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와우아파트 도괴사건

Gijuzzang Dream 2010. 1. 24. 07:13

 

 

 

 

 와우아파트 도괴사건은 부실 공사의 상징

 

 

ㆍ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ㆍ1960~1970년대가 만든 압축적 근대화의 그

 
 

1960~197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는 오늘날 한국사회가 이룬 경제성장의 기틀이기도 하지만

또한 ‘빨리빨리’로 상징되는 압축적 근대화 과정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도 하다.
전태일 분신과 같은 해인 1970년에 발생한 와우아파트 도괴사건은

1990년대 발생한 성수대교, 삼풍아파트 붕괴 같은 대형참사의 출발점으로 볼 수도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교수가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아파트 도괴사고 현장을 찾아
이 사건이 한국사회에 던진 파장을 돌아보았다. <편집자 주>

 

 

1970년에 도괴된 와우아파트가 서 있던 자리.

지금은 생활체육공원이 들어서 있다.

와우아파트 도괴 현장에 복구작업을 벌이는 사람들. 짓다가 만 아침밥이 들어 있는 깨진 솥단지가 눈에 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선배로부터 박정희 시대 언젠가에 ‘와우 아파트 사건’이라는 사건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왜 하필 이름이 ‘와우’일까.
갑자기 아파트가 무너져서 너무 놀라 ‘와우’라는 감탄사가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소가 자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해서 우면산이 있듯이 소가 누운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와우산이라 이름을 붙였고, 그 중턱에 지은 아파트의 이름이 와우였다.

신촌 오거리에서 홍익대 쪽으로 가다가 왼쪽에 있는 와우아파트의 터는
이미 아파트를 짓기 전부터 문제를 일으켰다.
사고가 나기 6개월 전인 1969년 7월 아파트가 착공된 공사장에 토사가 밀려들어가
인근 70여 가구 주민들이 대책을 세워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당국이 묵살한 것.
사흘이 지난 8월 2일 새벽에 또 다른 ‘시민’ 아파트를 짓는 공사장인
서대문구 냉천동 금화아파트 공사장에서 토사가 밀려들어 잠자던 3남매가 깔려 숨지는 사건도 일어났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당시 신문들은 “시 당국은 금년에 400동의 시민아파트를 짓기로 했으나 김현옥 시장이 뒤늦게
연내 800동을 짓도록 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무리하게 공사를 진행”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피해에 대해 서울시 당국은 이 피해가 공사장의 관리 소홀로 빚어진 것이 아니라
“사고 현장 주민들의 자발적인 수방 대책이 없어서 빚어진 것이라고 발뺌”하였다.
 

무리한 공사 진행이 빚은 어처구니없는 참사

더 한심한 일은 사고가 나기 나흘 전에 무너진 15동 건물의 옆에 있던 14동 건물의 벽에 갑자기 금이 가자
시 당국이 사고가 난 15동 건물로 주민들을 옮기기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14동의 주민을 15동으로 옮기면서 시 당국은 완전 합격된 이상 없는 건물이라고 장담했고,
14동 건물을 보수하면서도 15동 건물에 대해서는 손도 대지 않았다.
준공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때의 상황이었다.

1970년 4월 와우아파트가 무너졌을 때 공사장 관리 소홀에 대해 붕괴된 15동으로 옮겨와 피해를 본
와우산 일대 주민과 와우아파트 거주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1970년 4월 8일 마포구 창전동 6 일대에 서 있던 와우아파트 가운데 1개 동이 성냥갑처럼
폭삭 주저앉았다. 새벽에 5층 규모의 아파트 1동이 무너지면서 32명의 압사자를 냈다.
정부의 조사가 있었고, 국회의 조사가 이어졌다.
설계가 잘못됐다는 진단에서부터 싼 공사비를 이유로 재하청 부실 기업이 철근, 시멘트 등
건설자재를 제대로 사용치 않은 것이 주원인이었다는 등 다양한 원인 진단이 있었다.
결론은 총체적인 부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와우아파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시민 아파트 건설은 당시 서울시장인 김현옥씨가 1968년 12월 판잣집 등 불량건축물 정리와
변두리로의 인구 분산을 위해 3년 계획으로 판자촌지구 40곳 78만평에 아파트 2000동을 지어
무주택자 13만 가구를 수용하겠다고 발표한 뒤 본격화됐다.
‘불도저’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던 김씨가 도시 재개발의 명분 아래 밀어붙인 것이다.

사후 처리는 어떻게 됐을까.
이 사고로 마포구청장 등 관련 공무원 4명과 시공업자 1명 등 5명이 구속됐고,
서울시장도 사고 8일 만에 김씨에서 경북지사 양탁식씨로 전격 교체됐다.
불도저 같은 무리한 의욕이 날림 공사와 어처구니없는 대형 참사를 부른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서울시내 32개 지구 406개 동의 시민 아파트에 대한 일제 안전진단 결과
61개 동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와우아파트 도괴(倒壞)사건의 사망자 가족을 위한 유족 아파트가 건설되기도 했다.
사고 직후 서둘러 합동위령제를 지낸 뒤 유족을 위한 새로운 아파트 기공식이 있었다.
기공식은 1970년 8월 4일 영등포구 당산동에서 오전 10시에 있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집 잃은 16가구 유족들의 생계대책으로 2400만원의 예산으로
2층 건물 2개 동을 짓기로 결정됐으며, 가구당 15평 크기로 11월 11일을 준공 기일로 잡았다.
더 이상의 악몽이 없도록 하기 위해 2층 건물을 계획한 것이었을까.


책임자 처벌 흐지부지… 위험 축대는 계속 남아

 

와우아파트 도괴 현장은 체육시설 등이 있는 근린공원이 되어 있다.


유족들에 대한 대책이 이후에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 수 없지만
책임자에 대한 처벌은 그다지 철저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분명 계획, 관리, 공사 상의 책임 등이 물어져야 했지만
재판 결과는 관리 책임자인 마포구청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971년 5월 25일자로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마포구의 건축과장과 건축과 기사보, 하청업자에게만 4년 이상의 중형이 선고됐다.
‘시민’ 아파트를 밀어붙여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 서울시장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오히려 김현옥씨는 1971년 10월 내무부장관으로 기용돼 1973년 12월까지 유신초기를 화려하게 맞이했다.
 
와우 지구 시민 아파트 제1공구에 6695만원을 책정했다가
20%가 넘는 1475만원이 삭감된 5220만원만으로 건설 하청을 준 서울시와 마포구의 최고 책임자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은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밑에 있는 사람들이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은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이런 관례는 조폭 사이에서나 있는 건데,
그나마 현장 부감독으로 일하다 직위 해제된 서울시 공무원 2명이 10년이 지난 1980년 5월에 가서야
무죄 확정 판결을 받고 복직된 것은 다행이라 할까.

그러면 더 이상의 사고가 없도록 안전진단은 철저하게 이뤄진 것이었을까.
일단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시민’ 아파트를 ‘시영’ 아파트로 이름을 고치는 데는 성공했다.
사고가 발생한 지 3개월도 안돼 와우 아파트의 다동 높이 3m, 길이 10m의 축대가 무너졌다.
주민들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1984년에 또 사고가 있었다. 2동 뒤편 와우산 일부가 폭우로 무너져 내리면서 204호와 205호를 덮쳤다.
이 사고로 2명이 숨지고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3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음에도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축대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어쩌면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지점에 아파트를 건설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기술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에 따라 1991년 시영아파트를 철거할 때
축대가 있는 위험한 지역의 아파트를 먼저 서둘러 철거한 것이다.

와우근린공원 종합안내도 앞에서 현장을 둘러보고 있는 박태균 교수.


1970년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실정을 외면한 공사비 책정으로
서울시가 건립한 시민아파트 406개 동을 비롯해 육교(40개), 지하도(21개), 고가고속도로(3개),
교량(20개) 등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오죽하면 삼일고가도로 철거 때 도시 미관과 청계천 복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실 시공으로 인한 고가도로 붕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철거한다는 소문이 돌았을까.

압축적 근대화는 우리 사회에 많은 부작용을 가져왔다.
근대화, 산업화를 빨리 이룬 것이 한국 현대사의 자랑이자
세계에서 한국이 하나의 롤 모델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압축적 근대화는
우리 사회에 안전 불감증과 함께 성과 우선주의를 가져다주었다.
와우아파트 사고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지만
한국은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개발 연대의 상징적 사건으로 기억돼

와우 아파트 사건은 개발 연대에 발생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농과 도시빈민 문제, 도시 재개발 문제 등 다양한 사건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지만
이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무시한 채 진행된 발전 국가의 밀어붙이기식 정책이었다.
그리고 이 정책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1971년 12월 대연각 빌딩 화재는 세계 최악의 화재 사건으로서 영화 <타워링>의 배경이 됐다고도 한다.
1972년 12월에는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서울시민회관에서 발생한 화재사고로
51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00여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1974년의 대왕코너 화재사건으로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에도 이리역 폭발사고(1977년), 대아호텔 화재사고(1984년), 극동호 유람선 화재사고(1987년) 등이
터졌다. 급기야 1990년대 이후 사상자 수가 200명을 훌쩍 넘긴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1993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1995년), 대구지하철 공사장 폭발사고(1995년), 대구지하철 방화사고(2003년)로
이어졌다.

문제는 이러한 사고 대부분이 시공 과정에서의 부실시공, 사후 관리 소홀, 안전 수칙 무시 등으로 인해
발생한 ‘인재’라는 점이다.
즉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사고였다. 이 점이 피해자 가족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사고들이 발생함에도 악순환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고 직후에 안전과 관련한 여러 조치가 잠시 강화되다가 이는 곧 대형사고로 이어지곤 하는 것이다.
인간들이 한 세대도 지나기 전 다시 전쟁을 하는 이유가 인간의 ‘멍청함’과 ‘망각’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압축적 근대화로 인해 한국 사회에 연착륙한 안전 불감증은 언제쯤이면 고칠 수 있을까?
 

추모비 없이 지금은 공원과 체육시설로 자리잡아

40년이 지나 다시 찾은 와우아파트 자리에는 공원과 체육시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공원에서는 시민들의 기념식수비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무너진 와우아파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희생자를 위한 추모비도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땅값 때문에,
보상 문제 때문에 무리하게 또 다른 아파트를 짓지 않고
그 자리를 시민들의 문화와 휴식 공간으로 돌려주었다는 것이 마음 한 편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공원에 들어선 시민기념식수.

시민들이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와우아파트는 우리에게 부실 공사의 대명사가 됐다.
그리고 대형 사고가 있을 때마다 와우아파트가 인구에 회자되곤 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1991년 12월 25일자 경향신문은 와우아파트 사고가
단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부실시공이 끝내는 사람 목숨까지 앗아갔다.
최근 경기도 성남시 시영아파트에서 발생한 도시가스의 배기관 유출로 인한 중독사망 사고는
올해 새로 지은 아파트들이 얼마나 날림집인가를 극명하게 보여 준 것이다.
얼마나 건성으로 지었기에 입주하자마자 사람이 세 명씩이나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을까.

부실공사와 날림공사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입주 첫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전에 없는 일이다. 물론 이번 사고는 와우 아파트처럼 아파트 자체가 무너져내린 것이 아니라
도시가스배관 하청업체의 시공 잘못이라곤 하지만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분당 신도시를 비롯한 전국 곳곳의 신축 아파트들이
벽체가 갈라지고 천장에서 물이 새는 등 온통 부실 투성이라는 원성이 자자한 판국이다.
이 모두가 단기간에 엄청난 양의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서 벌어진 결과이지만
이로 인해 피해를 본 입주자는 분통이 터질 일이다.” (이상 경향신문 1991년 12월 25일자에서 발췌)

-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사진 · 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 2010 01/26   위클리경향 86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