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송논쟁(禮訟論爭)
백성의 실생활과 무관한 공리공론 …
“장자(長子)를 위해서는 상하 구분 없이 삼년복을 입으며 임금을 위해서는 동성 · 이성의 친척 모두가 참최(斬衰 · 아버지나 할아버지 상에 입는 복장)를 입는다. 왕조례와 사대부례는 다르며(王士不同禮), 대통을 이은 군주라면 곧 그에게 종통과 적통이 돌아가므로 그를 장자로 간주하여 참최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 (‘연려실기술’ 권 31, 현종조 고사본말 기해년 자의대비 복제)
그러나 송시열의 견해는 달랐다. 그는 “효종은 ‘서자가 뒤를 이었을 경우’로 체이부정(體而不正)이 되므로 기년복(1년복)이 적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서자를 첩자가 아닌 중자(衆子 · 적장자를 제외한 적처소생)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1차 예송논쟁인 기해예송(己亥禮訟)이 이렇게 발발했고, 서인의 기년설이 채택돼 서인들이 계속 집권했다.
송시열 지지파인 서인들과 윤휴 · 허목 지지파인 남인들의 의론이 분분한 가운데 현종은 하는 수 없이 예론 시비에 결말을 짓지 못하고 금지령만 내렸다. 현종은 “예송에 관한 유생들의 반대 · 지지 상소가 있을 시 과거에 응시 못하게 하는 벌칙을 내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죽자 기해예송은 일단락됐다.
송자(宋子) vs 개 이름, 극명한 대조
한동안 잠잠한 듯했던 예송논쟁은 효종이 죽은 지 15년 만인 현종 15년(1674) 2월23일에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재연됐다.
1차 예송논쟁 발단 주인공인 조대비의 상복이 또다시 문제가 됐다. 대왕대비에게 인선왕후는 과연 ‘장자부(長子婦)인가, 중자부(衆子婦)인가’가 대두됐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불가피하게 효종이 장자인지 중자인지를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됐다. 1차 예송논쟁 때의 결정은 이제 더 이상 최선책이 될 수 없었다.
당시 서인 쪽에서는 1차 예송논쟁 때와 같이 중자부로 다루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복)을 주장했고, 남인들은 장자부로 다루어 기년설을 주장했다. 이것이 2차 예송논쟁인 갑인예송(甲寅禮訟)이다. 이 갑인예송에서 조대비의 복제는 기년상으로 정해지고 정권은 허적(許積)을 비롯한 남인에게 넘어가 서인과 남인의 운명이 뒤바뀌었다.
그 후 조야에서 송시열은 송자(宋子)로 일컬어졌고 당시 산림의 중론에 따라 정조대에 ‘송자대전(宋子大典)’이 간행됐다. 현존하는 문집 중 ‘자(子)’가 붙은 것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이 영조 29년(1753)에 엮은 퇴계 이황의 문집인 ‘이자수어(李子粹語)’와 ‘송자대전’인데 이로써 송시열은 주희와 동일선상에 놓여 현자(賢子)의 반열에 들게 됐다.
실로 그는 학자로서 최고의 명예인 문묘에 모셔졌을 뿐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최대의 명예인, 그가 섬기던 효종의 묘(廟)에 배향되는 영광을 얻었고, 조야에 걸쳐 ‘대로(大老)’라는 극존칭도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성과 달리 낙동강 동쪽 경상좌도 안동지방에서는 송시열을 송자가 아닌 견명(犬名)인 ‘시열아’라고 호칭해 실로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조선시대 예송논쟁은 지배층에게는 예치(禮治)가 행해지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성리학 이념 논쟁이었지만, 대다수 백성에게는 실생활과 무관한 공리공론에 불과했다.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 주간동아, 2010.03.09 726호(p74~75) [이영철 교수의 5분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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