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옛길에서 만난 사람 영산포, 영산포 사람들

Gijuzzang Dream 2010. 2. 20. 01:27

 

 

 

 

 

 옛길에서 만난 사람 영산포, 영산포 사람들

 

 

 

강물 곁에 누워 늘 같이 흐르고

“배가 들어/ 멸치젓 향내에/ 읍내의 바람이 다디달 때/ 누님은 영산포를 떠나며/ 울었다.//

가난은/ 강물 곁에 누워/ 늘 같이 흐르고/

개나리꽃처럼 여윈 누님과 나는/ 청무우를 먹으며/ 강둑에 잡풀로 넘어지곤 했지.//

빈손의 설움 속에/ 어머니는 묻히시고/

열여섯 나이로/ 토종개처럼 열심이던 누님은/ 호남선을 오르며 울었다.//

강물이 되는 숨죽인 슬픔/ 강으로 오는 눈물의 소금기는 쌓여/ 강심을 높이고/

황시리젓배는 곧 들지 않았다.//

포구가 막히고부터/ 누님은 입술과 살을 팔았을까/

천한 몸의 아픔, 그 부끄럽지 않은 죄가/ 그리운 고향, 꿈의 하행선을 막았을까/ 누님은 오지 않았다/

잔칫날도 큰집의 제삿날도/ 누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들은 비워지고/ 강은 바람으로 들어찰 때/ 갈꽃이 쓰러진 젖은 창의/ 얼굴이었지/

십년 세월에 살며시 아버님을 뵙고/ 오래도록 소리 죽일 때/ 누님은 그냥 강물로 흐르는 것 /같았지.//

버려진 선창을 바라보며/ 누님은/ 남자와 살다가 그만 멀어졌다고/ 말했지.//

갈꽃이 쓰러진 얼굴로/ 영산강을 걷다가 누님은/ 어둠에 그냥 강물이 되었지/

강물이 되어 호남선을 오르며/ 파도처럼 산불처럼/ 흐느끼며 울었지.” - 나해철 '영산포 1'


영산포 활력 되찾아 준 홍어

홍어삼합

 

영산포의 본디 옛길은 물길이었다.

목포쯤에서 바다에 몸을 섞는 영산강의 물을 거슬러

내륙 깊숙이 나주 땅에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뱃길이었다. 영산포의 삶 역시 그 물길에서 비롯했다.

고려 공민왕 때 왜구의 잦은 출몰로 골머리를 앓던 조정은 약탈 대상이던 흑산도 앞섬 영산도 주민들을

이곳에 강제 이주시키고 섬을 비워 두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취했다.

그들이 정착해 살던 곳은 고향의 이름을 따 영산현이 됐고,

나중에는 그들이 거슬러온 강의 이름까지 차지했다.

조선 초기에 영산창(榮山倉)이 들어서기도 한 영산포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에 의해서다.

1900년대 초부터 영산포에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빠른 속도로 상권을 장악해 나갔다.

일제가 주목한 것은 호남의 곡창 나주평야와 영산강 수로였다.

영산포는 영산강 수운의 요지로 수탈 창구로서 적격이었다. 그들은 영산포 일대에 주거와 상가를 형성하고

가장 먼저 영산강 유역의 최대 출곡지인 영산포의 쌀 시세를 재빨리 목포의 자국 상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우편소를 개설했다. 뒤이어 다리가 놓이고, 등대가 세워지고,

호남선 철도의 개통과 함께 영산포역이 들어서면서 영산포는 교통의 결절지로 급부상했다.

번성하던 영산포가 쇠락하기 시작한 것은 영산강 뱃길이 끊기면서였다.

1972년부터 영산강 유역 종합개발사업이 시작되면서 가뭄과 홍수 피해를 막고 농경지를 늘린다는

명분 아래 하구에 댐이 축조되고, 이로 인해 1977년 영산강의 수운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면서

영산포 역시 포구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그에 따라 포구에 기대 살던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하나 둘 떠나갔으며,

영산포는 한때 인구가 가장 많이 줄어든 곳으로까지 전락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가뜩이나 수요와 역할이 줄어들던 영산포역이 호남선 직선화로 인해

옛 나주역과 영산포역 사이에 들어선 새로운 나주역에 통합 폐쇄됐고,

덩달아 전남 남부지역 주민들을 영산포역으로 이어주던 영산포 버스터미널마저 급격히 쇠퇴했다.

목포수산 이정남 · 장관순 부부


 

영산포의 명맥을 그나마 잇고 있는 것은 남도 음식문화의 신화 ‘삭힌 홍어’다.

흑산도 인근에서 이주해 온 영산 주민들은 비록 낯선 땅으로 떠밀려 오기는 했지만

고향의 물리(物利)까지 두고 올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몰래 조류와 물때에 밝은 흑산도 근해까지 가서 홍어를 잡았다. 찰진 고기 맛 때문이겠지만

잡힌 홍어는 달포씩 걸리는 영산강 뱃길을 따라 올라오면서 애석하게도 푹 삭았다.

그렇지만 차마 아까운 고기를 버릴 수 없었던 사람들의 절박은 마침내 애물을 별미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그 엽기적인 맛은 어느덧 남도의 잔칫상을 점령하더니

냄새만큼이나 지독한 전염력으로 기어이 숱한 술꾼들의 입맛까지도 사로잡았다.

영산강이 막히면서 영산포가 쇠락하고, 흑산도에서 홍어가 자취를 감추면서 영산포 홍어시장이 쇠락했다.

그렇게 부침 속에서 쇠락을 거듭하던 영산포에 아연 활력을 되찾아 준 것도 홍어였다.

이번의 홍어들은 흑산도 인근보다 훨씬 먼 바다에서 왔다. 그들이 온 곳은 칠레 같은 낯선 나라이고,

과거처럼 영산강 하구인 목포가 아니라 영산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낙동강 하구의 부산을 통해서였다.

어쨌든 숙성 홍어의 태생지로서 영산포 홍어의 명성은 보란 듯이 부활했고,

영산포 일대에는 ‘홍어의 거리’까지 생겨났다.

현재 전국에서 유통되는 홍어의 70%는 영산포를 거쳐 나간다.


번성했던 흔적 고즈넉이 내려앉아


홍어의 거리 한쪽에 자리한 목포수산의 주인 이정남씨(61)는 영암이 고향이다.

영산포에 배가 드나들 때 이곳에 흘러들어와 배에서 부려진 홍어 등짐을 나르는 일로 시작해

평생을 홍어와 함께 살아왔다. 그야말로 ‘흥신 흥신’하던 시절의 그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홍어가 ‘전국구’가 되면서 ‘그럭저럭 벌어먹고’ 산다.

어로 키운 자식들이 별 탈 없이 성장해 딸은 나주어린이집 교사로 있고, 아들은 목포에서 대학에 다닌다.

이씨가 주로 취급하는 홍어는 아르헨티나산 ‘아폴로’다. 

흑산도 홍어에는 따를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제법 찰지고 무게도 너끈해 찾는 이가 많다고 한다.

영산포역


 

“어딘가로 가려던 길은 아니었으나/ 내 지금 소슬했던 철길을/ 무연히 건너보는 것이다/

내 청춘의 모둠발로도 다 건너지 못했을/ 마악 숨 터 오는 꽃잎 같이/ 분분해지고 말던 발길들/

아니 하루쯤 오면가면 하다가/ 조약돌 하나마다 그예 따뜻해지고 말면/ 재촉할 일 없이/ 기차는 가고/

독약 같은 쓸쓸함으로 소쩍새는/ 소쩌꿍 소쩌꿍 하여주면/ 한 평생이 흐르도록 그러이 앉았다가/

어느 생에선가 또 오르고 내리는 일처럼/ 그만 정적 끝에선 이승을 건너듯/ 서녘 하늘을 한번 굽어보고 /

내 비원으로 기러기 한 마리/ 그렇게 손사래처럼 날려보는 것인데/

그렇게 나란한 것이리니/ 그렇게 만나는 것이리니/

이젠 보따리 싸매고 오던가던 사람들/ 강 건너 타관객지 드난살이/ 그 헐렁헐렁했던 꿈들이여,/

이제 기차는 가고 / 녹슨 그 시간 속으로/ 과꽃 몇 송이 문득 에돌아 오는 기차여,/

이 그리움으로 범람하여 무엇을 덮을 것인가,/ 먼 여행길에서.”
- 조용한 ‘영산포역’


예전엔 나주역보다 ‘더 잘나가던’ 영산포역은 폐역이 된 뒤

한때 역 자리에 철도박물관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끝내 무산됐다.

지금은 전시용 증기기관차만이 덩그맣게 놓여 있다.

한산한 역전거리 ‘전일고무신’이란 간판을 단 신발가게에 두 할머니가 미닫이창 쪽으로 등을 기댄 채

해바라기하고 있다. 박순덕 할머니(76)는 주인이고 이금자 할머니(63)는 이웃에서 말벗이 되어 주러 왔다.

하루 종일 가게를 보고 앉아 있기는 하지만 일주일에 한두 켤레 팔기도 쉽지 않다.

“치워 볼라고 해도 재고 땀시 치울 수도 없고” 막상 ‘전방’을 내놓는다 해도 쉬 나갈 턱이 없다.

박 할머니는 슬하에 네 남매를 두었다. 다들 성가해 서울에서도 살고 광주에서도 산다.

‘설 때는 다들 내려오겠네요’했더니 “길 막히고 그라는데 뭐…”하며 말끝을 흐리더니

다시 창 쪽으로 등을 대고 돌아앉는다.


영산포 뱃길 복원은 가능할까


영산동 일대에는 번성한 시절의 흔적들이 고즈넉이 내려앉아 있다.

오래된 일본식 건물들이나 여인숙거리, 몇 남은 기름집 등이 지난날 술집과 여관이 늘어서고

정미소가 열댓 군데나 되던 영산포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예전에 죽집들이 늘어서 있었다는 죽전골목에는 기름집 두 곳이 남아 있다.

떡도 뽑고 고추도 빻는 ‘선창’의 주인 이상을씨(54)는 8년 전에 매형의 가게를 물려받았다.

잔등길과 희망참기름


 

“한창 때는 이 일대에만 정미소가 10곳이 넘었어요. 그때는 정말 훈짐 났죠.”
골목의 끝은 이른바 ‘잔등길’로 불리는 언덕길이다. 그 끄트머리쯤 ‘희망’ 참기름집이 있다.

주인인 이희옥 할아버지(85)는 52년째 기름집을 해 오고 있다. 3남 3녀의 자녀들은 모두 대처로 나가 살고,

부인과 함께 소일 삼아 기름 짜는 일을 계속한다. 이 집은 동네 노인들의 사랑방이다.

더울 때는 언덕바지에 있어 제법 선선한 가게 앞에 나앉아 바람을 쐬고,

추울 때는 부뚜막방에 몰려 앉아 화투를 친다.

여든이 넘은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정정한 이 할아버지를 두고 ‘화투친구’는

“이 영감이 기름을 많이 먹어 여직 뺀질하당께”하며 슬며시 핀잔을 놓는다.

잔등길 너머에는 대여섯의 여인숙들이 몰려 있다.

‘금성여인숙’ 종업원으로 있는 이수연씨(50)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이 고향이다.

어려서부터 봉재 일을 배워 한때 ‘잘나가던 봉재공장 사장’이었다.

그러다가 동업하던 친구가 ‘돈을 다 털어 내빼는 바람’에

그를 찾아 방방곡곡을 떠돌다 광주를 거쳐 6년 전 영산포에 눌러앉았다.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었던 이 씨는 여인숙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소위 ‘조바’(잔심부름) 일을 한다.

숙박비라야 고작 1만원밖에 안 받지만 공치는 날이 허다하니 하루 막걸리 값조차 벅차기만 하다.

명절이 돌아온들 어차피 돈도 없고 부모님도 다 돌아가셨으니 고향에 갈 일도 없고

광주에 있는 ‘남자’에게나 다녀올 작정이다.


“아직 서울 발 고속버스 시간은 한 시간 넘게 남아 있었다.

영산포 시외버스 터미날엔 늦겨울 찬바람이 이미 한바탕 지나가던 참이었다.

뼁끼칠이 퍼렇게 벗겨진 의상실 플라스틱 간판이 순간 몇 번 흔들렸다.

몇 몇, 바람을 피해 날선 세멘트 불럭 담 쪽으로 웅크리고 서있는 사람들의 내력을 뻔히 알면서도

양철 연통이 밖으로 드러난 영산포다방 문을 밀쳤다.

가슴 패인 까만드레스가 암갈색 사기잔에 쪼르르 보리차를 따른다.

스멀거리는 수증기 사이로 흑백 티비에서 돌주먹 김태식의 어퍼컷이 작렬하고.

와아 와아, 머리 벗겨진 중늙은이가 연짱 소리를 지르자

가슴 패인 까만드레스가 그이의 가슴에 슬몃 안기며 눈을 흘긴다.

나는 보았다. 흥부놀부 놀이하다가 놀부 박에서 냉큼 나와 귀신춤을 추던 그녀를.

저어 혹시 고향이 강진 성전 아니신가요? 오메메 으째야 쓰까잉 아닌디잉.

공중전화 수화기를 올려놓고 돌아서려는데 검표원놈이 승차를 채근하며 소리친다.

서울 갈라먼 가고 말라먼 말드라고.”
-윤창식 ‘영산포연가-기다리는 차는 오지 않고’


 

영산포 터미널


 

영산포의 쇠락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것이 바로 영산포 버스터미널이었다.

터미널의 운명 또한 영산포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산포 버스터미널은 지금까지 세 번 자리를 옮겼다. 선창에 배가 들던 시절에

중앙동 영생당 약방 앞에 자리 잡았던 버스정류장 일대는 나주 상권의 노른자위였다.

비록 재래식 화장실에다 유개(有蓋)시설마저 없어 비만 오면 상점 처마 밑으로 피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항상 승객과 상인들이 뒤섞여 북적였고,

그런 무질서와 혼잡이 조용한 시골로서는 오히려 번화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렇지만 1970년대의 대흥동 장승백이 시절을 거쳐 1990년대 초반에 지금의 이창동으로 이전하면서

제대로 현대화된 시설을 갖췄지만 영산포 터미널은 오히려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농촌지역 인구의 감소, 개인 교통수단 발달과 함께 영산포역이 폐쇄되면서

이용객이 현저히 줄어든 탓이다. 현재 영산포 터미널은 장기적인 경영 악화에 시달리고 있으며,

주변 상권 역시 덩달아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영산포 지역의 뱃길 복원 열기가 뜨겁다.

‘영산강 뱃길을 열어 남도의 번영을 앞당기자’는 범시민 촉구결의대회를 열기까지 했다.

‘4대강 개발’과 맞물려 2, 3년 뒤엔 목포와 영산포 사이의 70㎞ 뱃길이 열릴 것이라고도 한다.

과연 뱃길 복원이 가능한지, 설령 뱃길을 복원한다 해서 당장 번영이 가능할지는 알 수 없다.

그보다 뱃길 복원의 의지가 당장의 이익 때문만은 아닌지 자못 궁금해진다.

지금 복원을 필요로 하는 것은 ‘물리적 뱃길’이 아니라 ‘정신적 뱃길’이다.

모두가 번영에만 매달려 정신없이 강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에도 묵묵히 강물 곁에 누워 늘 함께 흐르던

그 어떤 것을 되찾는 일이다.


- 글 · 사진 유성문 여행작가
rotack@lycos.co.kr
- 2010 02/16/ 위클리경향  863호ⓒ & 경향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