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실학

Gijuzzang Dream 2010. 1. 17. 07:11

 

 

 

 

2009년 경기문화나루 7호 PDF파일로 보기

 

 

 

1. 지금 왜 실학을 말하는가?

 

당대에 대한 치열한 고민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실학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총체적인 변화를 꾀하며 삶을 개혁하려 했던 조선시대의 일상 혁명이 실학이다.

백성의 삶을 넉넉하고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사상, 철학, 경제, 천문, 지리, 의학, 무엇이든

실학의 대상이 되었다. 실학은 18세기의 혁명적인 학문이었지만 당대에는 실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실학자들이 고민했던 숙제들은 이제 대부분 풀렸으니, 실학은 미래학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도 실학이 여전히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 편집부 / 사진 나석민

 

잔잔한 물결이 이는 팔당호반을 지나 다산유적지로 들어섰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있다.

배를 이용해 사람과 물자를 운반하던 시절, 두 개의 큰 물줄기는 교통과 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해냈다.

이 물줄기를 따라 왕실에서 쓰던 도자기를 만드는 관요가 생기고,

배에 싣고 온 물건을 파는 장이 서고, 마을이 만들어졌다.

 

이에 비해 육로의 발전은 더디고 더뎠다.

수레 하나가 지나갈 길이 없어, 각 지방의 산물이 유통되지 못했다.

 

연암은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지 못해 온갖 물화가 제자리에서 나서 제자리에서 사라지는’

취약한 유통 구조를 이용해 만 냥으로 한 가지 물품을 독점해 단숨에 십만 냥을 버는 허생 이야기로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박지원뿐 아니라 박제가, 정약용 등 수많은 실학자가 수레를 이용해

백성의 가난을 덜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주장은 실제 청나라에서 본 바에 근거했다.

북벌을 통해 청을 소탕하자는 의견이 분분할 때, 청을 배워 부국강병하자는 의견을 내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신 있는 발언은 하기도 어렵지만 사장되기도 쉽다.

그 발언이 설득력이 없다면 좌천될 각오를 해야 한다.

다산이 이곳 남양주 생가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은 그 ‘바른 말’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그 개혁에 관한 바른 말들을 버리지 못한 것은 암담한 현실 때문이었다.

 

조선 중・후기, 정치가 문란해지고 사회 기강이 흐트러지면서 발생한 여러 문제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농업의 문제였다. 백성의 대다수가 농민이어서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법에 규정된 토지 관련 세금은 몇 종류밖에 없었지만,

징수하는 과정에서 쌀을 실어 나르는 뱃삯인 선가미를 비롯해 40여 종류나 되는 세금을 내야 하니

생활이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1809년에는 가뭄과 이로 인한 기근으로 굶주린 사람들이 자식을 버리거나

심지어 사람 고기를 먹기도 했으며 콜레라, 장티푸스, 천연두 같은 전염병도 극성이라 떼죽음을 자주

목격하게 되었다고 한다.

돈푼깨나 있는 사람들은 족보를 사 양반 행세를 했고, 이도 저도 없는 사람들은 도둑이 됐다.

그것만이 세금 폭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고, 가난을 면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유가(儒家)의 세계에서는

구체적인 사물보다, 우주의 원리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학문으로 우주를 탐구할 수는 있었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무엇인가가 필요했고,

실학자들은 토지와 기술 개혁, 학문을 근대과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개의 물줄기가 만나 굵고 큰하나의 물줄기가 되듯이

다산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학문과 실용이 만나 큰 힘을 발휘하길 바랐다.

그런 바람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IT 기술 강국이 됐고, 경제 대국도 됐다.

그럼에도 다시 다산을, 실학을 생각하는 까닭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개혁하려 했던 정신이

오늘날도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학자의 개혁과 사상을 담은 실학박물관에서

실학자들의 꿈과 사상 그리고 업적을 보며, 우리 시대에 필요한 정신이 무엇인지 탐구해보는 것은 어떨까.

 

현실이 곤고해지면 실학에 대한 요구가 등장한다.

 

실학박물관에 관한 논의는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18세기 조선 사회만큼의 큰 혼란은 아니지만, 외환위기로 인해 실업자와 노숙자가 급증하던 시기였다.

그 어느 때보다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열망이 큰 시기였다.

그 때문인지 경기 도민을 대상으로 ‘경기도의 정신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실학’이라고 답한 이들이 가장 많았다.

실학과 실학 정신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국민의 삶이 여러모로 고달프다는 뜻이고,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이후 구체적으로 박물관의 위치와 규모, 성격, 기능 등을 논의, 준비해 올해 10월 23일에 개관하게 되었다.

 

실학박물관은 남양주 다산유적지 앞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지와 조화를 이루도록 2층으로 건축했기 때문에 웅장한 느낌은 없다.

실학박물관답게 규모보다는 내실에 충실하다.

 

1층에는 기획전시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실학박물관의 기획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첫 번째 기획전은 개관을 기념해 연 <김육과 대동법>전이다.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던 공물 제도를 쌀로 대신하자는 대동법을 주장한 잠곡 김육 선생의 생애와

그가 끼친 영향에 관해 살펴볼 수 있다. 쌀로 세금을 징수하자는 생각은 화폐의 주조와 유통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니 그 사회적 파장은 실로 대단했다.

최근에 오만원짜리 신권이 발행됐을 때 사회 각층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을 생각하면

그 파장의 정도를 쉽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훨씬 능가했을 것이다.

이 파장이 좋은 에너지로 작용했기 때문에 또 다른 개혁을 낳을 수 있었고

이러한 개혁의 분위기가 학문에 영향을 줘 실학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런 관점으로 접근하자면 잠곡 김육 선생은 실학의 선구자라 칭할 만하고,

개관 특별전으로 다룰 만큼 가치 있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유물에는 실학자의 사상과 꿈이 담겨 있다

 

1층 기획전시실에서 태동하는 실학을 봤다면,

2층 3개 전시실에서는 실학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을 통해 수용한 서양의 문물인 조총, 천리경, 자명종, 안경 등을 볼 수 있는데,

이 새로운 문물을 통해 바뀌어간 조선인의 생각을 따라가 보는 것도 전시를 즐기는 방법 중의 하나다.

생활의 변화가 가져온 생각의 변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질문해보자.

전시실 구석구석을 잘 살펴보면 그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익의 <성호사설>, 정약용의 <목민심서>, 박지원의 <열하일기>, 박제가의 <북학의>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실학자의 저서는 제2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

선진 문물의 도입을 통해 가난과 무지를 해소하고자 했던 실학자들의 고뇌를 생각해보게 되는 유물들이다.

그들이 주장했던 여러 가지 정책에 담긴 뜻을 생각하지 않고,

책의 목록과 표지만 보고 지나간다면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책 너머,

그 책을 썼던 실학자의 생각과 마음을 짐작해볼 때, 유물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지 않을까.

 

제3 전시실은 하늘의 별을 보던 실학자의 눈과 조선의 산하를 누비던 실학자의 발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별자리 관측 체험, 지도 만들기 체험, 산맥・하천 알아보기 코너에서 천문 지리를 몸으로 습득할 수 있다.

혼천의, 천구의, 지구의 등 한・중・일 동양 삼국의 천문기기도 비교 전시하고 있으니

서로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실학이라는 학문의 실체를 한눈에 보여주는 전시는 없다.

실학이 가지고 있는 백과사전 같은 다양성 때문이다.

실학은 사상, 철학, 경제, 천문, 지리, 의학 등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해줄 것이라면 무엇이든

품은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 학문을 어떻게 엮어 전시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실학박물관의 전시는 유물과 유물이 단단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어,

개혁과 변화의 물결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유물의 개별성보다는 총체성으로 다가서야

실학박물관이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으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찬찬히 전시를 살펴보길 권한다.

 

 

실학자의 마음으로 교육하고 연구한다

 

전시가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라면 교육은 오감을 이용해 진행된다.

실학박물관의 교육도 마찬가지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조선 후기의 개혁과 변화를 주도했던

신학풍 실학을 현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교과 과정과 연계한 프로그램을 통해 실학의 무한한 가능성을 학생들에게 보여줄 예정이다.

교과서에 나온 박제된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에도 끊임없이 해석되고 연구되고 있는 실학의 모습을

통해 새로운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박물관 바로 앞에 있는 다산 생가와 묘역, 안산에 있는 성호기념관, 거중기로 만든 수원 화성 등

경기도 곳곳에는 실학 유적지가 많다.

이곳에서 실학자의 업적과 삶의 결을 만져본다면 실학박물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좋은 전시와 교육은 탄탄한 연구가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

실학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실학 전문 연구 기관으로

국내외의 실학 자료를 집대성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실학 관련

자료를 한데 모아 심층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전시와 교육 그리고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일반 관람객에게 되돌려줄 생각이라고 하니 매년 방문하면 박물관의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수광과 유형원, 이익과 정약용, 박지원과 홍대용 등의 학문과 사상은

경제학과 역사, 천문, 지리 등 학문의 블루오션이라고 할 만한데

대학과 학회 등의 연구를 종합적으로 아우를 만한 센터가 없다는 점에서 실학박물관 개관은 중요합니다.”

안병직 초대관장의 말처럼 실학박물관이 전문 실학 연구원의 역할을 충실하면서,

일반 관람객과 소통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연구한다면,

실학이 과거의 학문이 아닌 현재와 미래를 잇는 학문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실학박물관>

위치 :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27-1번지(다산유적지 앞)

규모 : 2993.83㎡(1층 1876㎡, 2층 1118㎡)

개관 시간 : 오전 10시~오후 6시

관람료 : 무료

문의 031-579-6000

 

아스트로라베 Astrolabe

별의 위치와 시간, 경도와 위도를 관측하는 아라비아식 휴대용 천문기구이다.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들과 교류한 실학자로 기하학과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유금이 제작했다.

앞면 위쪽 고리 부분에 ‘유씨금(柳氏琴)’이라는 인장(印章)과 함께

1787년에 약암 윤선생(이름 미상)을 위해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1. 2009년 10월 23일 문을 연 실학박물관은 국내외 실학 자료를 집대성하고,

연구자의 활동공간이 되어, 실학이란 학문의 ‘개념’과 ‘사상’을 관람객에게 충실히 보여줄 계획이다.

2. 실학박물관은 기획전시실을 비롯해 총 4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제1 전시실에서는 ‘실학의 탄생’을 주제로 한다.

유럽과 아시아의 변화, 양란의 발생으로 변화한 세상에서 실학이 어떻게 태동하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또한 실학이란 새로운 바람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지 등을 보여준다.

3. 제2 전시실에서는 ‘실학의 전개’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실학자 이익,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의 저서와 사상에 관해 살펴볼 수 있다.

 

4. 김육 초상, 조선 후기, 272X119.5cm, 견본채색

김육은 세를 쌀로 징수하는 대동법 시행을 주장하고, 새로운 역법인 시헌력의 도입과 실시에도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수레, 수차 및 동전의 도입과 활자의 제작을 위해서도 전력했다.

1층 기획전시실에서 김육이 실학 탄생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5. 성호집, 18세기, 이익, 목판본

조선 최고의 경세가로 평가되는 이익의 시문을 조카인 이병휴가 정리했다.

정치의 기본은 민생의 안전과 백성의 보호에 있다고 파악하고 이를 위한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6. 박규수 간찰, 19세기, 박규수, 필사본

박규수가 1849년에 용강현령으로 재직하고 있던 형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청나라 사신이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에 민심이 동요하고 있다는 시국에 대한 일과

서양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용강현의 위치를 서울과 비교한 것이 눈에 띈다.

 

7. 평혼의, 19세기, 박규수, 필사본

평혼의는 평면의 원에 별자리를 표시한 것으로 남반구와 북반구의 별이 표시되어 있다.

별자리의 위치 및 시간을 측정해볼 수 있는 도구다.

 

 

 

 

2. 실학은 왜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졌을까?

 

과학의 씨앗,일찍 뿌렸지만 늦게 싹텄다

 

과학은 지식인의 학문이 아니었다. 사대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실학자들은 과학기술에 주목했다.

과학 기술이 만들어내는 삶의 편리와 부의 창조, 그리고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실사구시적 방법론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글 박성래_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과학사

 

한 세기 전에 동경 유학생 김영재(1887~?)는 “과학은 곧 실학實學”이라고 선언했다.

‘실학’이라는 말이 거의 쓰이지 않던 때의 일이다(실학이라는 역사 용어에 대한 혼란과 정리 문제는

복잡해서 길게 언급할 수 없지만, 1930년대 이후에 널리 알려지고, 해방 이후 자리 잡게 된 용어이다.)

 

김영재는 당시 일본 유학생으로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젊은이였다.

하지만 망국 직전 당시 조선에서 과학은 너무 생소한 단어였고,

과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이광수(1892~1950)의 장편소설인 <무정(無情)>(1917년)의 마지막 대목에는

주인공이 미국에 유학하여 생물학을 공부하리라 다짐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교육자가 되렵니다. 그리고 전문으로는 생물학을 연구할랍니다.”

여기에는 소설가의 논평이 붙어 있다.

“그러나 듣는 사람 중에는 생물학의 뜻을 아는 자가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형식도 물론 생물학이란 뜻은 참 알지 못하였다.

다만 자연과학을 중히 여기는 사상과 생물학이 자기의 성미에 맞을 듯하여 그렇게 작정한 것이다.

생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새 문명을 건설하겠다고 장담하는 그네의 신세도 불쌍하고

그네를 믿는 시대도 불쌍하다.”

 

스물다섯의 이광수에게 그의 조국은 불쌍하기 그지없는 나라였다.

이 소설이 발표된 1917년 조선의 젊은이들은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도 과학에 대한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고 있다.

 

실학은 과학 기술에 더 집중해야 했다

 

이처럼 20세기 초 한국은 과학에 대한 황무지였지만, 놀랍게도 과학으로서의 실학이 등장한 것은

그보다 한참 전으로, 일부 선각자들이 과학의 가능성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실학의 대표적 선구자라 꼽는 이익(李瀷, 1681~1763)은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면 천문학은 서양 것을 따르리라’고 지금 들어도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정도로 서양 근대 과학의 중요성에 주목한 바 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여러 실학자도 서양 과학의 내용을 조금씩 흡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지엽적인 지식에 불과했다. 과학은 중요한 자극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결정적으로 조선 실학자들의 정신세계를 바꿔줄 정도는 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홍대용(洪大容, 1731~1783) 같은 이는 지구의 자전을 말했고,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서양 과학 기술의 수용을 위한 국가기관으로 이용감(利用監)의 필요성까지 역설한 바 있다.

 

해방 이후 우리 역사학계는 실학에 주목하면서

그 특징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 등을

실학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사상으로 정리했다. 따지고 보면 과학 기술에 대한 관심과 인식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 역사학계는 그보다 경제사상의 근대성에 주목했고 이를 연구해왔다.

이는 일본에서 20세기 초 이후에 성행했던 마르크스 역사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실학자들을 경제학파, 역사학파, 지리학파, 언어학파 등으로 나누지만,

이들을 아우르는 가장 공통된 특징은 바로 과학 기술에 대한 관심이라 할 수 있다.

 

실학은 왜 근대화로 이어지지 못했을까?

 

아쉽게도 그 씨앗이 싹을 틔웠다고 보기는 힘들다.

실학자들은 관심사였던 근대 과학 기술을 수용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우리는 18세기 이후의 한국 실학을 근대적인 경제 사상으로만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사구시, 경세치용, 이용후생 등의 사상은 ‘과학 기술을 통한 삶의 합리화’라는 명제로 아우를 수

있다. 우리 삶을 풍족하게 해주는 삶에 대한 열망이 서양 근대 과학 기술의 가능성에 눈뜨게 한 것이다.

김영재가 말했듯, “과학은 곧 실학”인 것이다.

 

1930년대 선배 학자들은 일찍이 실학 속의 근대 과학 기술에 주목한 바 있는데,

우리는 그 전통을 오래도록 제대로 잇지 못했다.

나는 한국의 실학 연구가 좀 더 과학 기술의 문제에 주목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 목판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1571년(선조 4)에 제작된 것으로 태조 때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에 새겨 있는 천문도를

그대로 목판에 새겨 종이에 찍어낸 것이다. 위쪽은 짧은 설명과 함께 별자리 그림이 새겨 있고,

아랫단은 천문도의 이름, 작성 배경과 과정, 만든 이의 이름, 제작연도 등이 있다.

 

 

종두기계,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 소장

정약용은 홍역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키고 이 분야의 의서를 종합하여 <마괴회통>을 편찬했으며

박제가와 함께 종두법을 연구하여 실험하기도 했다. 종두법은 외과술과 더불어 서양의학의 상징이었다.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사람 몸속에 아주 적은 양의 천연두균을 접종하여 면역이 생기게 하는 방법이다.

이 종두기계는 종두침과 두장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3. 실학의 학문적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넓고 깊고 목적지가 분명했던 ‘多産’

 

다산(茶山)은 ‘다산(多産)’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산(多産) 자체가 아니라,

그 다산으로 실학을 집대성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실학의 무수한 물줄기를 하나로 모은 거대한 흐름이었다. 실학의 모든 분야에 대해 박학, 박람했고,

실학이 다루었던 거의 모든 것에 대해 글을 썼다.

다산의 독서 편력기는 실학의 뿌리를 더듬는 흥미로운 단서다.
글 김문용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 교수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느 날 한시의 대가였던 이서구가 궁으로 들어가는 길에 한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책을 한 짐 지고 북한사로 향하고 있었다. 열흘쯤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던 이서구가

절에서 내려오는 그 소년을 다시 만났는데, 역시 책을 한 짐 지고 있었다.

“너는 왜 책을 읽지도 않고 왔다 갔다만 하느냐?”고 묻자, 소년이 다 읽었다고 답했다.

“지고 있는 책이 무엇이냐?” “<강목(綱目)>입니다.”

“<강목>을 어떻게 열흘 안에 다 읽을 수 있단 말이냐?”

“읽었을 뿐 아니라 외울 수도 있습니다.”

이서구가 수레에서 아무 책이나 뽑아 시험해보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황현이 전하는 이 일화의 주인공이 바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다.

<강목>은 중국 송나라의 주희와 그 제자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59권 분량으로

편집한 역사서이다. 그것을 열흘 만에 다 읽고 외웠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다.

과장이 있었다 해도, 다산이 평생 남겨놓은 저작에 비추어볼 때, 사실 무근은 아닐 거라고 짐작해본다.


다산은 어려서부터 익힌 역사서를 포함해 넓은 의미의 유교 경전들을 탐구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형성했다.

경학(經學, 사서오경을 연구하는 학문)이야말로 ‘다산학(茶山學)’의 근본이자 중심이었다.

그가 주장한 경학의 방법은, 경전으로 경전을 증명하는 ‘이경증경(以經證經)’이다.

그는 경전과 경전, 경전과 역사서를 꼼꼼히 대조하고 검토하여 경전들을 새롭게 해석했다.

그래서 그는 중국 송대 이래로 유학을 지배해온 주희朱熹식의 경학, 즉 주자학을 넘어설 수 있었다.


그러면 다산은 유교 경전만 읽었을까?

경전이 최고의 사상적 원천이기는 해도, 경전 지식만으로 경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 갈 수 있었을까?

경전에 대한 주자학적인 해석의 틀을 벗어나도록 자극하고 유도한 지적 요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그의 독서 편력 가운데, 학문과 사상의 전체적인 방향과 규모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

주요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주자학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한 넓은 세계
 

다산은 형들과 함께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공부했다.

버지가 외지의 지방관으로 부임하면 따라가 배웠다.

그러던 중, 16세 무렵 한양에서 권철신, 이가환, 이기양, 이승훈 등 성호 이익 문하의 학자들을 만나고

이익의 저작을 접하기 시작했다. 그는 훗날, “성호 선생을 사숙하면서 나는 큰 꿈에서 깨어났다”

“우리가 천지의 크기와 일월의 밝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호 선생의 힘”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이익의 저작을 읽으면서 본격적으로 학문의 세계에 눈을 떴던 셈이다.

이익의 학문은 무엇보다도 ‘박학’했다.

다산 역시, “박학하기로는 성호 선생이시니, 내 영원히 선생을 따르리라”고 읊은 바 있다.
이익은 100권에 가까운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 중요한 것은 <사설(僿說)>과 일련의 <질서(疾書)>들이다.

<사설>은 천지만물, 인사(人事), 경사(經史), 시문(詩文) 등 네 분야에 걸쳐 모두 3,000여 항목으로

성되어 있는 백과사전 스타일의 저술이다. 당시 학계에서는 보기 힘든 백과사전식 저술인 데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에 대한 태도도 개방적이고 진취적이었다.

 

<질서>는 경전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하듯 적어서 훗날의 정리를 기다린다는 뜻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 <질서>에는 경전에 대한 새롭고 도전적인 해석이 많이 담겨 있다.

그는 사서와 삼경을 비롯해 10여 개의 경전에 관한 <질서>를 남겼다.

다산은 이 <사설>과 <질서>들을 탐독함으로써 주자학의 지독한 도덕주의에서 벗어나 박학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사상 형성의 전환 축, 한문 서학서


다산이 서양 문물을 소개한 서학서(西學書)를 한때 탐독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23세 때, 큰 형수 제사를 지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큰 형수의 동생인 이벽으로부터

서학에 대해 처음 들었다. 이후 상당한 지적 충격과 함께 서학에 심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서른 살이던 1791년에 이른바 진산 사건이 발생했다.

진산에 사는 윤지충이 어머니 상을 당하여 외사촌 권상연과 함께 제사를 거부했다가 처형된 사건이다.

다산의 외사촌이었던 윤지충은 그 일로 스스로 천주교인이 아님을 밝히는 <자명소(自明疏)>를 지어

왕(정조)에게 바쳤다.


학계에서는 오늘날까지도 다산이 천주교 신자였는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인다.

양쪽 주장 모두에 나름의 근거는 있다.

내가 여기서 한 마디 보태고자 하는 것은, 천주교 내부에서 동양의 전례(典禮)를 금지하고

그 결과로 진산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다산을 포함한 조선의 일부 지식인들은

서교를 새로운 사상과 학술의 하나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질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다산을 포함해 그의 형들과 친지, 동문들이 처형이나 귀향의 처벌을 받은 것이 바로 신유사옥이다.

이후 그는 종교든 과학기술이든, 서학에 대한 접근을 극도로 꺼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서학의 흔적이 그의 학문과 사상에서 완전히 지워졌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그는 주자학에서 중시했던 천리 대신 상제라는 인격적 주재자를 중시하고,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을 주장하는 등의 혁신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는 이러한 학설들의 근거를 모두 유교 경전이나 선배 유학자들의 견해에서 찾았지만,

실상 <천주실의>를 비롯한 한문 서학서의 영향을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한문서학서는 다산의 사상 형성 과정에서 방향을 전환하는 축과 같은 역할을 했다.


반성의 거울 역할을 했던 청대의 고증학 저작들


넓게 보자면, 다산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의 지적 전통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문화 변동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서학서뿐 아니라 청대 중국의 고증학 저작들,

심지어는 일본 고학(古學)의 주요 성과들까지 넓게 섭렵했다.

인물로 보면 고염무, 모기령, 염약거와 오규 소라이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들의 저작을 구해 읽고 지식을 확장했는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다산이 이를 긍정적으로 인용하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비판적으로 언급한 경우도 많았다는 것이다.

다산은 이렇게 외래 학설에 대해 능동적으로 반응하며 자신의 학설을 수립해갔다.
우리는 그 예의 하나로 <매씨서평>을 둘러싼 일화를 살펴볼 수 있다.

기발한 견해와 주장으로 유명했던 모기령은 <고문상서원사(古文尙書寃詞)>라는 책을 통해,

동진 시대에 매색(梅賾)이 편집한 현존 <서경>이 진서임을 강력히 주장한 바 있다.

이 주장은 송대부터 주희를 포함한 일부 학자들이 제기해온 위서설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었다.

다산은 위서설을 확신하고 <매씨서평>을 써서 모기령의 견해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러나 유배가 끝나 고향으로 돌아온 후, 모기령에 앞서 자기와 같은 입장을 피력한 염약거의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을 얻어 보고서 자기 견해가 부족했음을 깨닫는다.

그는 지체 없이 <매씨서평>을 보완하고, 별도로 <염씨고문소증초(閻氏古文疏證抄)>라는 책을 지어

염약거 학설의 오류를 낱낱이 지적했다. 청대 고증학을 비롯한 당시 동아시아의 새로운 경학 성과는

다산의 학문과 사상이 무르익어가는 과정에서 반성의 거울과도 같은 것이었다.

 

박학과 박람이 실용으로 나아가는 까닭


다산은 평생을 통해 박학을 추구한 학자이다. 독서법으로 말하자면 박람이 그의 첫 번째 원칙이다.

이 박학과 박람은 곧 실용성과 통한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어느 날, 둘째 아들이 닭을 기른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이렇게 답장을 썼다.
‘이번 기회에 농서를 두루 찾아 읽어 좋은 양계법을 개발해보아라.

 닭을 색깔에 따라 구별해보기도 하고, 홰를 바꿔보기도 해서,

다른 집 닭보다 더 살찌우고 더 잘 번식시켜보아라.

그러면서 간혹 닭의 정경을 시로 읊어보기도 하고, 아예 양계법을 담은 <계경(鷄經)>을 지어보아라.’

여기서 우리는 다산이 박람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다기보다는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나아가 독서법의 두 번째 원칙이라 할 만한 것으로,

책을 읽을 때마다 중요한 구절을 뽑아 기록하는 일, 즉 초서(抄書)의 습관을 들이도록 권장했다.

모든 구절을 암송하고 완미하는 방법으로는 그 많은 책을 다 읽어 소화할 수도 없고,

실용적으로 써먹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산이 학자나 사상가로서 이룩한 엄청난 성취는 바로 이러한 독서법을 실천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 초상화', 강진군청 제공
올해 4월, 다산의 유배지였던 강진군에서 새로운 초상화를 공개했다.

수묵인물화가 김호석씨가 치밀한 고증을 거쳐 완성한 다산은 안경을 끼었다.

방대한 독서량과 저술을 감안했을 때 시력이 매우 약화됐을 것이고 따라서 안경을 착용했음직하다.

임진왜란 전에 중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추정되는 안경은 다산의 재능을 매우 사랑한 정조도 착용했다.


'정약용 생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다산은 1800년 정조 서거 후, 강진 유배지에서 남양주 생가로 돌아왔다.

이후 “겨울 시내를 건너듯 신중하게 하고(與兮若冬涉川), 사방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兮 若畏四隣)”는

자의 말을 빌려,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를 짓고 칩거에 들어갔다.

다산이 살았던 여유당은 1925년 대홍수로 떠내려갔고, 팔당댐이 생기면서 옛 마을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지금 모습은 1975년 복원한 것이다.

 

 

한국의 르네상스맨 다산의 대표작 살펴보기

 

다산 정약용이 쓴 책은 무려 503권으로,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책을 쓴 사람이라고들 한다.

정치・경제・법률・지리・역사・의학・농업・기계 등 한 사람의 저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한 분야를 아우른다. 이 가운데 그의 대표작으로

‘2서 1표(<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를 손꼽는다.

다산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평가받는 <목민심서>는

강진 유배지에서 완성한 책으로, 지방 행정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오랜 유배 생활 중에 지방 행정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름의 해답을 내놓은 것이다. 당시의 실상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지적하고,

지방 수령이 지켜야 할 원칙과 규범 그리고 구체적인 지침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술했다.
부임부터 해관까지 12부, 각 부마다 6조로 나누어진 세부항목이 있어 총 72조로 구성되어 있는,

구체적이고 분석적이며 현실적인 저작이다.
이 책은 백성의 입장에서 농민의 실태, 서리의 부정, 토호의 작폐, 도서민의 생활 상태 등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어서, 조선 후기 지방 사회경제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오늘의 공직자들도 충분히 지침으로 삼을 만하다.

 

<경세유표>는 “국가 통치 질서의 근본이념을 세워 오랜 조선을 새롭게 하고자” 저술한 책이다.

새로운 국가건설 계획안으로, 중앙정부의 기구와 기능, 그리고 정치・경제・군사 등 여러 분야의 시설이나

제도에 대한 분석과 개선 방안 등에 대해 썼다.

그는 이 책에서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를 자영농을 기본으로 하는 ‘정전제(井田制)’에 두면서도

당장에 실시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아, 첫 단계로 부분적인 개혁론이라 할 수 있는 ‘정전의(井田議)’를

제시했다.


<흠흠신서>는 법을 집행하고 재판하는 관리들에게 지침을 주기 위해 쓴 책으로,

형법 연구서이며 살인 사건 실무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흠흠신서>라는 책 이름은 형벌을 다스리는 근본은 삼가고(흠) 또 삼가는(흠) 것이라는 뜻에서 따왔으며

흠휼 사상에 입각해서 쓴 책이다. 특히 살인 사건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중요한 사건인데도,

재판을 맡은 수령들은 어려서부터 시부만 논하여 법률을 모르고, 재판하는 법을 알지 못하여

재판을 서리들에게 일임하다 보니, 자의적이고 법 외적인 재판과 형벌 부과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를 보면서 흠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률의 근거가 필요하다고 여겨,

재판을 맡은 관리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흠흠신서>를 지었다.

 

 

 

 

4. 실은 서양 예을 어게 수까 ?

 

남의 것도 잘 취하면 우리 것이 된다

 

실학자들이 어째서 서양의 악기에까지 관심을 가졌을까?

선의 선비는 인격 완성과 진선미의 완성인 樂의 실천을 위해 악기를 다루었다.

그들은 양악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전통 음악을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이는 서양의 악기가 실학자에 의해 토착화된 흥미로운 사례로, 우리가 지금 양금에 주목하는 이유다.
글 강명관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1765년 북경에 간 홍대용은 체류 중 천주교당을 찾아가 그곳에서 처음으로 파이프오르간을 보게 된다.

홍대용은 파이프오르간을 관찰해 소리가 나는 원리를 알아내고,

이어 서양 선교사 유송령(August von Hallerstein)에게 연주를 부탁한다.

유송령은 연주자가 몸이 안 좋아 연주가 불가능하다면서 자신이 건반을 누르며 대략의 연주법을 알려준다.

그것을 지켜본 홍대용은 거문고 타는 방식을 응용해 파이프오르간으로 거문고곡을 연주한다.

“이건, 동방의 음악이지요”라고 거문고의 원리를 설명하자, 유송령은 깜짝 놀란다.


홍대용이 처음 보는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은,

음악에 대한 재능과 식견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거문고와 가야금을 썩 잘 타는 연주자였다고 전해진다.

홍대용은 북경에서 돌아와 <연기(燕記)>라는 여행기를 썼는데,

중국에서 보았던 각종 악기에 대해서도 소상히 언급하고 있다.

거기에 전에 볼 수 없었던 악기가 있으니, 바로 양금(洋琴)이다.


“양금은 서양에서 온 것이다. 중국에서 본떠 만들어 사용한다.
오동나무 판에 쇠줄을 걸친 것이라 소리가 쟁쟁 울린다. 멀리서 들으면 흡사 종소리 같다.

다만 너무 씻은 듯 맑아서 구슬픈 데 가까워 아무래도 금(琴)과 슬(瑟)에는 미치지 못한다.

작은 것은 열두 줄이고, 큰 것이 열일곱 줄이다. 큰 것은 더욱 소리가 크고 맑다.”
음악에 비상한 재능과 관심이 있는 홍대용이었기에 처음 보는 악기를 특별히 기록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양금은 홍대용의 친구 박지원과도 인연을 맺는다. 박지원은 1780년 북경에 간다.

그의 북경행 역시 다들 아는 일이니 더 보탤 내용은 없다. 다만 양금과 관련하여 언급한다.

 

서양의 악기가 국악기가 되기까지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망양록’에서 중국 친구 왕민호에게

“구라동현소금(歐羅銅絃小琴)은 언제부터 유행한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구라는 구라파 즉 유럽이고, 동현은 구리줄이니,

곧 유럽의 구리줄을 얹은 작은 금(琴)은 중국에 언제 들어왔느냐는 말이다.

옆에 있던 윤가전이 명나라 만력(萬曆, 1573~1619) 연간에

이마두(利瑪竇, 곧 마테오리치, 1552~1610)가 처음 가져왔을 것이라고 말한다.

연암이 이렇게 중국인에게 양금의 내력을 물었던 것은, 그에게도 양금은 신기한 악기였기 때문이다.
조선 사람들도 양금을 사오긴 했지만 연주법을 모르니 장식용으로 시렁에 얹어놓았다.

흥미롭게도 박지원과 홍대용 두 사람이 양금을 해곡(解曲)한다.


1772년 홍대용이 양금을 해곡할 때까지 아무도 양금의 연주법을 몰랐다.

양금의 해곡은 연암이 홍대용의 집에 있는 양금을 가리키며 한번 해곡해보자고 제안해 이루어졌다.

연암이 양금의 현을 치면, 홍대용이 가야금에서 동일한 음을 찾아내는 식으로 해곡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양금의 연주법을 알았으니, 연주가 없었을 리 없다.

홍대용의 집 뜰에는 유춘오(留春塢)라는 곳이 있었는데, 여기서 음악회가 자주 열렸다고 한다.

성대중의 <기유춘오악회(記留春塢樂會)>에는 그 음악회를 간단히 묘사한 글이 실려 있는데,

‘서양금’을 연주하는 김억(1746~?)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는 홍대용의 집에서 벌인 또 다른 음악회에서도 거문고를 연주한 명연주자였다.

희룡이 쓴 <호산외기>에는 김억이 찬란한 비단옷을 입고, 기생 여덟 명을 동시에 거느리는 등

부유한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나와 있다. 이 책에 김억과 관련하여 양금 이야기가 조금 나온다.


“우리나라에는 양금이란 악기가 있는데, 소리가 촉급하고 절도가 없어, 노래에 맞지 않았다.

김억이 처음으로 양금 소리를 노래와 어울리게 하니, 아주 맑아서 들을 만하였다.

지금 양금을 연주하는 사람은 그것이 김억에게서 시작된 줄 모르고 있다.”
홍대용과 박지원이 양금을 해곡하고, 김억은 노래와 어울릴 수 있도록 양금 연주법을 새로 개척한 것이다.

 

비판적 수용과 창조적 해석을 거친 토착화

 

양금은 홍대용과 박지원이 해곡한 이후 대단히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박지원은 “철현금은 지금까지 9년 동안 널리 퍼져, 금사(琴師)라면 연주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즉 18세기 말에 이르면 양금의 연주법은 신기할 것도 없었던 모양이다.

18세기말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김영(金泳)은 정조 24년(1800) 양금이 유행하는 것을 보고는

“이 소리는 아주 살벌하다. 우리 동방은 나무에 속하는데, 쇳소리(金聲, 양금의 소리)가 한창 성행하고

다. 쇠는 나무를 이기는 법이라, 장차 사특한 변란이 가까운 곳에서 일어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한다.

이 말은 이듬해 1801년 일어난 신유사옥을 예견하는 말이다.

뜬금없는 예언이지만, 이런 예언이 나올 정도로 18세기 말 양금이 유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양금은 원래 이슬람 음악에 쓰던 악기로 10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십자군에 의해 유럽으로 전해진다.

그것은 다시 마테오리치에 의해 16세기 말 중국에 전해졌고,

18세기 후반 조선에 전해져 마침내 지금까지 국악 연주에 쓰이는, 국악기가 된 것이다.

대용・박지원 두 분에 의해 서양의 악기가 국악기가 되었으니,

금이야말로 서양의 문물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인 긍정적인 선례가 아니겠는가?

 

1. <임원경제지>의 <유예지> 부분 중 양금 악보,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조선 순조 때 서유구가 펴낸 <임원경제지>는 일상생활에서 긴요한 일을 살펴보고

이를 알리고자 저술한 책으로 농업 위주의 백과전서다.

총 16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유예지>에는 거문고, 생황, 양금의 악보가 실려 있다.


2. 양금

채로 줄을 쳐서 소리를 내는 현악기다. 사진_양금연주회 제공

 

 

 

5. 실학은 현대생활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

 

18세기에 꿈꾸고 20세기에 완성한 유통 프로젝트

 

 

박지원도 박제가도 수레에 집착했다. 수레가 무엇이기에? 수레는 물건의 흐름을 만드는 도구다.

그들은 생산과 소비의 중간 단계에 있는 유통의 중요성을 눈여겨보았다.

한국 경제개발의 시발점을 ‘경부고속도로’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0년 전 실학자들의 꿈이 완성된 오늘날, 이 엄청난 물류 혁명을 보며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글 김용헌_한양대학교 철학과 교수

 

 

수레 하나로 꿈꾸었던 물류 혁명

 

18세기 후반까지도 우리나라 백성은 참 가난하게 살았다.

북학파 학자인 박제가(1750~1805)는 백성의 가난한 삶에 대해 <북학의>에 자세하게 써놓았다.

이 책에 따르면, 열 집이 사는 마을에서 하루 두 끼 먹는 집이 몇 안 될 정도고,

부엌 한구석에 그을린 채 매달려 있는 수수 몇 대와 고추 수십 개가 비상식량의 전부였다.

택도 비참하고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불을 지피면 연기가 방에 가득 차서 숨이 막힐 지경이고, 찢어진 창호는 해진 버선으로 막았다.

 

서울의 화려한 저택도 바둑판의 한쪽 다리를 바둑돌로 괴어야 할 정도로 평평하지 않았다.

보통 집들은 머리를 바로 들고 일어서지 못할 만큼 낮았고,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없을 만큼 좁았다.

수챗물이 제대로 흐르지 못해서 변소에는 물이 가득했고 비가 조금만 와도 부엌에 물이 고였다.
이것이 18세기 후반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가난한 삶이다.


하지만 가난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그 시대 지식인과 관료들의 수수방관이었다.

그들은 팔짱만 끼고 앉아서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여기서 박제가가 발견한 문제 해결의 키워드가 수레다.


<북학의>는 ‘수레’라는 항목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상업을 육성하자고 적극 주장했다.

품 교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가난의 주요 원인으로 생각했다.

유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소비가 촉진되고,

소비가 촉진되어야 기술이 개발되고 생산이 늘어난다는 것이 그의 경제관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상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유통 수단인 수레 확보가 관건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수레가 없었기 때문에 상품 교역이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금을 구경하기 힘든 두메산골에서는 새우젓이나 조개젓을 보고 이상한 물건이라고 하고,

신맛이 나는 나무열매로 장을 대신하니, 박제가는 이런 가난이 모두 수레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제 발전에 수레가 중요하다는 것은 북학파 학자들이 공유했던 생각이다.

박지원(1737~1805)도 그의 명저 <열하일기>에서 수레에 대해 자세하게 논하며,

수레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는 것은 선비와 관리의 죄라고 못 박았다.

그들은 수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기는 하지만,

정작 수레를 만드는 법이나 수레를 사용하는 기술 연구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박지원은 “어허! 한심하고도 기가 막히는 일”이라고 통탄했다.

 

도로 건설로 해결한 가난


18세기 후반 수레 보급과 도로 건설을 통해 상업을 발전시키고, 나아가 가난을 극복하겠다는

북학파 학자들의 구상이 이루어진 것은 200여 년이 지난 뒤였다.

경인고속도로에 이어 우리나라 경제 성장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은 1970년 7월이었다.

428㎞의 도로 건설에 430억 원의 공사비가 들어간,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 공사였다.

추풍령에 세워진 경부고속도로 기념비에는

“우리나라의 재원과 우리나라의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길”이라고 써 있다. 그렇게 시작된 고속도로가 2009년 8월 현재 29개 노선 3685㎞로 확장되었다.

그 도로에서 달리고 있는 차량의 수 역시 놀랍다.

2009년 6월 말 현재 우리나라 자동차 등록 대수는 1700만 대를 넘어섰고,

계 14위의 자동차 보유국이 되었다고 한다.

2005년 이래로 프랑스를 따돌리고 세계 5위로 올라선 자동차 생산 능력은 더욱 놀랍다.
1975년 12월 현대자동차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인 ‘포니’를 개발한 지 30년 만에

세계 5위의 자동차 강국이 된 셈이다.

심지어는 시대적인 요구이기도 한 친환경 자동차의 개발에서도 자동차 선진국을 바짝 뒤쫓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시기 상조라고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다.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 개발이 무모한 도전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많았다.

주어진 한계를 돌파하려는 도전과 노력이 있었기에 세계 10위권을 넘보는 경제강국이 될 수 있었다.

18세기 후반에도 우리나라는 산천이 험하고 막힌 데가 많기 때문에 수레를 이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박지원은

“수레를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길을 닦지 않는 것이니,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절로 닦일 것이 아닌가?

거리가 비좁고 산이 험준하다는 것은 쓸데없는 걱정이다”라고 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수레를 개발하고 수레를 이용하겠다는 의지다.

의지가 확고하다면, 그리고 그 의지가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한 것이라면

환경적인 여건은 충분히 극복될 수 있다. 우리나라 자동차와 도로의 역사가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200년 전, 북학파의 꿈이 이제야 이루어졌다.

 

 - 경기문화재단,

 - <경기, 문화, 나루> 2009-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