였는데,

1999년 복원하면서 서예가 정도준이 새로 쓰고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 오옥진이 새겼다.

(문화재청. 2007. 40).

 

- 정청(政廳)은 이조와 병조에 속한 사무용 건물로 ‘인사업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이조의 정청은 지금은 사라진 연영문(선정문 남쪽의 문) 안에 있었고,

병조의 정청은 빈청 서쪽을 빌려 썼다고 한다.

 

- 1623년 인조반정 이후 궁중을 호위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인 호위청은

‘임금의 호종과 호위를 맡은 관청’이란 뜻으로 ‘호(扈)’는 ‘시중들기 위해 뒤따른다’는 의미이다.

 

(3) 낙선재(樂善齋)

- 낙선재(樂善齋),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를 통틀어 낙선재라 함.

원래는 태조가 임종을 맞았던 광연정(廣延亭) 자리이고

그 후 왕세자 동궁의 처소인 저승전(儲承殿)이 있었던 곳이다.

 

- 낙선재(樂善齋)는 헌종의 서재겸 사랑방으로 만들어졌다.

즉 1847년(헌종 13) 헌종은 후궁 경빈 김씨를 맞으면서 왕실의 사생활 공간으로 사용하려고 지은 것임.

 

1884년 갑신정변 직후에는 고종이 이곳을 집무실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1917년 창덕궁 내전이 화재로 불타 버리자

순종과 순종비 윤황후는 재건될 동안 낙선재에서 임시 거처하였고,

1926년 순종이 죽은 뒤 윤황후가 이곳에서 살다가 1966년에 돌아가셨다.

한편 1963년 일본에서 환국한 영친왕 이은(李垠)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으며,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도 이곳에서 1989년까지 살다 생을 마쳤고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도 이곳에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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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선재 

- ‘낙선(樂善)’은 '착한 일(善)을 즐겨한다'라는 의미로

<맹자>에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으로 선(善)을 즐겨 게으르지 않는 것[樂善不倦]을

천작(天爵)이라고 한다’에서 비롯된 말.

(孟子曰 有天爵者 有人爵者 仁義忠信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 此人爵也. : <맹자> 고자 上)

편액은 청나라의 대가 섭지선의 글씨이고 주련은 추사 김정희 스승인 옹방강이 쓴 글씨이다.

 

낙선재 대청마루 오른편에 있는 사랑방 ‘보소당(寶蘇堂)’은

북송시대의 시인 소동파(蘇東坡)를 보배롭게 여기는 집이라는 뜻인데,

추사 김정희와 교분이 두터웠던 서예가이자 학자인 옹방강(翁方綱)의 당호인 '보소재(寶蘇齋)'를 본 따

지은 것으로 헌종이 자신의 호로도 사용했다.

헌종은 이곳에서 틈틈이 시문을 즐겼는데 결국 후사를 이루지 못하고

재위 15년(1849) 6월6일 중희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이 건물은 국상을 당한 후궁들이 소복으로 은거하던 곳이 되었다.

 

- 석복헌

- ‘석복(錫福)’ 은 ‘복을 내리는 집’이라는 의미인데,

낙선재를 지은 다음해에 지어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가 거처하였다.

석복헌을 낙선재와 수강재 사이에 둔 것은 양쪽에 임금과 대왕대비를 가까이 모시고 효도하며

한편으로 왕세자를 생산하는데 모든 힘을 다하기 위한 배려였다.

상량문에서 그 염원을 엿볼 수 있다.

“오색무지개 기둥을 감도니 아기를 내릴 약속이로다.

하늘이 장차 난초향기 그윽한 방에 계시를 하려는데

대인이 점을 치니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였고

그 중에서 먼저 의남초(宜男草)를 얻는 것이 좋다네.”

 

 

- 수강재

- ‘수강(壽康)’은 대왕대비의 건강과 장수를 염원하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수강재는 1785년(정조 9) 태종 때 지었던 수강궁 터에 다시 지었고.

(수강궁은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1418년(세종 즉위년)에

세 명의 대비 즉 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이곳에 창경궁을 지었다. 그래서 창경궁을 지을 때의 수강궁과 수강재는 일치하지 않는다)

 

1827년(순조 27)부터 3년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면서 집무실로 사용된 일이 있다.

1848년(헌종 14) 순조비 순원왕후 육순을 맞아 고쳐짓고 대비의 처소로 삼았다.

낙선재 일곽이 단청을 하지 않은데 비해 수강재만은 중수하고 단청을 하였으나

그 후 손보지 않아 퇴색하여 단청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한편 대왕대비가 거처하는 수강궁을 가장 동쪽에 배치한 것은

중국 한나라 때 미앙궁(未央宮) 동쪽에 황제의 어머니 태후가 거처하던 장락궁(長樂宮)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본뜬 것이고 대왕대비의 거처를 ‘동조(東朝)’라 한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래서 낙선재 남쪽 정문이 ‘장락문(長樂門)’인데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글씨이다.

곧, 낙선재는 임금이 독서하며 할머니(대왕대비)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과도 같이 지내는

한가롭고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어서 단청도 하지 않은 채 검소하게 지어진 집이다.

 

 

(4) 주합루(宙合樓) 일대

- 주합루

1층은 왕실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 2층은 열람실 겸 강연장으로 쓰였다.

‘주합(宙合)’은 ‘우주와 합일된다’는 뜻으로 원래 <관자(管子)>에서 유래한 말로,

“천지는 만물의 풀무이다. 주합은 천지를 풀무질하고 천지는 만물을 감싸기 때문에 만물의 풀무라 한다.

주합의 뜻은 위로는 하늘까지 통하고 아래로는 땅 아래까지 도달하고, 밖으로는 사해 밖까지 나아가며,

천지를 포괄하여 하나의 꾸러미가 되며, 흩어져서는 틈이 없는 데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관자管子> 주합편).

 

- 현판은 정조의 친필 행서체이다.

 

- ‘규장각 팔경’으로

①봉모운한(奉謨雲漢) : 봉모당의 높은 하늘 ②서향하월(書香荷月) : 서향각의 연꽃과 달

③규장시사(奎章試士) : 규장각에서의 선비들 시험 ④불운관덕(拂雲觀德) : 불운정의 활쏘기

⑤개유매설(皆有梅雪) : 개유와의 매화와 눈 ⑥농훈풍국(弄薰楓菊) : 농훈각의 단풍과 국화

⑦희우소광(喜雨韶光) : 희우정의 봄빛 ⑧관풍추사(觀豊秋事) : 관풍각의 가을걷이

(이덕무 <청장관전서>권 20 규장각팔경시).

 

- 영화당(暎花堂) : 광해군 때 처음 지어졌으며 숙종 때 지금의 건물이 재건됨.

현판은 영조의 친필로 1754년(영조 30) 쓰여진 것으로 ‘꽃과 어우러진다’는 뜻이다.

‘영(暎)’자는 ‘비치다’는 뜻이지만 시에서는 ‘어우러진다’로 많이 쓰인다.

 

- 춘당대(春塘臺) : 정조 때부터 영화당 앞뜰인 춘당대에서 과거시험장으로 이용하였는데

고전소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과거에 급제할 때 시험 본 장소도 이곳 춘당대이다.

이때의 글제가 ‘춘당춘색고금동(春塘春色古今同)’이었다.

 

- 어수문(魚水門) : 송시열이 효종을 인견했을 때 어수(魚水)의 뜻을 살렸다고 함.

<삼국지>에서 유비가 자신을 제갈량과의 관계를 물고기(魚)와 물(水)에 비유한데서 유래.

 

- 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 : 제월광풍은 ‘비갠 뒤의 맑은 달빛과 맑은 바람’이라는 뜻으로

흔히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고 더 많이 일컬어진다.

이는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시원하고 깨끗한 인품을 형용하는 말로 쓰이는데

북송의 황정견이 주돈이(염계)를 존경하여 일컬은데서 더욱 유명해진 말이다.

 

(5) 관람정(觀覽亭) 일대

- ‘관람(觀覽)’은 ‘닻줄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뱃놀이를 구경하고자 한다는 뜻

- 존덕정(尊德亭)

- 승재정(勝在亭) : ‘빼어난 경치가 있는’ 정자라는 뜻

- 폄우사(砭愚榭) : ‘어리석은 자에게 돌침을 놓아 깨우쳐 경계한다’는 뜻.

북송의 장재(張載=장횡거張橫渠)가

글을 가르치던 서원의 동쪽 창문에 ‘어리석음을 고친다’라는 뜻의 ‘폄우(砭愚)’,

그리고 서쪽 창문에는 ‘아둔함을 고친다’는 뜻의 ‘정완(訂頑)’을 붙여놓고 좌우명으로 삼았던 데서 유래.

그런데 후에 정자(程子)가 ‘동명(東銘)’, ‘서명(西銘)’이라 고쳤다.

 

(6) 옥류천(玉流川) 일대

- ‘옥 같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라는 뜻의 옥류천 바위에는 숙종의 어제시가 있다.

 

飛流三百尺 비류삼백척 : 삼백척 높이에서 날아 흐르니

遙落九天來 요락구천래 : 저 멀리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듯

看是白虹起 간시백홍기 : 바라볼 땐 흰 무지개 일어나더니

飜成萬壑雷 번성만학뢰 : 갑자기 온 골짜기 우레 소리 이루었네.

 

- 취규정(聚奎亭) : ‘별들이 규성(奎星) 즉 28수의 하나로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별로 모여든다’는 뜻

- 소요정(逍遙亭) : ‘구속 없이 천천히 노닌다’는 의미의 소요정은 <장자> 소요유(逍遙遊)에서 유래한 말로,

순 임금이 은자인 선권(善卷)에게 천하를 양위하려 하자

선권이 “나는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면서 천지의 사이에서 천천히 노닐며

마음에 품은 바를 즐기겠다(日出而作 日入而息. 逍遙於天地之間 而心意自得).”라고 대답하였다.

- 청의정(淸漪亭) : ‘맑은 물결’ 또는 ‘물이 맑은’ 정자라는 뜻으로 <시경>에서 인용.

 

(7) 연경당(演慶堂) 일대

-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거행하기 위해 1828년 경에 창건되었다.

‘연경(演慶)’은 ‘경사(慶事)가 널리 퍼진다’는 뜻으로

여기서 ‘연(演)’자는 ‘늘이다(延)’ ‘널리 펴다’는 뜻으로 사용.

 

- 연경당은 속칭 궁궐 안의 99칸 집으로 유명하지만

순종대에 간행된 <궁궐지>에 따르면 실제로는 120칸이다. 고종 때인 1865년에 중건

 

- 효명세자는 ‘조선조 궁중 정재(呈才)의 황금기’를 이룬 문화 세자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말복, “춤을 사랑한 조선의 왕” <효명세자 연구> 2005. 20)

 

효명세자는 자신의 대리청정기간 동안에 30여 편에 조금 못미치는 정재를 창작했는데,

이것은 조선조 말까지 전해지는 정재의 수가 53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대단한 음악적 성과라 하겠다.

그는 궁중연향에 쓰일 궁중춤을 위해 20여 종의 궁중 정재들을 새롭게 직접 예제(睿製)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전해 내려오던 다수의 정재들의 가사와 내용을 격조있게 다듬어 재창작하였다.

한마디로 연경당은 백성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건물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공연세트장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 李白의 시 ‘산중답속인(山中答俗人) : 세상사람들에게 답하노니’

問余何事棲碧山 고? : 어찌하여 푸른 산에 사는가 묻거니,

笑而不答心自閑 이라. : 대답 않고 미소만 머금으니 마음이 절로 한가로워지네.

桃花流水杳然去 하니, : 복숭아꽃 물 위에 아득히 흘러가니,

別有天地非人間 이라. : 여기는 인간세상 아닌 별천지일세.

 

(8) 인정전과 선정전

- 인정전(仁政殿) :

<맹자>에는 ‘인정(仁政)’이란 용어가 10군데 걸쳐 나오는데

공자의 예치주의(禮治主義)를 넘어선 덕치주의(德治主義)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 선정전(善政殿) :

원래 이곳의 이름은 ‘임금에게 정무를 아뢰는 청사’라는 뜻의 ‘조계청(朝啓廳)’이었는데

1461년(세조 7) 12월에 ‘선정전(善政殿)’으로 개명

‘선정(善政)’이란 ‘정치와 교화를[정교政敎] 널리 떨친다[선양宣揚]’는 뜻임.

 

- 집희(緝熙) : ‘계속하여 밝게 빛난다’는 의미로 <시경> 대아 문왕편에서 온 말.

 

- 자시문(資始門) :

‘자시(資始)’는 ‘만물이 힘입어 비롯된다’는 뜻으로 <주역>에서 나온 말인데,

“자시의 ‘始는 氣의 시작이고, 生은 形의 시작’이다(始者 氣之始 生者 形之始).”

 

 

- 2010년 5월2일 박현모(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 연구실장)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