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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강좌' -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

Gijuzzang Dream 2010. 1. 7. 00:27

 

 

 

 

 

한국학술진흥재단 제3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 강좌’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법철학)

 

 

 

 

 

 

 

 

 

 (1) 먼저 식민사관부터 극복해야

 

 

 

 

일제는 한국 침략과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입각한 한국사 연구를

진행해나갔다.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사발전 과정을 부정하고

한국사에서 타율적이고 정체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우리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한 것이다.

신공(神功)황후의 신라정복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계승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만주사를 중국사에서 분리시켜 한국사와 더불어 한 체계 속에 묶어놓은 만선사(滿鮮史),

당시 한국의 경제가 일본 고대 말기의 촌락경제단계에 머물러 있었다는 정체성이론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12월19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일제의 역사왜곡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2월19일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식민사관에 붙들려 한국의 역사를 왜곡 발언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조’란 용어는 일제 어용학자들의 산물

“이조(李朝) 때문에 망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에서 ‘이조’란 용어는

일제가 조선시대 역사를 폄하하고, 공격하기 위해 어용학자들이 만들어낸 용어라는 것.

조선 역사를 李 씨들만의 역사로 국한시키면서

일제의 제국주의, 전쟁사관을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며

‘이조’란 용어 대신 500년 이상 역사를 이어온 국가 개념, 즉 ‘조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줄 것을 당부했다.

일제 어용학자들은 조선 역사와 관련, 사색당쟁론(四色黨爭論), 사대주의론(事大主義論),

문화적 비정체성론 등을 주장했는데, 이들 역시 비슷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어용학자들의 주장은 “조선이 500년 간 이어온 사색당쟁(四色黨爭)으로 인해 망했다”는 것인데,

조선 역사에 있어 사색당쟁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대부분 양당 체제를 통해 견제와 균형, 부정부패 방지 등을 도모해왔다고 정 위원장은 말했다.

조선 전기 역사에 있어 주역은 사(士)와 대부(大夫),

즉 조선 건국공신 계열의 훈구파(勳舊派)와 유학자들인 사림(士林)이었다.

조선 왕조는 건국 이후 훈구파들의 독주가 이어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내세웠다.

훈구파의 독주를 사림을 통해 통제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다.

조선 후기 역사에 있어서도 사색당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 후 정치를 주도한 것은 북인이었으며, 견제 세력으로 서인이 등장했다.

이후 역사에 있어서도 사림 간의 양당 체제와 비슷한 정치구도가 이어졌다.


중국 사여품에 있어 서적 대신 비단만 강조

이날 강연에 많은 청중들이 몰렸다.

청중들이 강연장 외부에 설치된 영상 시설을 통해 강연을 듣고 있다. 

사대주의론 역시 일제 어용학자들인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칭하면서 조선 역사를 비판한 용어다. 그러나 ‘사대’란 말은 당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유교 영향권 내의 외교질서를 의미했다. 중국과 조선 사이에는 존경과 책임이 공존하는 쌍방 관계가 존재했다.

양국 간에 이루어지던 조공(朝貢)과 사여(賜與)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조선이 특산물인 인삼, 종이, 화문석 등을 조공하면, 중국은 조공품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적, 비단, 약재 등을 사여했다.

일제 어용학자들은 중국의 사여품목에 있어서도 조선 역사를 크게 비하했다. 어용학자들은 중국으로부터 비단을 사여 받은 것을 강조했는데, 당시 조선이 가장 귀중하게 여겼던 것은 비단이 아니라 서적이었다는 것.

조선사회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문(文)을 중시하던 나라였다.

명분을 중시한 나라였다는 사실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인조반정이 대표적인 사례.

선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은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데

이로 인해 인조반정을 불러일으키고, 폐위하게 되는데,

가정 내 문제로 왕이 폐위되는 경우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라는 것.

결과적으로 조선은 무가 아닌 문을 내세움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긴 왕조를 이어갔는데,

어용학자들은 이 부분은 간과한 채 성종 이후 집중적으로 발생한 사화만을 강조하면서

당쟁으로 인한 부정적인 측면만을 내세워 조선 역사를 비하하고 있다고 정 위원장은 말했다.

정 위원장은 조선이 500년 이상 존속할 수 있었던 그 생명력은 폭압적 통치를 배제하고,

명분으로 국민을 설득하는 친화적 정칙, 즉 왕도를 지향했다는 점에 있다고 말했다.

조선 중기 왜란과 호란으로 나라가 흔들렸지만, 왕조의 종말로 이어지지 않고 조선을 재건할 수 있던 것은

조선 사회 특유의 명분 정치에 있었다고 말했다.


역사상 250년 동안 몰락한 나라는 없어

“조선이 양란 후 무너져 내렸다는 설명은 역사의 기초지식도 못 갖춘 억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중국 왕조의 평균 수명이 150년에 불과한 점에 비추어

250년 이상의 시간에 걸쳐 와해되는 사회가 역사상 존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 기간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 

“조선은 칼을 든 무사의 나라가 아니라, 붓을 든 선비의 나라였으며, 힘으로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이성에 기반을 둔 논리의 나라, 논리로 통치하는 평화 지향의 문치주의 국가였다”고 정 위원장은 말했다. 다시 말해 자급자족하는 농경사회로서 지식에 기반을 둔 문화국가였다는 것.

“한 마디로 조선은 우리 역사상 가장 인간다운 삶을 성취한 시대였으며, 현대 물질주의 사회와 정반대의 가치를 추가한 사회였다”며 사대주의란 용어에 입각해 문화적 비정체성론을 주장한 일제 어용학자들의 주장을 비판했다.

정 위원장은 조선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가장 먼저 극복해야할 과제로 식민사관을 꼽았다.

구체적으로 당쟁이 조선망국의 원인이었다는 식민사관의 당쟁론을 극복하는 일이 시급하다며,

지난 1970년대 역사학계가 당쟁론의 비판논리를 대신해 붕당론(朋黨論)을 제시한데 대해

큰 의미를 부여했다.

붕당론에서 말하고 있는 붕당정치(朋黨政治)란

학문적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각 붕당들 사이의 공존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의 특이한 정치 운영 형태를 말한다.

공론에 입각, 상호 비판과 견제를 원리로 하는 붕당정치는 현대 정당정치와도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각 당파들이 무엇을 위하여, 무슨 정치적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려고 했는지,

또 어떤 의도를 갖고 어떤 정치운영의 방향성을 갖고 움직였는지 등

본질적인 문제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러한 접근이 이루어져야 붕당론의 근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이강봉 편집위원

- 2009년 12월21일 ⓒ ScienceTimes

 

 

 

 

 

 

 

 (2) 세계에 자랑해야 할 조선의 선비정신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재조명해야

 

 

 

  

조선시대의 지식인 선비(士)는 오늘날의 왜소한 지식인과 곧잘 비교된다.

특히 꼿꼿한 지조와 기개, 불요불굴의 정신력, 청정한 마음가짐 등으로 특징 지워진 선비 상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선비들은 또한 한 시대를 이끌어간 주역이었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선비들을 중요한 자리에 등용했으며,

이들은 무려 508년 동안 이어진 이씨 왕조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이 유생들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안동 도산서원 


30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정옥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선비정신이야말로 한국이 자랑할 대표적인 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선비정신에 대한 재조명이 요청된다”고 말했다.

조선시대에 선비가가 부상한 것은 건국과 궤를 같이 한다.

고려말 불교의 세습화, 부의 축적, 권력화, 귀족화 등의 부작용을 경험한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을 국학으로 선포하고, 건국이념으로 삼았다.


선비들의 전공필수과목은 인문학

건국에 참여한 성리학자들은 민본주의에 입각한 이상향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었는데,

이 이상향은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이 덕으로 천하를 다스렸다는 태평시대,

즉 요순시대를 치세(治世)의 모범으로 삼고 있었다.

자유민을 뜻하는 양인(良人) 출신의 선비들은 성리학을 통해 그 꿈을 이루려고 했던 학인들이었다.

선비(士)의 단계에서 자신을 수양(修己)하고,

관료(大夫)의 단계에서 남을 다스리는(治人) 수기치인을 근본으로 삼아

사대부(士大夫)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수기 단계에서 선비들의 전공필수 과목은 문 · 사 · 철(文 · 史 · 哲) 중심의 인문학이었다.

특히 철학에 해당하는 경학(經學)은 학문의 핵심이었다.

경학이란 유교경전에 포함돼 있는 진리를 탐구하는 것으로,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을 해명하는 것이 최대 과제였다.

우주만물을 바라보는 일관된 기준인 이기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문제는

세계를 이해하는 우주관과 인생관의 차이로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우주 · 자연 · 인간의 모든 현상은 작용으로서의 기(氣)와 작용의 원리로서의 이(理)에 의하여

일관된 잣대로 생성 · 변화 · 소멸된다는 논리였다.
이 이기론을 기초로 해 제반 학설이 전개됐으며,

이 학술논쟁에 모든 선비들이 어떤 형태로든 연결돼 있었다.

인간 삶의 자취인 역사(歷史)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으로 이해됐다.

수 천년동안 동양문화권의 주도국이었던 중국 역사와 함께 우리나라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문장은 사상과 진리를 담는 그릇

경학과 역사는 경경위사(經經緯史)로 이해됐다.

경전의 진리는 세상이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날줄인 경(經)으로 이해하고,

역사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므로 씨줄인 위(緯)로 이해했다.

경경위사의 정신으로 날줄과 씨줄로 짜여 있는 인간 삶의 모습을

보다 확실하게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탐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파악한 진리나 사실, 사상 등 알맹이들을 표현하는 매체가 문장(文章)이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나 진리도 합당한 문장력이 없다면 여러 사람에게 알릴 수 없다는 것으로,

문장을 메시지를 담는 그릇으로 이해했다.

수기 단계에서 매우 중요한 수신의 문제는 소학(小學)으로 해결하려 했다.

성리학에서 어린아이의 수신 교과서로 채택한 이 책은 청소하는 법, 말을 주고받는 법 등

기본적인 예절을 담고 있었다.

성리학자들은 어려서 예절을 충분히 익혀야 커서도 자연스럽게 예절을 행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소학이 어린아이들이 배우는 필수 교과서였다면, 대학(大學)은 치인 단계에서의 기본 교과서였다.

격물지치(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로 표현된

대학의 8조목은 선비가 밟아 나가야할 필수 단계였다.


과거 · 산림 · 은일 · 처변삼사의 길

선비의 진로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가장 일반적인 진로는 과거(科擧)였다.

대부분의 선비가 20세 전후에 자격시험의 성격을 지닌 소과(小科) 시험,

즉 경전의 뜻을 이해하는 정도를 시험하는 생원시(生員試)와

학자적 소양을 시험하는 진사시(進士試)를 보았다.

생원 · 진사에 합격한 사람은 성균관에 입학해 기숙사인 동재 · 서재에서 생활하는 관학재생(館學齋生),

즉 국비 장학생이 되거나, 다시 귀향하여 대과(大科) 시험을 준비했다.

최종적으로는 대과인 문과(文科)에 합격해야

비로소 벼슬길로 나아가 9품관에서부터 시작하는 학자관료가 될 수 있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강연에

몰두하고 있는 청중들 

두 번째 진로는 산림(山林)의 길이었다.

선비의 복수 개념인 사림(士林)이 정계와 관료로 대거 진출한 조선 중기에 이르면 과거를 보지 않고, 중·장년이 되도록 학문에만 전념하는 학자들이 늘어난다. 특히 학문적으로 존경받는 대학자들을 산림이라 하며 우대했다.

산림들은 학문적 능력을 갖고 학계뿐만 아니라 정계까지 주도했다. 학파와 정파 연합구도 속에서 그 구심점이었으며, 영수였다.

암혈독서지사(岩穴讀書之士)로 불린 산림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난 후 특채돼 국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송시열(宋詩烈)이다.

세 번째 진로는 은일(隱逸)이었다.

국가를 경영할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세를 당하거나 아직 때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초야에 은둔해 있는 것을 말한다.

은일의 길을 가고 있던 선비들은 저마다 특별한 사유가 있었다.

특히 부덕하고 무도한 통치자가 권력을 휘두를 때 정치판에 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주나라 강태공으로부터 시작된 은일의 역사가 조선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대신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아예 상대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선비의 처변삼사(處變三事), 즉 은둔 · 망명 · 자결이 있었다.

또한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맞는 선택이 아니라고 여겼을 때는 거의소청(擧義掃淸)을 선택했다.

의를 일으켜 적을 쓸어버리겠다는 이 마지막 결정은 선비의 정상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 있다든지, 무도한 왕이 횡포를 부리고 있다고 판단되면

선비들이 전쟁 일선에 나섰다.

임진왜란과 조선 말기의 선비들이 주도한 의병항쟁,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조와 절개는 선비의 징표

선비들이 가장 가치 있게 여겼던 것은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이념이었다.

이 일관성은 세력에 따라 변화하는 기회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선비의 지조와 절개는 선비로서의 징표와 같은 것이었다.

그밖에 여러 가지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주목받는 것은 학행일치(學行一致)의 방향성이다.

선비들은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길 때 비로소 그 배움이 의미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실천 단계에서 가장 중요시 되던 것이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이었다.

그러나 의리를 지키되 인정(人情)과 조화시키려 애를 썼다.

의리만을 따지면 세상살이가 삭막하기 쉽다.

인정만을 베풀면 기준이 없이 혼란스러워지므로

의리와 인정을 적절히 조화시켜야 한다는 균형감을 중시했다.

청백리(淸白吏)는 탐관오리(貪官汚吏)의 반대어로 사대부의 이상적인 역할 모델이었다.

청백리는 국가적인 포상의 대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높이 평가받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청백리로 선발되면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가문의 영광이요, 자손까지 국가의 특전을 받았다.

지금까지 기록을 종합해 보면 청백리의 수는 160여 명이다.

장관급인 판서가 30여 명으로 가장 많고, 그중에서도 인사담당인 이조판서가 가장 많았다.

그 외에 영의정이 13명, 좌의정이 7명, 우의정이 3명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역사상 가장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시대로 평가받고 있는 세종시대는 청백리를 가장 많이 배출한 시대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인물로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유관(柳寬)을 들 수 있다.

이 세 사람은 우정이 돈독한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실천에 있어서도 비슷한 성향을 보이며,

세종의 태평성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은 조선시대 지식인인 선비는

단순한 지식종사자가 아니라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실천을 통해 국가사회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로

청빈(淸貧), 청백리(淸白吏), 청직(淸職), 청의(淸議), 청류(淸流) 등의 단어에서 보듯

깨끗함에 큰 가치를 두었으며, 선비정신을 맑음의 정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이강봉 편집위원

- 2009년 12월28일 ⓒ ScienceTimes

 

 

 

 

 

 

 

 (3) 신라, 고려, 조선의 역사 '중인'들이 바꿨다 

  최치원, 정도전, 강위로 이어지는 중인 계보

 

 

중인(中人)에 대해 보통 조선시대 양반(兩班)과 상인(常人), 중간에 위치했던 신분층을 지칭하는 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 역사에 있어 중인들은

신라시대 이후 격변기 때마다 역사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놓은 중요한 신분계층이었다.

9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은

이 중인들이 각 시대에 걸쳐 사회변혁의 주역이었으며, 새로운 국가를 열었던 주체 세력이었다고 말했다.

경주 최씨로 대표되는 육두품(六頭品)은 성공과 진골 다음 가는 차지식층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진골이 전권을 쥐고 있는 신라 말 정치 상황에서 그 탈출구로 당나라 유학을 선택한다.

1월9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최치원(崔致遠, 857~ )을 비롯 그의 종제인 최언위(崔彦㧪, 868~944)와 최승우(崔承祐,  ~936) 등

신라 말 3최(三崔)는 당나라에 유학했다는 것 외에 그곳에서 급제해 벼슬하고,

당나라 지식인들과 상당한 교분을 쌓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귀국 후 신라 사회의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고,

실망 끝에 노선을 달랐지만 새로운 사회를 모색한다.

진성여왕에게 국정문란에 대한 개혁안으로 ‘시무10조’를 제시한 바 있는 최치원은

개혁이 실패하자 난세를 비관, 은둔을 선택했고,

최승우는 견훤의 책사로 일세의 이름을 날렸으나 좌절을 맞보게 된다.


고려시대 중인들, 불교 아닌 성리학에 관심

최언위는 신라가 망하자 왕건의 고려에서 최고위직까지 승진해, 그의 손자 최항(崔沆)에 이르기까지

문한관(文翰官)으로 고려왕조가 기초를 놓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최승로(崔承老, 927~989)는 935년 신라가 망하자, 아홉 살의 나이로 아버지 은함(殷含)을 따라

개경에 들어와 그 총명함으로 태조 왕건의 사랑을 받았고, 태조 이후 6대 왕을 섬겼다.

그는 도당유학파의 다음 세대인 국내파로서, 학문적 소양을 갖고 성종 때에 이르러 시무 28조를 올려,

고려 관료사회가 유교적 전통을 확립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한편 설총(薛聰, 655~ )은 육두품 출신이면서도 경주 최씨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설총은 비록 화왕계(花王戒)를 지어 신문왕에게 충고했다고는 하나,

당나라 유학도 가지 않았고 이두를 집대성한 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 

중인들의 활약은 고려 말기에 오면서 또 다시 부각되기 시작한다. 당시 중인 계층이었던 향리(鄕吏) 층은 향토에 대한 영향력과 함께 경제력까지 갖추고 있었으나, 고려 귀족사회에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들은 고려 사회가 불교에 의한 부작용을 노출하자 성리학에 주목하고, 원나라 유학 등을 통해 돌파구를 찾기 시작한다. 이른바 성리학을 주 전공으로 하는 향리 출신의 신진사대부 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고려 충렬왕 때 유교 진흥에 앞장섰던 사람은 경상도 순흥의 향리 출신 안향(安珦, 1243~1306)이었다. 그는 원나라에서 주자 성리학을 수입한 최초의 학자였다.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만권당을 중심으로 학문 활동을 한 이제현(李齊賢, 1287~1367)도 향리 출신이었다.

그는 고려말 유학의 거두였던 이색(李穡, 1328~1396)의 스승이기도 했다.


정도전은 중인 출신 신진사대부

한산의 향리 출신이던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과 그의 아들 목은(牧隱) 이색은

고려 유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지만, 고려 조정에서 벼슬하는 데는 한계를 느끼고 원나라로 유학을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과거 급제해 벼슬살이를 하다 다시 고려에 들어오는데,

이 때 주자학을 비롯한 송 · 원대 성리학을 고려 학계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성계를 도와 혁명을 일으킨 정도전(鄭道傳, 1342~1398) 역시 향리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 1305~1366)은 봉화호장 공미(公美)의 증손으로,

영주 등의 향교에서 공부하고 개경에 올라와 심이도(十二徒)와 교유하며, 가정 이곡 등과 사귀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향리 출신이라는 한계 외에 그의 모계에 천민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이유로

중앙정계로부터 계속 소외되는 아픔을 맛보았다.

더구나 불교의 폐단으로 망해가는 고려의 모습을 본 정도전은 고려에 대한 기대를 접고,

성리학을 이념적 지주로 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을 키워나간다.

조선 창업공신 정도전.

고려시대 중인 신분인 향리 출신이었다. 

정도전은 함경도 지방의 지지기반을 두고,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워나가고 있던 이성계에게 주목했다. 당시 이성계는 고려 말 혼란기를 틈타 전 국토을 유린하고 있던 왜구 토벌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정도전은 이런 이성계에 접근, 그의 야망을 부추기고,

그의 참모가 됨으로써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성공시킨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 신진사대부계열 중 좌파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정도전과 조준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사대부 좌파들은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신신사대부 우파와 학문적으로는 같은 길을 걸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다른 길을 걸었다.

이는 신분적인 차이 때문이었다.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던 정몽주 계열의 우파가 온전한 개혁을 선택한데 비해 대부분 향리 출신이었던 정도전 계열의 좌파들은 역성혁명의 길을 택했고, 결국 혁명에 성공을 거두게 된다.

조선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사회가 해체 국면에 접한 상황에서 중인들의 활약은 매우 두드러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위항학문(委巷學問) 운동이다.

(위항이란 여항(閭巷)과 같은 뜻으로 오늘날의 달동네에 해당하는 말인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항인(委巷人)이라 했으며, 이중에는 중인 이하 상인과 천민이 포함돼 있었다.)


중인 문화운동이 개화운동 구심점으로

이 운동은 규장각 서리 등 서울의 하급관리인 경아전(京衙前)을 중심으로 전개됐는데,

인왕산의 옥류계(玉流溪)를 거점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한학문 운동인 옥계시사(玉溪詩社)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이들의 시회는 수시로 열렸지만 옥류계에 있던 천수경(千壽慶)의 집, 송석원(松石園)에서 열린 백일장에는

수백 명이 참가했으며, 여기에 참가하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무기 없이 맨손으로 싸운아고 해서 백전(白戰)으로 불리던 백일장은

정조 대에 이르러 문예부흥 절정기를 이끌었다.

1870년대 개항기에 이르면

운동의 중심지가 인왕산에서 서울의 중앙인 청계천 2가 육교(六橋, 지금의 광교) 뒤로 이전한다.

참여자도 경아전 중심에서 경제력 있는 기술직 중인이 대거 참여하면서,

문학운동을 통한 신분상승 운동의 한계를 벗어나, 정치적 결사로까지 변신하게 되고,

초기 개화운동의 구심점이 된다.

개항 직후의 결성된 육교시사(六橋詩社)가 그것인데,

북학에서 개화로 이어지는 변화의 교량적 역할을 하게 된다.

청계천 상류인 인왕산의 옥류계에서 시작된 문화운동이 청계천을 따라 이동해,

광교 부근의 육교시사에서 개화운동으로 변화하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 중인이 있었다.

육교시사의 동인들은 개화 상소를 올리고, 개화서를 수입해 널리 알리는 한편,

종두법 등 서양의학을 수입, 보급하는 등 선진문화 수입과 사회계몽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아울러 사회개혁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불태우면서,

혁신 세력으로 정치적 막후 역할 내지는 행동대가 되기도 했다.

육교시사의 맹주였던 강위(姜瑋, 1820~1884)는 광주의 무변 출신으로,

북학파의 거두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북학파와 개화파를 이어준 대표적 인물이다.

오세창의 아버지인 역매 오경석(吳慶錫, 1831~1879)도 추사의 제자로 북학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은 조선 말기의 중인계층 역시 신라 말기 육두품,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향리 층과 마찬가지로 사회 변혁기에 있어 새로운 국가를 여는 주체 세력이었으나,

이들이 역량을 발휘하기도 전 일제의 강점으로 다음 시대를 여는 시대적 과제를 다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각광받는 전문직 종사자들로 변신, 일제시대 때는 문화운동의 기수로,

다음 시대에 와서는 테크노크라트로 변신해 막강한 영향력을 지속해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 이강봉 편집위원

- 2010년 1월 11일 ⓒ ScienceTimes

 

 

 

 

 

 

 

 (4) 칼로 다스리던 일본은 조선 '당쟁' 이해 못해

 조선의 당쟁은 '논리의 정치'가 발달했다는 반증

 

 

 

  

“논리는 학문적 축적 없이는 나올 수 없다.

신하들이 논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전제 왕정이 아니라는 반증이며,

말이 많았고 시끄러웠다는 것은 그만큼 언로가 열려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1월16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은

종합토론을 통해 “조선시대가 사색당쟁만 하다가 망했다”고 주장하는 식민사관, 즉 당쟁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학자들의 나라, 조선에서 정쟁은 논리가 발달했다는 반증”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붕당(朋黨) 정치를 통해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양당 정치구조를 형성했으며,

동시에 왕권 견제까지 가능했다”며,

“칼로 다스리던 나라, 일본의 마인드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나라가 조선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인들에 대한 연구 더 이루어져야

정 위원장은 또 일제시대에 활약한 문인들, 즉 최남선, 박종화, 오세창, 전형필 등이

대표적인 중인 출신들로, 조선 시대 말부터 중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이 이어지면서 중인들의 연구가 단절됐으며,

지금까지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날 종합토론은 지두환 국민대 교수 사회로

서울대 연갑수 교수, 건국대 신병주 교수, 명지대 한명기 교수가 참여했으며,

조선시대 선비정신, 중인 계층 분석에 대한 질문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음은 이날 토론 중에 있었던 일문일답 내용.

▲ 식민사관과 당쟁은 어떤 연관이 있는가.

질문하고 있는

연갑수 서울대 교수 

“식민사관은 반도적 성격론, 사대주의론, 당쟁론, 문화적 비독창성론, 정체성론 등 몇 개의 이론 틀로 분류된다. 반도적 성격론은 지리적 결정론으로 우리나라가 반도에 있기 때문에 종속성을 면할 수 없다는 숙명론이다.

사대주의론, 당쟁론은 주 공격대상이 조선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의 문화가 독창적인 것이 아닌 , 중국 문화의 아류에 불과하다는 비독창성론은 전통 시대 전체를 비판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중에 당쟁론은 식민사관에 있어 가장 중요한 논리로, 조선이 사색당쟁만 하다 망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선비들의 나라, 즉 학자들의 나라, 조선에서 정쟁은 논리가 발달했다는 반증이다.

논리는 학문적 축적 없이는 나올 수 없다.

신하들이 논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전제 왕정이 아니라는 반증이며,

말이 많았고 시끄러웠다는 것은 그만큼 언로가 열려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런 만큼 순기능도 많았다. 붕당 정치를 통해 양당 정치구조를 형성했으며, 동시에 왕권 견제가 가능했다.

칼로 다스리던 나라, 일본의 마인드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나라가 조선이었다.”


▲ 지금 선비정신이 필요한 분야는 어디라고 보는지.

“전 분야에서 선비정신이 빛을 발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다.

그것이 지나친 욕심이라면, 사회 주도층에 꼭 필요하다고 본다.

선비정신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분야마다 필요한 만큼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관료사회가 공적인 것을 먼저 하고, 사적인 것을 뒤에 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 정신을

실현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선진화된 나라가 될 것이다.

기업도 이제는 이익을 보변 의로움을 생각하는 견리사의(見利思義) 정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시대가 됐다.

보통 사람들은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도와주는 억강부약(抑强扶弱)의 정신을 실천해야 할 때다.

더 나아가 자신을 이겨내 예로 돌아가는 극기복례(克己復禮) 정신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말씀하신 중인들의 범주가 과연 타당한 것인가.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 

“중인 계층은 양반 계층의 신분 하락과 상인(常人) 계층의 신분 상승의 교차점에서 형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잡다한 경로를 통해 형성된 중인 계층이 과연 결속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조선시대에 있어 중인 문화와 신분상승운동은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인들이 확실한 계층으로 자리 잡고, 신분 의식을 공유하면서 한 시대를 이끌어갈 만큼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의 강점이 이루어졌고, 중인에 대한 연구 또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 중인 계층의 역할을 과도하게 평가한 것은 아닌가.

“조선왕조가 존재하는 한 중인 세력이 상층 지배층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조선왕조가 망한 후에야 그들은 일제 문화운동의 기수로 활약할 수 있었다.

일제시대에 활약한 문인들, 즉 최남선, 박종화, 오세창, 전형필 등이 대표적인 중인 출신들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명분사회에서 비교적 자유스러웠기 때문에

새로운 가치관에 재빨리 적응하고 변신할 수 있었다.

주체적으로 자기 체질화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일제 식민지배에 포섭되면서 외세 의존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중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길을 걸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 기술직 중인들의 실무 능력이 정말 탁월했는가.

“기본적으로 실무 능력을 닦지 않으면 잡과 시험에 합격할 수 없었으므로

아무리 세습이라 할지라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다만 그 시험의 강도가 모든 시대에 걸쳐 균질하였는지는 좀 더 많은 연구를 해봐야 분명해질 것 같다.”


▲ 조선시대 중인계층을 결속시킨 이념적, 사상적 기반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북학(北學) 사상이다.

북학사상은 18세기 중반 노론의 젊은이들이 연행사(燕行使, 북경에 가는 사신)의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북경으로 갔다가, 청의 선진 문명에 눈떠 淸을 배우자는 세계화 운동으로 시작됐다.

그들은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발전하고 있는 청나라 발전상에 충격을 받고,

귀국한 후 조선이 고립주의로 낙후돼 있다는 판단 아래 이제는 淸에 이식된 서양 기술문명을 받아들이고,

상공업을 발전시켜, 농경사회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淸의 주인이었던 여진족을 정벌하자는 북벌(北伐)이 조선 시대 대의였던 만큼

정반대 기치를 내건 급진운동, 북학이 무사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홍대용, 박지원 등 그 선봉장들이 집권 노론의 핵심가문 출신이어서

박해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강봉 편집위원

- 2010년 1월18일 ⓒ ScienceTimes

 

 

 

 

 

더보기

 

●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강좌 : http://blog.daum.net/gijuzzang/7572583

 

한국학술진흥재단 제2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강좌' - 윤사순 고려대교수(한국철학)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014

● 한국학술진흥재단 제2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강좌' - 장회익 서울대명예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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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술진흥재단 제2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강좌’ - 이혜순 이화여대명예교수(국문학)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156

● 한국학술진흥재단 제2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강좌' - 정운찬 서울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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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술진흥재단 제2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강좌’ - 김주연 숙명여대명예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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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술진흥재단 제2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 강좌’ - 김호동 서울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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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술진흥재단 제2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강좌’ - 이태수 인제대교수(서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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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술진흥재단 제2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강좌’ - 김석철 명지대 석좌교수(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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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술진흥재단 제2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강좌’ - 박은정 서울대교수(법철학)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816

 

● 한국학술진흥재단 제3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강좌’ - 김우창 이화여대학술원 석좌교수

    (영미문학 비평)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