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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고차(記里鼓車)’로 온양 온천까지의 거리를 재다

Gijuzzang Dream 2010. 1. 17. 03:59

 

 

 

 

 

‘기리고차(記里鼓車)’로 온양 온천까지의 거리를 재다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있는

'연서역터' 표석 

 

 

서울 은평구 예일여고 사거리에서 역촌 오거리 방향으로 100m쯤 걷다보면 왼쪽 인도에 ‘연서역터(延曙驛址)’라는 표석 하나가 나타난다. 거기에는 ‘조선시대 서울을 왕래하는 공무 여행자에게 말(馬)과 숙식을 제공하는 역터’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이 연서역은 조선시대 때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기 전 머무는 영빈관으로 이용되었으며, 왕의 행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광해군을 내쫓고 보위에 오른 인조는 반정 때 바로 이곳까지 나아가 이서(李曙)의 군사를 맞이하였다.

때문에 <인조실록>의 첫 기사에 의하면 사람들이 이곳을 기이한 ‘예언의 장소’로 여기기도 했다고 적혀 있다.

조선시대에는 연서역과 같은 역(驛)이 전국적으로 530여 개 정도 있어서

국가의 행정 명령을 신속히 전달하는 시스템으로 이용되었다.

또 이를 통해 공용 물자를 수송했으며 변방의 군대 동정과 민심을 파악하기도 했다.

전국의 각 역에 종사하는 인원을 다 합치면 13만2천명 정도에다 말의 수는 약 5천여 필에 이르렀다.

공문서를 전달하는 역졸을 ‘파발아(擺撥兒)’라고 했는데,

매우 급한 문서의 경우 말에 방울 3개, 그냥 중요한 문서의 경우 2개, 보통 문서의 경우 1개를 달고

달려가서 다음 역으로 전달했다.

이런 역은 약 30리마다 설치되어 있었다.

보통 ‘한참 걸었으니 조금 쉬었다 가자’고 말할 때의 한참은 바로 여기서 유래되었다.

그때는 매 30리를 1식(息)으로 정했는데, 이는 어느 정도 걸었으니 한 번 쉬자는 뜻이다.

역로에 마련되어 있던 역을 다른 말로 참(站)이라고도 했으며,

두 역 사이의 거리를 일컫는 ‘한 참’이 ‘시간이 상당히 지나는 동안’이란 뜻의 명사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조선 초기만 해도 한 참 간의 거리가 정확히 30리가 아니라 매우 들쭉날쭉했던 모양이다.

서울의 경우 임금이 사는 궁궐을 기점으로 하여

서쪽으로 연서역, 동쪽으로 평구역(平丘驛 ; 남양주 삼패동), 북쪽으로 녹양역(綠楊驛 ; 의정부 일대),

남쪽으로 양재역(良材驛) 등이 있었다.

 


한참은 원래 30리를 뜻해

이에 대해 1415년(태종 15) 12월 14일 병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계문을 태종에게 올렸다.

“돈화문(창덕궁 정문)부터 서쪽으로 영서역(迎曙驛 ; 연서역의 이전 이름)까지가 18리 194보(步)이고

그 역으로부터 숫돌고개까지가 11리 166보여서 이상이 30리인데 1식(息)이 됩니다.

돈화문부터 남쪽으로 양재역까지 25리 130보이고

그 역으로부터 장성곶이 냇가까지 4리 230보여서 이상이 30리인데 1식이 됩니다.

돈화문부터 동쪽으로 명석원 앞들까지가 30리 1식이 되고, 그 들로부터 평구역까지 3리 10보입니다.

돈화문부터 북쪽으로 광시원까지가 30리 1식이 되고, 그 광시원부터 녹양역까지 12리 130보입니다.”

즉, 연서역은

돈화문으로부터 18리, 평구역은 33리, 녹양역은 42리, 양재역은 25리의 거리에 위치해 있었던 것.

 

이처럼 각 역 간의 거리가 너무 멀거나 혹은 가까울 경우

공문을 보내거나 공물을 거둬들일 때 기한을 미리 정하기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병조에서는 각도로 하여금 주척 6척을 1보로 삼고 매 360보를 1리로 삼아

이수(里數)를 측량하여 매 10리마다 돌이나 흙을 쌓아 작은 표식을 두고

매 30리마다에는 큰 표식을 두는 것이 어떻겠냐고 건의했다.

이 표식을 후자(堠子)라고도 했는데,

10리마다 설치한 후자를 ‘소후’, 30리마다 설치한 후자를 ‘대후’라고 불렀다.

그럼 정확한 측량기구가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거리를 어떻게 측정했을까?

가장 간단한 방법은 긴 새끼줄을 이용하여 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엄청 힘들 뿐 아니라 정확성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처럼 긴 거리를 재자면 사람이 메고다녀야 할 새끼줄의 무게가 무거워

거리측정에 집중하기 어려웠을 게 뻔하다.

또 새끼줄이나 노끈의 경우 물에 젖으면 길이가 달라지므로 거리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세종 때 가만히 앉아서도 거리를 잴 수 있는 획기적인 장치가 개발되었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1441년(세종 23) 3월 17일자의 <세종실록> 내용이다.

“왕과 왕비가 온수현으로 행행하니 왕세자가 호종하고 종친과 문무 군신 50여 인이 호가하였다.

임영대군 이구, 한남군 이어로 하여금 궁을 지키게 하고,

이 뒤로부터는 종친들에게 차례로 왕래하게 하였다.

임금이 가마골에 이르러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 행차에 처음 초여(軺輿 ; 말 한 마리가 끄는 가볍고 작은 수레)를 쓰고 기리고(記里鼓)를 사용하니,

거가(車駕)가 1리를 가게 되면 목인(木人)이 스스로 북을 쳤다.”

기리고차는 수레바퀴와 연결된 3개의

톱니바퀴에 거리를 재는 비밀이

숨어 있다.  ⓒ국립과천과학관

 


기리고차는 반자동 거리 측량기

여기서 온수현은 지금의 온양으로서, 평소 종기와 눈병으로 고생했던 세종은 온천에 자주 다녔다.

그런데 이날 임금의 나들이에 등장한 수레는

1리를 갈 때마다 나무 인형이 북을 치는 매우 특별한 수레였다.

이것이 바로 조선시대에 거리를 재던 것으로 유명한 ‘기리고차(記里鼓車)’ 라는 수레였다.

기리고차는 수레바퀴와 연결된 3개의 톱니바퀴에 거리를 재는 비밀이 숨어 있다.

기리고차의 수레바퀴는 둘레가 10자[尺]인데,

이것이 12번 굴러 가면 그와 연결된 맨 밑의 톱니바퀴(하륜 ; 下輪)가 한 번 회전한다.

맨 밑의 톱니바퀴(하륜)가 한 바퀴 돌면 120자의 거리를 이동한 셈이다.

이 하륜이 15번 회전하면 가운데 바퀴인 중륜이 한 번 회전하고,

중륜이 10번 회전하면 맨 위의 상륜이 한 번 회전하게 된다.

중륜이 한 바퀴 돌면 이동한 거리가 1천800자가 되고, 상륜이 한 바퀴 돌면 1만8천 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기리고차는 0.5리를 갔을 때 종을 1번 치고, 1리를 가면 종을 2번 울리게 했다.

5리를 가면 북을 1번 울리게 하고, 10리를 갔을 때 북을 2번 울렸다.

수레 위에는 두 사람이 앉았는데, 한 사람은 수레를 끄는 말을 조종하고

다른 한 사람이 종소리와 북소리를 듣고 이수(里數)를 기록하기만 하면 거리를 측정할 수 있었다.

이를 테면 기리고차는 사람의 수고와 자동기계의 원리가 합쳐진 반자동 거리 측량기였던 셈이다.

 

 

기리고차가 만주 벌판도 누볐을까

 

기리고차는 서기 300년경 중국 진(晉)나라의 최표가 저술한 ‘고금주(古今註)’에 등장한다.

이 기리고차는 1리 갈 때마다 아래에 있는 나무인형이 북을 치고,

10리를 가면 위의 나무인형이 북을 쳤다고 한다.

또 조선 후기의 실학자 홍대용이 지은 ‘담헌서’에는

중국 후송 때인 1037년에 내시 노도융이 처음 기리고차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정황으로 볼 때 세종 때 제작된 기리고차는

앞서 발명된 중국의 것을 개량해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영국의 측량사 헨리 바이톤이 수레를 이용해 거리 측정에 성공한 것이 1728년이었으니

조선의 기리고차는 이보다 287년이나 앞섰다.

또한 일본에서도 18세기 후반 이노우 다다타카란 이가 거리를 재는 ‘양정차’를 국토 측량에 이용했다.

이 양정차의 경우 톱니바퀴를 이용한 원리는 기리고차와 같았다.

그러나 말 대신 사람이 끌어야 했으며, 종과 북 소리가 나지 않아 매우 불편했다고 한다.

기리고차는 농경사회인 조선에서 토지를 정확하게 측량해 그에 따른 합리적인 세금을 거둬들이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기리고차는 토목공사 등의 분야에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450년 10월 23일자의 ‘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경기 관찰사가 아뢰기를

‘연파곤(현 서울시 송파동)은 수세가 느리게 흐르고 또 광활하지도 않으니

삼전도(현 서울시 삼전동)의 빠르고 급하여 건너가기 어려운 것과 같지 않습니다.

청컨대 연파곤을 나루로 삼으소서’ 하니

명하여 기리고차로써 삼전도와 연파곤의 도로의 멀고 가까움을 재게 하였다.”

한편 세종 때에는 기리고차를 이용해 위도 1도의 거리를 측정하기도 했다.

위도란 지도상에서 가로선에 해당하는 것으로,

북반구와 남반구를 각각 90도로 나누어서 북위 0~90도, 남위 0~90도로 표시된다.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기술발전사’에 의하면

천문관측 기기인 간의를 이용해 지표상에서 위도 1도만큼 벌어진 두 지점을 찾아낸 다음,

기리고차로써 그 거리를 측정해 위도 1도의 길이를 알아냈다고 한다.

 

국립과천과학관에 복원 전시되어 있는 기리고차 


수학을 공부한 유일한 임금

이처럼 정교한 측정을 위해서는 기리고차의 기본 측정도구인 수레바퀴 둘레가 매우 정확해야 한다.

즉, 땅에 직접 닿아 거리를 재는 수레바퀴의 둘레 길이가 측정의 기준 단위가 되는 길이만큼

정확히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위해서는 원 둘레 길이와 그 지름의 비를 나타내는 원주율 π의 값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럼 그 당시 조선에서도 π의 값을 알고 있었을까?

원주율을 흔히 ‘아르키메데스의 수’라고도 하는데,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3세기에 정96각형을 이용해

3.14라는 소수 2자리까지의 π 값을 구했다.

그 후 5세기경 중국의 조충지는 3.141592라는 소수 6자리까지의 매우 정확한 π 값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유럽보다 무려 1천년 이상 앞선 업적이었다.

이처럼 옛날 동양은 정확한 토지 측량 및 토목공사, 관개수로 사업 등에 필요한 방정식이나

원주율 계산에서 상당히 앞서 있었다.

 

특히 세종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유일하게 수학을 공부한 임금으로 꼽힌다.
“임금이 계몽산을 배우는데, 부제학 정인지가 들어와서 모시고 질문을 기다리고 있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수(算數)를 배우는 것이 임금에게는 필요가 없을 듯하나,

이것도 성인이 제정한 것이므로 나는 이것을 알고자 한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1430년 10월 23일자)

여기서 세종이 배운 계몽산은 원나라의 주세걸이 지은 ‘산학계몽’이란 수학책으로서

곱셈, 나눗셈, 원주율, 제곱근 구하기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산학계몽은 조선시대 가장 널리 통용된 수학교과서 중 하나이며, 잡과시험 교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세종 때 제작된 기리고차에는 꽤 정확한 π 값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럼 세종이 온양 온천 행차 때 첫 시험차 끌고 간 기리고차는

과연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의 북소리를 냈을까.

현재 서울 경복궁에서 아산시 온양동까지의 거리는 약 103㎞이다.

10리가 4㎞인 점을 감안하면

그때 기리고차는 10리를 알리는 두 번의 북소리 신호를 약 25번 정도 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1리 개념은 지금과 매우 달랐다.

세종은 1430년 표준척을 제정하여 전국적으로 시행했는데, 이때 확정된 1주척은 20.81㎝ 라고 한다.

6주척을 1보(步)라 했고, 다시 300보가 되면 1리(里) 라고 했으니,

1里를 계산해보면 20.81㎝×6×300 = 374.58m 였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당시의 10리는 약 3.74㎞ 였다.

따라서 당시 세종의 온양 행차에 시험가동된 기리고차는

10리를 알리는 두 번의 북소리 신호를 27번 이상 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실측 전국지도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조선방역지도'는 동국지도의 모사본으로 추정된다. 

원래 척의 한자인 尺은 손을 펼쳐서 물건을 재는 형상에서 비롯된 상형문자이다. 따라서 1척이란 손을 폈을 때 엄지손가락 끝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다.

 

그런데 1尺의 길이는 국가와 시대에 따라 그때그때마다 다르게 적용되었다.

조선의 경우만 해도 세종 때는 20.81㎝였지만 세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대에 개정 또는 복구되면서 그 길이가 조금씩 변했다.

또한 1里의 개념도 300步를 기준으로 하다가 360보로 바뀌는 등 변화가 있었다. 더구나 '경국대전'에서 정한 조선시대의 도로 폭만 해도 도성 내에서는 영조척을 기준으로 삼고, 도성 외의 일반도로는 주척을 사용한다고 되어 있다.

'영조척'이란 조선시대에 사용되던 고유의 자로서 목공척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영조척 역시 시대에 따라 그 길이가 조금씩 달라 어느 것을 정확한 표준으로 삼아야 할지 아리송하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볼 때 조선시대의 10리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4㎞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기리고차의 도입 이후 거리측정의 정확도가 높아져 정밀한 지도제작이 활성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실측 전국지도로 알려진 '동국지도'이다.

1463년(세조 9)에 완성된 '동국지도'는 정척과 양성지가 화공을 데리고 직접 전국의 산천 형세를

조사하며 제작한 실측 지도이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전국지도를 대표하는 동국지도는

아쉽게도 현재 전해지지 않는데, 다만 그 모사본으로 여겨지는 지도가 몇 개 남아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방역지도'와 '조선팔도지도',

일본 내각문고에 보관되어 있는 '조선국회도'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현대 지도의 해안선과 거의 일치할 정도로 정확한 이 지도들은 

만주와 대마도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그 당시 지식인들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대마도의 경우 공도정책으로 일시 비워둔 사이 왜구들이 들어와 강점한 섬으로 여겼다.

또 만주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조선인들이 많이 진출해 있었기에 조선의 영토라는 인식이 있었다.

정척과 양성지가 '동국지도'를 제작할 때

혹시 만주와 대마도까지도 기리고차를 타고 누볐을까 하는 생각을 한번 해본다.

- 이성규 기자  [이야기과학실록]

- 2010년 01월 14일/ 01월 21일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