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당간(幢竿) - 사찰의 장엄, 수호

Gijuzzang Dream 2009. 12. 31. 14:25

 

 

 




 

당간과 당간지주는 사찰의 존재를 알려 준다

 

절터를 찾아다니다 보면 폐허가 되어 논밭으로 변한 곳에 2개의 돌기둥이 솟아 있거나

민가 옆에 다른 용도로 쓰기 좋은 사각형 돌기둥을 자주 볼 수 있다.

그것이 당간지주인데 가운데 우뚝 솟은 당간(幢竿)을 세우기 위한 고정시설이며,

높은 당간은 불전을 장엄하기 위한 번(幡)이나 깃발 형태의 당(幢)을 꼭대기에 걸기 위해

세운 지지대이다.

결국 당간지주와 당간을 세우는 의의는 당에 결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당간과 당이 남아있지 않아 지금은 초라한 모습이지만 마주보고 서있는

2개의 돌기둥은 오래전 큰 규모의 사찰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사찰을 장엄하고 수호하며 위상을 높이고자 당을 걸다

 

당간(幢竿)은 멀리 불교가 발생한 인도에서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우리 땅에 들어왔다.

초기 사찰에서는 세워지지 않다가 불교가 발전하고 체계화되면서 사찰을 구성하는 건축물들이 많아지고 다양한 요소들이 사찰로 흡수되면서 건립된 조형물이었다.

 

더불어 사찰의 위상을 높이고 종파적 특성을 분명하게 표출할 뿐만 아니라 당간을 높이 세워 깃발을 달아 부처님이 주재하는 신성한 영역임을 나타내고자 했다.

어느 건축물보다 높게 당간을 세워 꼭대기에 휘날리는 당을 걸어 불가의 세계임을 장엄하고자 했다. 여기에 더하여 당간의 꼭대기에 용머리를 올리고 입에 당을 걸어 마치 용이 보주를 물고 있거나 성스러운 기운을 내뿜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 조성하여 사찰에 대한 수호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멀리서도 보이는 당과 당간은 그곳에 사찰이 있음을 알리는 표식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처럼 사찰 가람에 당간을 세우는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나타나

당시 수도였던 경주 지역 사찰을 중심으로 건립되기 시작한다.

경주에 있는 사천왕사, 망덕사, 삼랑사, 불국사를 비롯한 당대 불교계를 대표한 중심적인

사찰에 건립된다. 점차 기존에 있었던 사찰에 새롭게 건립되기도 하고,

창건되는 사찰에서는 필수적인 조형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런데 당간은 모든 사찰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일정 규모 이상이거나

왕실의 참여나 후원이 있었던 사찰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특히 대부분의 사찰이 1기의 당간을 세웠는데 황룡사, 불국사, 미륵사는 2기의 당간을

좌우에 세워 당간만 봐도 사찰의 위상을 알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처음에는 도시에서 가까운 사찰이나 중심 사찰 위주로 건립되다가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지방에 소재한 사찰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래서 경주를 벗어난 단속사, 부석사, 비로사, 법광사, 동화사, 장의사, 중초사 등

지방의 유력 사찰에 건립된다.

 

고려시대에는 많은 사찰이 창건된 개경을 중심으로 세워지다가

점차 지방 사찰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신라의 경우 불교의 중심이었던 경주를 통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교리와 계율을 중시하는 교종 사찰을 중심으로 건립된 반면

고려시대에는 종파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찰에 당간이 세워졌다.

 

 




사바세계와 불가의 세계를 경계지으며 불심을 유도하다

 

중앙아시아나 중국은 경내에 당간을 배치하였지만

신라는 사찰로 들어가는 초입에 세웠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시대까지 지속된다.

 

또한 다른 나라는 당간을 세울 때 많은 공력을 기울이지 않은 반면

신라나 고려시대 장인들은 석탑이나 불상 못지않게 정성을 다하여 조성하였다.

그만큼 사찰에서 중요한 조형물로 인식했음을 방증하는데,

이는 우리 고유신앙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삼한시대부터 신성한 영역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그러한 곳에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입구에 솟대와 같은 특정한 조형물을 세워 표식으로 삼았다.

이러한 전통이 불교와 습합되면서 사찰이 불가침의 영역은 아니지만 부처님이 머무는

신성한 공간으로 불가의 세계와 사바세계의 경계를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당간은 사찰로 들어가려는 불도들에게 깨끗한 마음을 유도하고, 불심을 갖도록 하는

첫 대면의 조형물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깃봉처럼 단순하게 깃발 형태인 당을 걸기 위한

조형물이 아니라 꼭대기에 용이나 봉황 등 수호의 의미가 강한 동물상을 조각하여

올림으로써 예배의 대상이 되도록 했다.

 

이런 사실은 당간이 일반적으로 나무, 철, 동 등으로 만들어져 남아있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당간 관련 기록이나 현존하는 일부 유물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당간지주는 전국에 많이 남아있지만 당간까지 남아있는 경우는 수기에 불과하다.

철을 주조하여 고층으로 당간을 올린 기술은 오늘날 반도체 기술에 버금가는 하이테크였다.

당간을 철로 만든 용두사지 철당간, 갑사 철당간, 칠장사 철당간 등이 있고,

로 만든 것은 미륵사지 당간, 부안 서외리 석당간, 영광 단주리 석당간 등이 있다.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은 당간 꼭대기에 용머리를 올렸기 때문에 절 이름도 용두사(龍頭寺)라 했으며, 철당(鐵幢)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당시 청주에 살던 김예종(金芮宗)이 염질에 걸리자 병을 낫게 해주고 죽은 후에도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전한다.

 

당간은 용의 몸 자체이며, 전체적인 당간의 모습은 용이 승천하는 형상이었음을 알려준다.

용이 동서양을 넘어 우리 민족과 상당히 가까웠고 중요하게 인식됐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의상이 당나라 유학 마치고 귀국할 때도 그를 사랑한 선묘가 용이 되어 항해의 무사안녕을 지켜주었고, 신라 문무왕은 죽어서 용이 되어 왜구를 막고자 했다.

이처럼 우리 민족에게 용은 상상의 동물이 아닌 인간 세상에 화현한 현실속의 동물로 생각되었다. 용은 다양한 조형물에 가장 많이 등장하여 사찰을 장엄하는 대표적인 동물이었다.

 

지금은 당간지주와 당간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되었지만 예전에는 의미에 초점을 두어 법당(法幢) 또는 보당(寶幢)이라 했고, 사찰에 세웠다고 하여 찰당(刹幢) 또는 찰간(刹竿)이라고도 했다. 또한 재료에 중점을 두어 철당(鐵幢)이나 석당(石幢)이라 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도시 경관을 기록하면서

‘절들이 별처럼 널려 있고, 탑들이 기러기 행렬같이 많고, 법당을 세우고 범종도 달았다.’라고 하여 당간이 사찰에서 중요한 조형물로 불법(佛法)을 높이는 신앙의 대상물이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신라의 명품 당간지주가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2개의 돌기둥으로 세워진 당간지주는 마주보고 있는 방향과 주변 지형 등을 고려하면 절터에 흩어져 있는 기와나 토기 조각들을 보지 않고도 사찰의 전각들이 어디 있었는지 대략적으로 알려준다.

 

그것은 당간지주가 사찰의 초입에 세워졌고, 당간을 지나 경내로 진입했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지금도 당간지주가 남아있는 사찰이면 가장 먼저 면접하고 경내로 들어가야 한다.

 

신라 장인들은 당간과 당간지주를 만들 때 정성을 기울여 정교하게 세운 반면 고려시대가 되면 처음에는 신라를 계승하지만 점차 간략하게 다듬거나 미적인 요소를 아예 생략해 버린다.

그래서 고려시대 당간지주들은 규모가 커서 위압적이거나 육중한 인상을 주고 있어 시대별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신라와 고려시대의 당간지주를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신라는 명품이 많고, 고려는 아류작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당간이 조선시대 접어들어 거의 사라진다.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들어와 불교계가 위축되면서 불사가 크게 줄고,

신앙과 예불의 주요대상이 불상이나 괘불(掛佛)로 옮겨진 것과 관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幢) 대한 인식이 저하되고 대형 불화인 괘불의 등장에 따른 신앙의 증가는

점차 당간(幢竿) 필요성을 절감시켰다.

그런데 괘불지주는 경내의 중요 전각 앞에 세워졌으며, 괘불을 걸기 위한 기능적인 측면을 중시한 시설물로 당을 걸기 위한 당간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괘불지주가 당간과 당간지주를 모방하여 건립되었지만

기능이나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구분해서 명칭이 사용되어야 한다.



 

 

당간과 당간지주도 당대의 역사를 담고 있는 조형언어이자 산물이다

우리 역사를 전해주는 기록들은 풍부한 편은 아니지만 지극히 적다고는 할 수 없다.

기이하고 황당하지만 다양한 암시와 속내로 역사를 전해주고 있는『삼국유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료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기록들은 사실일지 몰라도 볼 수는 없는 역사이다.

반면 조형물은 볼 수 없는 역사를 눈앞에 펼쳐 보여주고 증거물로도 작용하여 마주하는

역사이다. 그래서 어떤 기록물보다 생동감있고 신뢰하게 만드는 역사물이다.

우리 민족의 발자취이자 문화유산으로서 조상들의 삶과 정신이 녹아있기 때문에 그 속에

담겨있는 역사와 문화를 들추어 내어 사실을 밝히고 조상들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다.

 

당간(幢竿)과 같은 조형물들이 어떤 말도 해주지는 않지만 무감각한 무생물이라 생각하지 말고, 따뜻한 친구처럼 애틋한 연인처럼 대하고 자주 만난다면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안목을 넘어 혜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어느 특정 시대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관점으로 다가가서는 절대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때 당시의 역사와 문화는 그 시대의 정신과 사조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간과 당간지주도 당대의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의 산물임을 명심해야 한다.   

 


- 엄기표, 단국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

- 2009-12 월간문화재사랑,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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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보당(金銅龍頭寶幢)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831